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령 마카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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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로마 교황]]이 포르투갈 정부의 후원으로 그 곳에 마카오 관구(管區)를 설립하였다. 그후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대(對)아시아 진출을 위한 거점이 되는 동시에 1841년 [[영국]]이 [[홍콩]]에 식민지를 개설하기까지 중국과 서양의 유일한 교류기지가 되었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진 문물은 그리스도교 외에 서양에서 발달한 [[천문학]], [[유클리드 기하학]], 근대적인 지도투영법, 대포주조기술 등이 있고, 특히 동·서양의 지리적 지식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한 [[마테오 리치]]도 마카오를 거쳐서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편전쟁]]으로 인하여 [[홍콩]]이 [[영국]] 식민지가 된 후, 아시아에서의 세력유지에 혈안이 된 [[포르투갈]]은 아오먼[澳門] 반도 전역과 [[타이파]]·[[콜론]] 두 섬을 점령하고, 1887년 [[청나라|청]](淸)·[[포르투갈]]조약을 맺어 그 지역에서 식민지 건설을 합법화하였다. 이후부터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1951년 포르투갈의 헌법개정에 따라 ‘해외주(海外州)’로 바뀌어 본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본국 정부가 임명하는 [[총독]]의 통치하로 들어갔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 마카오 정청(政廳)과 현지의 중국인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1973년 3월 ‘[[자치령]]’이 되고,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포르투갈 간에 국교가 수립되어 1986년 6월 11일, [[아니발 카바쿠 실바]] 당시 포르투갈 총리가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리셴녠]]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과 회담하였으며 1987년 4월 13일을 기하여 [[베이징]]에서 [[:zh:中葡聯合聲明|마카오 반환협정]]을 체결하고, [[1999년]] 12월 20일 중국은 마카오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였다.
 
== 외부 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