[[파시즘]]은 [[어뤄쓰족]]들이 거주하는 [[만주]]에 존재했고 이의 전신인 [[러시아 파시스트 기구]]와 그 외 단체들은 이에 대한 교리를 촉진시켜왔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에서 [[러시아 백군|백군]]이 패배하자 백군 지도자들은 신빙성을 잃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파시즘]]의 대두로 러시아 이민자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시즘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백계 러시아인들 사이의 파시스트 운동은 전 세계적이었으나 그 지지자들 대부분은 만주와 [[미국]] 거주자였다. [[1900년]]부터 [[1905년]]까지 [[러시아 제국]]이 만주를 침략했을 때 많은 러시아인들이 만주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일부 러시아인들도 [[붉은 군대]]를 피해 도망을 가면서 그 수는 늘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 드미트리비치 코즈민]] 소장의 대표 직속으로 RFP의 기반을 닦는 등 다양한 백계단체의 비밀 협약도 이루어졌으며 [[콘스탄틴 블라디미로비치 로자예프스키|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는 [[1931년]] 5월 26일 당 중앙위원회 사무총장이 되어 당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신, 국가, 노동"이라는 표어를 내세웠고 '''국가'''({{llang|ru|нация|나치야}})라는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고, 국내외 갈등에 직면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불안정한 처지를 되살리기 위해 이탈리아 파시즘을 내세웠다.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RFP는 [[관동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일본을 강력하게 지지했는데 이는 1945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망명 기간 동안 미국에서는 유사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1934년 3월 24일 RFP와 [[아나스타시 본야츠키|본야츠키]]의 지지자들은 좀 더 보수적인 러시아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로자예프스키의 주장과 본야츠키가 거부했던 [[반유대주의]]를 놓고 충돌하였으며 도쿄에서의 합병에 동의한 상태였다. 로자예프스키의 추종자들은 1932년부터 독일어에서 러시아어까지 다양한 [[뵐키쉬]] 소책자를 번역해왔으며 [[나치 독일]]의 수립에 우호적이었다. 로자예프스키의 불편한 점은 관동군이 그에게 만약 [[소련]]과의 전쟁이 일어나면 만주에 있는 모든 러시아 이민자들은 [[아타만]]인 [[그리고리 세묘노프]]의 지휘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세묘노프는 러시아 내전에서 패한 무능한 장군으로, 불미스러운 인물이라고 주장하던 본야츠키와는 조직범죄에 연루되어 만주에서 잘 알려지면서 긴장감을 자아낸다. 본야츠키는 "러시아 해방"은 러시아인 자신만이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고 외세와는 협력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