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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 이후 6개의 주요 십자군 국가들과 그보다 세력이 미미한 여러 군소 국가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지중해의 십자군 국가들은 결국 모두 멸망하면서 2세기에 걸친 성지 경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1291년 최후의 기독교 전초기지가 무너진 뒤 성지 방면으로는 더 이상 십자군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북유럽과 서유럽 내부에서의 십자군은 여러 번 더 이루어졌다. 12세기 후반에는 [[벤트 십자군]]이 조직되어 발트 지역과 [[메클렌부르크]], [[루사티아]] 일대의 비기독교 부족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13세기 초에는 [[독일기사단]]이 [[프로이센]] 지역에 새로운 십자군 국가인 [[독일기사단국]]을 세웠으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왕이 자신의 영토를 지중해까지 확장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을 이용했다. 14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흥기하자 기독교 세계는 다시 십자군을 일으켰다. 하지만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와 1444년 [[바르나 전투]]의 대패로 가톨릭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1453년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것과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라나다 전쟁|그라나다를 정복]]한 것의 양대 대형 사건은 이 시기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의 최종적 중심축을 매듭지었다. 이후로도 [[구호기사단]] 같은 조직들이 존속하면서 십자군의 개념은 18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서유럽 세계의 관심은 이슬람 세계에서 신대륙으로 옮겨갔다.
 
십자군에 대한 근현대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일각에서는 십자군의 명분과 도덕적으로 모순되는결함되는 행동들을 지적한다. 교황이 십자군을 파문하는 경우도 있었음이 이를 증거한다. 십자군들은 이동하는 경로상에서 [[약탈]]을 저지르곤 했고, 십자군 지도자들은 획득한 영토를 본래 명분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에 반환하기보다 자기 영토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민중 십자군]] 때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군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고([[라인란트 학살]]), [[제4차 십자군]] 때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204년)|함락, 약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분명히 서양문명사에 유의미한 영향을 남겼다. 십자군으로 인해 [[지중해]]의 상업과 교역이 번창, [[제노바 공화국|제노바]]나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 같은 [[해상공화국]]들이 번영했다. 교황의 지도에 따라 라틴 교회라는 집합적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영웅주의, [[기사도]], 신앙심은 중세 문학과 철학의 촉매가 되었다.
 
== 용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