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 (화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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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김기창은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운니동]]에서 당시 총독부 토지관리국 직원이던 아버지 김승환과 어머니 한윤명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ref>유경희, 인물기행: 운보 김기창의 삶과 예술, 1995년, 한국논단, 2월호, 102-110면 중 104면</ref> 보통학교 입학 이전까지의 유년기를 잠시 [[충청남도]] [[공주시|공주]]에서 보내기도 했다. 여덟 살(승동보통학교 2학년)에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상실한 후 언어 장애의 증세가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의 소개로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에게 동양화를 배워 [[1931년]] 조선미술대전에 출품하여 [[1940년]]까지 6회 입선, 특선 3회를 기록했다.
 
24살 때인 [[조선미술전람회]](줄여서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운보는 연4회 특선 경력으로 27살에 선전 추천작가가 되었는데, 이후로 [[광복]] 전까지 주로 일제의 내선일체 사상을 정당화하는 친일 활동이 이어졌다. 1942년에서 1944년까지 일제 말 친일 미술전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 1943년 8월 6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그림과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년 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적진육박〉이 친일 작품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1940년 10월 조선남화연맹전, 1943년 1월 애국백인일수전람회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협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