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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는 [[고구려]]·[[발해]]의 영역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연주(연산부)·무주로 불렸다. 1012년에는 고려의 [[강감찬]]이 [[거란]]과 싸웠고, 1216년에는 [[김취려]]가 [[금나라]]군과 싸웠다.
 
[[조선시대]]에는 연산도호부·무산현이 설치되었고 1428년에 양자를 아울러 영변대도호부가 놓여졌다. 1428년(세종 10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부사(府使)와 판관(判官)을 두고, 병마도절제사로 하여금 부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이후 한동안 [[평안도]][[병마절도사]]가 영변대도호부사직을 겸직하였다. 이듬해 3월 26일에는 [[조선 세종]]의 명으로 서반 토관직(土官職)을 설치하여 변민(邊民)을 이주시키고, 큰 진(鎭)을 설치하였다.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의 무대가 되고 있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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