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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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국가는 영어판에도 없는것으로 알고있는데 국가 까지는 아닌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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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ef9070|632년-661년 [[정통 칼리파조]]}}
{{범례|#fad07d|661년-750년 [[우마이야 칼리파조]]}}]]
[[파일:Map Crusader states 1135-en.svg|섬네일|upright=1.35|1145년 지중해 동해안 지도. 프랑크계 [[십자군 국가]]들([[예루살렘 왕국대공국]], [[트리폴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은 붉은 십자({{color|red|☩}})로 표시.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공국]]은 아르메니아인이 세운 십자군 국가이다. 서쪽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보인다. 이슬람권인 [[셀주크 제국]]과 [[파티마 칼리파조|파티마조 이집트]]는 녹색으로 표시되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하였고, 632년 죽기 전까지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하나의 [[정체]]로 통일시켰다. 아랍인들은 7세기와 8세기를 거치며 군사 정복을 통해 급속히 팽창했다. 그들의 영향력 판도는 [[인도 아대륙]] 북서부와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남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피레네 산맥]]에 걸쳤다. 예루살렘은 637년 [[예루살렘 공방전 (636년-637년)|공성전]] 때 함락되어 비잔티움 제국에게서 이슬람 세계로 넘어갔다.<ref>{{Harvnb|Wickham|2009|p=280}}</ref><ref>{{Harvnb|Lock|2006|p=4}}</ref><ref>{{Harvnb|Hindley|2004|p=14}}</ref>
 
아랍인들이 예루살렘을 지배한 뒤로도 아랍 세계와 유럽 기독교 세계는 어느 정도 관용하며 무역과 정치적 관계를 지속했다. 천주교도들의 성지순례가 허용되었고, 무슬림 영토에 사는 기독교도들에게는 [[딤미]]의 지위가 내려져 법적 보호를 받았다. 기독교도 딤미들은 교회를 계속 운영했으며, 서로 종교가 다른 집안 사이의 통혼도 극히 드물지 않았다.<ref name="Findley2005p73">{{harvnb|Findley|2005|p=73}}</ref> 이렇게 다양한 문화와 신념들이 혼재하며 평화롭게 경쟁하던 관계는 [[튀르크족]]이 서진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1071년 셀주크 튀르크족이 비잔틴 육군을 대패시킨 [[만지케르트 전투]]가 전통적으로 그 변곡점으로 지목되곤 했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만지케르트 전투는 [[셀주크 제국]]이 [[아나톨리아]]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다.<ref>{{Harvnb|Asbridge|2012|p=27}}</ref> 천주교도 순례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이런 상황들이 전해졌고, 시리아 지역의 항구들과 예루살렘은 점차 각박해졌다.<ref>{{Harvnb|Asbridge|2012|p=28}}</ref>
 
기독교도들은 [[우마이야 칼리파조]]에게 정복당했던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하는 [[레콩키스타]]를 8세기부터 진행해 왔다. 1085년 레온-카스티야왕 [[알폰소 6세 (레온과 카스티야)|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탈환하면서 레콩키스타 운동이 전환점을 맞았다.<ref>{{Harvnb|Bull|1999|pp=18–19}}</ref> 비슷한 시기인 1091년, [[노르만인]] 모험가 [[로제 1세|로제 드 오트빌]]이 무슬림들이 지배하는 [[시칠리아 토후국]]을 무너뜨렸다.<ref>{{Harvnb|Mayer|1988|pp=17–18}}</ref>
 
이렇게 여러 전선에서 권력쟁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1054년에는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가 상호 파문, 기독교 세계가 두쪽나는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다.<ref>{{Harvnb|Mayer|1988|pp=2–3}}</ref> [[그레고리우스 개혁]] 이후 [[교황령]]은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과 권력을 증가시키려 시도해 왔고, 그 과정에서 교황과 [[신성로마황제]] 중 어느 쪽에 사제 서임권에 대한 우선적 권리가 있느냐는 [[서임권 투쟁]]이 1075년경부터 시작되어 제1차 십자군 시기까지 계속되었다.<ref>{{Harvnb|Rubenstein|2011|p=18}}</ref><ref>{{Harvnb|Cantor|1958|pp=8–9}}</ref> 서임권 투쟁 중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대립교황 클레멘트 3세]]가 옹립되어 군림했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초기 재임기 대부분을 [[로마]] 밖에서 망명생활로 보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증대시키고자 한 교황령의 종교적 선전선동에 의해 무슬림들로부터 팔레스타인 성지를 되찾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요구와 관심이 천주교 세계 인구 전반에 걸쳐 극렬해졌다. 십자군 종군은 그 자체로 죄를 씻을 수 있는 [[보속]]의 한 형태로 여겨졌다.<ref>{{Harvnb|Riley-Smith|2005|pp=8–10}}</ref>
 
=== 11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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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랑스왕 [[필리프 1세]]와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는 모두 우르바노 2세와 분쟁 관계였기 때문에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저지대, 이탈리아의 많은 귀족들이 이 모험에 동참했다. 그 중 필두라고 할 수 있는 이는 노회한 정객이었던 [[툴루즈 백작]] [[레몽 4세 드 툴루즈 백작|레몽 드 생질]]이었다. 한편 남이탈리아 출신의 가난하지만 무력이 강용한 노르만인 귀족 [[보에몽 1세|보에몽 드 타란토]]와 그 조카 [[탕크레드 드 오트빌 (1072년)|탕크레드 드 오트빌]]이 레몽에 맞서 그와 경쟁했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그 동생 [[보두앵 1세 (예루살렘)|보두앵 드 볼로뉴]]가 [[로렌]], [[로타링기아]], [[독일]]에서 소집된 군대를 이끌고 여기에 합류했다. 이상 다섯 명이 전투에서 활약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로베르 2세 드 노르망디 공작]], [[에티엥 2세 드 블루아 백작]], [[로베르 2세 드 플랑드르 백작]]이 소집한 북프랑스군도 합류했다.<ref>{{Harvnb|Asbridge|2012|pp=43–47}}</ref> 이렇게 모인 [[제1차 십자군]]의 총 병력은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10만 명 정도였다. 그들은 육상으로 동진하여 비잔티움에 도달, 알렉시오스 1세의 조심스러운 환영을 받았다.<ref>{{Harvnb|Hindley|2004|pp=30–31}}</ref>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 제후들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과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룸 술탄국]]의 수도로 선언한 니케아를 첫 공략 목표로 삼을 것을 설득했다. 오합지졸 군중 십자군을 무찌르고 방심하고 있던 킬리지 술탄은 다른 영토 분쟁을 해결하려고 니케아를 비워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십자군이 육상에서 공성하고 동로마군이 해상 지원하면서 니케아가 함락되었다. 이후 십자군은 이집트로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으려 했는데, 십자군이 무슬림 세계의 정치적 종교적 분열을 이용하려 한 첫 사례였다.<ref>{{Harvnb|Asbridge|2012|pp=52–56}}</ref>
 
십자군이 튀르크족의 [[궁기병]] 전술과 제대로 처음 맞붙어본 것은 [[도릴라이움 전투]] 때였다. 보에몽과 로베르가 이끄는 노르만인 선두 부대가 튀르크 경기병대에게 습격당했다. 노르만인들은 몇 시간 동안 버텼고, 십자군 본대가 도착하자 튀르크족은 후퇴했다. 이 전투 이후 셀주크 튀르크는 십자군과의 교전을 회피하기 시작했다.<ref>{{Harvnb|Asbridge|2012|pp=57–59}}</ref> 또한 [[말리크 샤 1세]]가 죽고 튀르크족은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에서 각각 후계 샤를 옹립하고 서로 싸우는 분파주의적 행태를 보였다.<ref>{{Harvnb|Asbridge|2012|pp=21–22}}</ref> 십자군은 3개월에 걸친 고된 행군 끝에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굶주림과 갈증, 질병으로 전력이 크게 줄어들어 있었고, 보두앵은 에데사에 자기 나라를 세우겠다고 기사 100명을 데리고 이탈하기까지 했다.<ref>{{Harvnb|Asbridge|2012|pp=59–61}}</ref> 십자군은 8개월에 걸쳐 [[안티오키아 공방전|안티오키아를 공성]]했지만 자원의 부족으로 도시를 함락시킬 수 없었다. 안티오키아 시민들 역시 침략군을 격퇴할 만한 자원이 모자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보에몽이 수비병 한 명을 꾀어 성문을 열게 했고, 안티오키아에 입성한 십자군은 무슬림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그리스인, 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시민들까지 모조리 학살했다.<ref>{{Harvnb|Asbridge|2012|pp=72–73}}</ref>
 
수니파 무슬림들은 이제 십자군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바그다드 술탄은 모술 영주 [[카르부가]]에게 군대를 내주고 안티오키아를 탈환하게 했다. 십자군에서 이탈한 에티엥이 동로마측에게 전쟁의 대의명분을 이미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동로마군은 십자군의 안티오키아 수비를 도와주지 않았다. 탈영자와 아사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십자군은 항복하겠다고 했지만 카르부가가 십자군을 모조리 죽이겠다며 거부했다. 그러던 와중 [[피에르 바르텔레미]]가 성 안에서 [[성창]]을 찾았다고 주장하면서 수비군의 사기가 고양되었다. 보에몽은 이제 남은 선택지는 결전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공격군에 대한 역습을 개시했다. 카르부가의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무슬림 특유의 분파주의로 분열되어 있었던데다 예상치 못한 십자군의 습격에 놀라 공성을 포기하고 달아났다.<ref>{{Harvnb|Asbridge|2012|pp=72–82}}</ref> 이후 십자군은 획득한 영토를 분배하는 문제를 두고 다투며 안티오키아에 몇 개월을 눌러앉았다. 그러던 와중 이집트의 파티마조가 튀르크로부터 예루살렘을 탈취했으며, 이집트인들이 지배를 공고히하기 전이 공격의 기회로 부상함에 따라 마침내 공격이 재개되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 계속 남아서, 점령지를 동로마 황제에게 반환하겠다던 맹세를 어기고 안티오키아를 자기 것으로 취했다. 이후 나머지 십자군은 레몽의 지휘하에 지중해 동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쾌진격했다.<ref>{{Harvnb|Asbridge|2012|pp=146–5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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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대한 첫 공격은 십자군측의 자원 부족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제노바인들이 [[자파]]를 통해 장인들과 보급품을 전달해오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십자군은 거대한 공성병기 두 개를 건조했고, 그 중 고드프루아가 지휘한 공성병기가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 성벽을 깨뜨렸다. 이후 이틀에 걸쳐 십자군은 예루살렘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학살의 수효가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성지에서 학살과 약탈을 벌였다는 사실은 십자군의 평판이 야만으로 굳어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ref>{{Harvnb|Asbridge|2012|pp=96–103}}</ref> 이후 고드프루아는 파티마조 [[칼리파]]의 고관 [[알아프달 샤한샤]]가 이끄는 지원군을 [[아스칼론 전투]]에서 깨뜨리면서 프랑크인의 우위를 확실히 했다. 무슬림 지원군은 이집트로 후퇴했고, 알아프달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ref>{{Harvnb|Asbridge|2012|pp=104–06}}</ref>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십자군은 자신들의 성지순례가 완료되었다고 여기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성지에 남은 것은 고드프루아와 기사 300명, 졸병 2,000명 뿐이었다. 고드프루아 외에 남은 제후는 자기 나라를 세울 야망을 가지고 있던 탕크레드 뿐이었다.<ref>{{Harvnb|Asbridge|2012|p=106}}</ref>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민중들 사이에 큰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경건한 천주교도들은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과<ref>{{Harvnb|Riley-Smith|2005|pp=23–24}}</ref> 안티오키아에서의 동방교회인 학살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ref>{{Harvnb|Tyerman|2006|pp=192–94}}</ref> 한편 이슬람 세계는 제1차 십자군에 대해 남긴 기록이 그렇게 많지 않다. 1130년 이전에는 문헌적 증거가 지극히 희박하다. 이것은 무슬림들이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문화적 오해에 더 큰 원인이 돌려지고 있다. 알아프달을 비롯한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정복과 영구정착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동기로 충만한 전사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며, 그저 동로마 황제의 사주를 받은 용병대의 선두집단쯤으로 여겼다.<ref>{{Harvnb|Asbridge|2012|pp=111–13}}</ref> 또한 이슬람 세계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수니파시아파]]와 이집트의 [[시아파수니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전쟁의 원인이 된 튀르크족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로 분열되어 있었다. 바그다드에서는 셀주크 튀르크 술탄이 아바스조 칼리파와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이런 점들로 인해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의 범세계적 반격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ref>{{Harvnb|Asbridge|2012|p=114}}</ref>
 
=== 12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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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제4차 십자군]]의 소집을 개시했다. 주로 프랑스에서 십자군이 모였지만 잉글랜드와 독일에서도 호응이 있었다.<ref>{{Harvnb|Tyerman|2006|pp=502–08}}</ref> 십자군이 [[베네치아]]에 집결하자,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와 독일왕 [[필리프 폰 슈바벤]]은 자신들의 세속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십자군을 이용했다. 단돌로의 목적은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해양력 확장이었고, 필리프는 자기 조카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와 매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를 동로마 황제로 복위시키고자 했다. 이 목적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임 동로마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알렉시오스 4세의 친삼촌)를 폐위시켜야 했다.<ref name="Davies 1997 359–360">{{Harvnb|Davies|1997|pp=359–60}}</ref> 베네치아에 도달한 기사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십자군은 베네치아인들에게 배삯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방향을 틀어 약탈을 해서 배삯을 충당하기로 했다. 그 전초전으로 십자군은 기독교도 도시인 [[자다르]]를 공성했다. 식겁한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십자군을 즉각 [[파문]]했다.<ref name="Lock 2006 158–159">{{Harvnb|Lock|2006|pp=158–59}}</ref> 이 파문은 나중에 철회되었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가 암살당하면서 원정의 본래 목적 중 하나가 달성되었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 그 뒤 일단 물러갔다가 두 번째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 이번에는 도시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1204년)|약탈]]하여 교회를 분탕질하고 시민들 다수를 학살했다. 제4차 십자군은 본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1,000 마일 떨어진 위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ref>{{Harvnb|Asbridge|2012|p=530}}</ref>
 
13세기는 열광적 신앙심이 민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시기였고, 그 결과 1212년의 [[어린이 십자군]] 같은 사건도 일어났다. 청소년 및 소년들 여러 무리가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른들은 실패했던 성지 탈환이 자신들의 순수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동지중해까지 도달한 어린이는 극소수에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사건들에 관한 믿을 만한 증거는 매우가장 희박하지만, 당시 천명된 대의에 대하여 사람들의 감정과 정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시사해주는 지표가 된다.<ref>{{Harvnb|Asbridge|2012|pp=533–35}}</ref>
 
[[파일:Friedrich II. mit Sultan al-Kamil.jpg|섬네일|left|알카밀(우측)을 만나는 프리드리히 2세(좌측). [[조반니 빌라니]]의 《[[신연대기]]》 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