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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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종래의 색주가, 사창가의 매음녀가 충당된 경우였으나 이는 극히 소수였다. 두 번째는, 일반 여성을 상대로 공공연하게 작부를 모집을 한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많은 경우는 아니었다.<ref name="kangman29"/> 셋째는, 가난한 집안의 소녀들을 상대로 [[일본]] 등지의 공장 여공으로 알선한다고 속여 선금을 주고 데려가 '성노예'로 충당하는 방법이 가장 널리 적용된 것이라 파악된다.<ref name="kangman29"/> 근로정신대에 동원되었다가 중노동과 기아 등을 견디지 못해 탈출했다가 실패하여 강제로 위안부로 편입되었다는 진술도 있다.<ref name="kangman29"/>
 
당시 위안부 업소를 운영하던 이들 중 [[1942년]] 당시 [[중국]] [[상하이]]의 위안부 중개업을 하던 [[조선인]]의 이름이 [[중국]] 상하이 시의 기록을 통해 일부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상하이 시상하이시]] 무창로 338번지의 위안부 업소 운영자는 조선인 공돈(일본 이름 永田芳太郞)으로, [[경상남도]] [[김해군]] 명지면 중리 115번지 출신이며 [[1940년]] [[4월 4일]]에 [[상하이]]로 건너왔다.<ref name="johson358">박지향, 김철 외,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2006) 358페이지</ref> [[상하이 시상하이시]] 보백로 자운별리 2호에서 위안업을 경영하던 정기천(일본 이름 永川光星)은 [[함경북도]] [[길주군]] 웅평면 출신으로 [[1918년]] [[5월 5일]]에 중국으로 입국했고, 두강지로 보덕리 60호에서 위안업을 운영하던 한차례(일본 이름 大原光江)는 [[경상남도]] [[마산부]] 오동동 13번지 출신으로 [[1937년]] [[11월]]에 입국하였다.<ref name="johson358"/> [[매일신보]]에는 [[경성부]] 종로에서 위안부 중개업을 하던 허씨라는 조선인 여성이 기록에 나타나기도 했다.
 
===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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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ope="col" class="unsortable" |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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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9월 8일 || 아리랑비 || {{국기나라|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지마 시미야코지마시]] || - ||<ref>{{뉴스 인용|url=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371100002&ctcd=C01 |제목=오키나와의 아리랑고개 |뉴스=주간조선 |날짜=2015-08-24 |저자=황은순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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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0월 23일 || 위안부 기림비 || {{국기나라|미국}} [[뉴저지주]] 팰리세리즈팍 공립 도서관 옆 || 시민참여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