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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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 책봉 이전 ===
==== 생애 초기 ====
[[1575년]]에 태어났으며 [[조선 선조|선조]]와 [[김희철]]의 딸 [[공빈 김씨]]의 서차남으로 위로는 친형 [[임해군]] 이진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광해군(光海君)에 봉해졌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야사에 의하면따르면, 선조가 아들들을 불러 '가장“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고?”라고 물었더니,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기뻐했던 부왕 선조는 왕자들도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하여 원종공신록에 넣는다. 광해군도 이때 친형 [[임해군]] 진, 이복동생 [[신성군]] 후, [[정원군]] 부, [[순화군]] 보 등과 함께 [[광국공신|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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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 선조|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서자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질로 따지자면 광해군이 유력했으나 선조는 자신이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더군다나 서얼이라는 열등감을 가졋던 선조는 광해군이 정비에게서 나온 적자가 아님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다.
 
그러나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세에 이르자 더는 왕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의정부]][[좌의정]] [[정철]]은 건저(建儲) 문제를 제기했다. 그녀그녀는 [[동인 (정치)|동인]]의 영수인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 등과 함께 광해군의 책봉 문제로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경연]]에서 “나라가 어려울 때 빠른 시일 내에 세자를 책봉하는 것이 현명하다.”라며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라는 건의를 했다. 선조는 [[공빈 김씨]]가 죽은 후 [[인빈 김씨]]를 총애하여 인빈의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세자 건저 문제에서 동인 이산해의 계략에 넘어간 정철 등의 견제로 실패하였다. 이산해는 정철, 류성룡 및 다른 대신들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한 뒤,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에게 달려가 서인에서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귀띔했다.
 
정철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추천했으나, 신성군을 모함한다는 이유로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을 당하고 유배를 가게 되고, 동인은 이 일을 처리하게 되는데, 많은 서인을 외직으로 쫓아버리면서 선조는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서인]]을 멀리하며 [[동인 (정치)|동인]]들을 가까이 두었다. 이 일의 처리 문제 때문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은 [[정여립]]의 모반으로 일어난 [[기축옥사]] 때 정철에게 원한을 품어, 건저의 문제를 통해 서인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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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
{{본문|임진왜란}}
[[1592년]] [[5월음력 4월|4월]] [[임진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왕세자 책봉 문제가 거론되지 못하였으나,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해야 할 상황에 부닥치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을 했다.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위무하고 군량미를 모아 민중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부왕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왕 선조는 그런 세자 광해군을 오히려 경계하며 심하게 견제하였다. [[1598년]] 임진왜란이 종전되었지만, [[신성군]], [[정원군]] 등을 [[호성공신]]에 추가 수록한 데 반해 광해군에 대한 포상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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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608년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영창대군이 어린 상태에서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린 후 [[약밥]]을 먹다가 갑자기 체하여 승하하였다. 일설에는 독살설이 돌기도 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이때 교서는 선조가 내린 것이 아니라 인목왕후가 현실성이 없다 판단하여, 광해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출처|날짜=2008-6-4}} [[1608년]] [[음력 2월 2일]], 광해군은 3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유영경]]은 [[사류사회]](士類社會)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영경의 척신 정권에 대한 의도는 사류사회의 거부감만 가중시켜 유영경은 잇단 탄핵으로 주살되고, 사후에도 그 죄를 물어야 한다는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유영경 등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에그가 의해 축출되었던축출하였던 북인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파|대북]](大北)이라 하였다. 이후 소북파는 대북파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 즉위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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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파주시|파주]] [[교하읍|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수도를 교하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1618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청나라|후금]]을 건국하자 북방의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 방비에 힘썼다.
 
한편,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격하여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김경서]]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한다. 강홍립은 명나라군이 [[사르후 전투|사르후]], [[상간하다 전투|상간하다]], [[아부달리 전투|아부달리]]에서 잇달아 패주하고, [[부차 전투]](이상 3월)에서 조선군의 주요 지휘관이 전사하고 병력의 2/3가 괴멸하자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후금에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함으로써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면서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치자 서인세력들은 크게 반발하고 대노하여 "후금(여진족 세력, 흔히들 오랑캐라고 불림)에게 사대를 대하는 것은 왜란 때 명나라에서 군을 파병하여 우리 조선군을 도와주었는데 사대를 저버린다는 것은 배은망덕하고 오랑캐만도 못한 천한 놈이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이 나중에 말이 씨가 되어 광해군이 서인세력들이 이끌었던 [[인조반정]]으로 의해광해군이 폐위되는 빌미를 광해군이스스로 제공해준 셈이였다셈이었다.
 
그러나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 (철산군)|가도]]의 주둔으로 긴장감이 갈수록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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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첨과 [[정인홍]]이 무리하게 [[능창군]]의 역모와 [[영창대군]]의 옥사를 주관하고, [[1617년]]부터 [[인목왕후]]의 폐모론을 주장하는 것 역시 사림의 반발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한편 옥사를 일으킨 또 다른 주역인 [[허균]] 역시 다른 주역인 이이첨, 김개시 등에 의해등에게 처형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당일 광해군은 처음 반정을 접하고 이이첨의 반역으로 오해하였으며, 한편 김개시는 인조반정 직전 정보가 누설되어 반정 세력들을 검거할 수 있었음에도 반정 세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등 광해군 정권에 결정적인 위해를 끼쳤다.
 
=== 폐위 이후 ===
{{본문|인조반정}}
[[1623년]] [[음력 3월 14일|3월 14일]] 새벽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1641년]] 67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서인 [[이귀]], [[김류 (1571년)|김류]], [[최명길 (1586년)|최명길]], [[김자점]] 등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을 받들어 ‘[[반정]]’을 단행하고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으로 끌고 가 정죄한 뒤 유배시켰다. 인목왕후는 광해군과 폐세자에 대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 짓게 된다.
 
서인 [[이귀]], [[김류 (1571년)|김류]], [[최명길 (1586년)|최명길]], [[김자점]] 등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을 받들어 ‘[[반정]]’을 단행하고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으로 끌고 가 정죄한 뒤 유배시켰다. 인목왕후는 광해군과 폐세자에 대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반정의 명분인 폐모살제(廢母殺弟)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 짓게 된다.<ref name='hdhy'> [http://www.hdh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6 광해군은 어떻게 제주에 유배 오게 되었을까, 이준후, 산업은행 제주지점장, 2010녀 7월 6일], 현대해상 </ref> 곧 반정군에게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은 죽고, 40여 명의 관리가 구금된다.
곧 반정군에 의해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은 죽임당하고, 40여 명의 관리가 구금된다. 광해군은 곧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던 아들 폐세자 질과 며느리 박씨는 탈출에 실패하고 자결하였고, 부인 유씨 역시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광해군은 폐위 후 폐비 유씨, 그리고 폐세자 질와 폐세자빈 박씨와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고,<ref name='hdhy' /> 울타리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 후인 5월 폐세자와 폐세자빈은 탈출에 실패하고 자결하게 된다. 그때 폐세자는 다리미와 큰 가위를 이용해서 울타리 밑에 땅굴을 파고 도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었고, 인조는 그 소식을 듣고 한 달 뒤인 6월 사촌동생인 폐세자에게 자진을 명하고, 폐세자 질은 그 명에 따라 자진한다. 한편 폐세자빈 박씨는 남편이 잡히는 것을 보고는 나무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사흘 뒤에 깨어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ref name='hdhy' /> 그해 10월에 부인 유씨와도 사별하는데, 유배 생활 중의 화병이 원인이었다.<ref name='cc'>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52700320001 광해군의 유배생활과 최후], 문화컨텐츠닷컴 </ref>
그 뒤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유배살이를 하였으며, [[후금]]([[청나라]])측에서 [[정묘호란]]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폐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차례 역모 사건에 거론되었는데, 심지어는 광해군 스스로 친필 밀서를 역모 세력에게 전달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와 집권 서인은 그를 죽이지 않고 천수를 누리도록 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는 상궁과 포졸들로부터 영감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듣기도 했다. 초연히 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에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을 우려해 그를 충청도 [[태안군|태안]]으로 옮겼다가 강화로 다시 옮겼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 옆 [[교동도]]에 유배되었다.<ref name='hdhy' />
=== 사망후 ===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인조 15년) 6월 6일, 광해군은 제주 어등포(魚登浦 : 현 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다. 다음날 6월 7일 광해는 제주 주성 망경루(望京樓 : 구 제주세무서) 서쪽 또는 제주 서성(西城) 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ref name='omn'>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8206 '광해군'이 제주에 유배와서 죽었다고?], 오마이뉴스. </ref><ref name='hdhy' /> “두문(杜門)하여 자물쇠로 봉한 후 도사(都事) 등 5인은 서울로 올라갔고 속오(束伍) 유진군(留鎭軍) 중에서 30명이 윤번으로 수직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광해군은 제주에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외부의 출입과는 엄격히 통제된 생활을 하였다.<ref name='hdhy' /><ref name='omn' />
사후 장례는 박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에 의해 봉사하게 되었다.
 
그 뒤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유배살이를 하였으며, [[후금]]([[청나라]])측에서 [[정묘호란]]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폐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차례 역모 사건에 거론되었는데, 심지어는 광해군 스스로 친필 밀서를 역모 세력에게 전달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와 집권 서인은 그를 죽이지 않고 천수를 누리도록 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는 상궁과 포졸들로부터 영감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듣기도 했다. 초연히 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에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초연히 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년) [[음력 7월 1일|7월 1일]]에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한편 그가 죽은 시기인 음력 7월 1일 무렵에 제주도에 비가 자주 오는데, 이를 “광해우”라 칭하기도 한다.<ref> [http://www.hani.co.kr/arti/area/jeju/906576.html 제주에 내리는 비 ‘광해우’…광해군의 제주 유배기억전], 한겨레. </ref><ref> [https://www.yna.co.kr/view/AKR20180521064400056 [쉿! 우리동네] 광해 숨 거둔 날 유배지 제주선 가뭄에도 비오더라], 연합뉴스. </ref>
 
=== 사망 이후 ===
사후 장례는 박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이 봉사하게 되었으며, 광해군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공빈 김씨의 아래에 묻혔다. 공빈 김씨의 무덤 옆에는 임해군이 묻혀 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반기 내내 친형 임해군을 죽인 패륜사건과 폐모살제(영창대군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하는 사건)를 이유로 연산군에 이어 패륜의 군주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조금씩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 중 [[강홍립]]을 파견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고 사대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조선 시대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광해군 대의 외교를 중립 외교 혹은 실리 외교로 보는 시각이 등장하면서 여러모로 재평가, 현재는 폭군으로서의 이미지가 많이 희석이 됐다. 그의 묘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광해군묘는 문화재보호에 따라 여행관광 및 방문이 제한된 곳으로 광해군 제향식날에만 한시 개방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출입이 금지되기 때문에 방문을 원하면 [[문화재청]] 사릉 관리사무소에 사전문의나 출입신청을 해야한다해야 한다.
 
== 시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