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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부산대의 설립은 기적이었다. 물적 토대가 전혀 없었던 상태에서 국립대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민립운동에서 시작한 대학 설립에 경상남도가 개입하여 국립대학 설립이란 개가를 이뤘다. 기존의 전문학교인 부산수산고등학교를 흡수하긴 했으나 곧 부산대로부터 분리되면서 사실상 신설된 국립대가 종합대가 되었다. 부산대 외의 국립대는 모두 기존의 관립 전문학교나 도립대학을 국립으로 전환하여 만들어졌다. 예컨대 경북대와 전남대는 대구와 광주지역 전문학교가 국립으로 승격된 후 종합대학교로 합친 것이고 충남대와 충북대, 전북대, 강원대, 경상대, 제주대는 도립대학으로 출발하여 국립으로 승격됐다.
 
=== 설립 과정 ===
[[파일:Pusan Natl Univ by Ficell 006.jpg|섬네일|left|220px|부산캠퍼스의 옛 정문이었던 무지개문]]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일제에 의해 그동안 억눌렸던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분출하였다. 일제는 민립대학 설립이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탄압하면서 관립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결국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경성제국대학 외에는 단 한 개의 민립대학도 설립되지 못했다. 각 지역에 의학, 사범, 농업 등 전문학교만 설립을 허가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 이전의 교육정책은 미군정에서 결정·집행하였다. 고등교육에 대한 개혁 방향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전문학교를 4년제 대학으로 재편하는 데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 국가체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재 양성의 열망은 뜨거웠다. 각 지역에서 대학 설립운동이 들블처럼 일어났다. 1945년 10월 당시 경상남도는 부산 지역 5∼6개의 대학 설립 기성회를 통합해 숙원사업인 국립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일본 식민지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민족을 위한 조선교육을 재건하기 위해 대학을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미군정청의 학무국은 부산대 대학설립기금으로 2000만원을 국고에 납부할 것을 경상남도에 요구했고 경상남도 당국이 감액을 요구하자 결국 1000만원으로 감액했다. 당시 경상남도 당국은 도민의 숙원인 국립대학 설립에 총력을 집중하여 미군정청이 제시한 국립대학 설립기금 1,000만 원 조달에 매진하였다. 경남 불교교무원은 고성 옥천사 사찰 소유의 토지 13만 5천 평(당시 500만 원 감정)을 내놓았고<ref group="주">1946년 초에 경상남도 불교교무원이 부산에 6년제 해동중학교를 설립하고자 경상남도 학무과에 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경상남도 학무과장 윤인구는 해동중학교 설립기금으로 신청되었던 고성 옥천사 사답 13만5천평을 국립대학 설립기금으로 희사해 줄 것을 권고하고 그렇게 해주면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건물 중에서 적당한 것을 해동중학교 교사로 선정하여 그 불하까지 주선해 주겠으며, 나아가서는 학교의 설립허가를 확정짓겠다고 언약했다. 경상남도 불교교무원장 박원찬은 이 제안에 대해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나, 경상남도 출신으로서 당시 중앙 불교교무원 총무부장으로 있던 최범술의 지시와 경상남도 내무부장 서상환의 강권에 못이겨 박원찬은 옥천사 사답 토지문서를 경상남도 당국에 전달했다. 이러하여 6년제 해동중학교 설립이 인가되고 영도 소재의 적산건물인 일제 때 입정(立正)상업학교 교사가 해동중학교 교사로 알선되었다. 그리고, 경상남도 당국은 김찬성의 후원을 얻어 영주동에 있는 조흥은행 부산지점에 의뢰하여 옥천사 토지를 500만원으로 감정받았다.</ref> 지역민과 기업들은 십시일반 헌금을 모아 1,000만 원이 넘는 1,032만 9,000원의 기금을 마련해주었다.<ref group="주">부산대학교 설립기금 1,000만원 내역=경상남도 불교교무원 고성 옥천사 사답 13만 5천평(조흥은행 감정가 5백만원), 부산음식조합의 대학설립기금 모금액 105만원(문병조 명의로 납입), 민립대학설립기성회 배인환 회장과 김찬성 부회장 유기처분금 80만원과 자동차 1대, 일본인 131개 어용단체 강제해산후 청산금의 국가귀속분 347만 9,000원</ref> 이 중 1,000만 원은 미군정청 문교부에 국립대학 설립기금으로 납입하였고, 일부는 대학도서관을 채울 막대한 양의 장서 확보에 사용했다. 국립대학 설립의 기초작업이 일단 완료된 뒤에는 윤인구 당시 경상남도 학무과장이 대학 설립을 위한 제반 행정절차를 밟았다.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 이전의 교육정책은 미군정에서 결정·집행하였다. 고등교육에 대한 개혁 방향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전문학교를 4년제 대학으로 재편하는 데 있었다. 당시 미군정청의 학무국은 부산대 대학설립기금으로 2000만원을 국고에 납부할 것을 경상남도에 요구했고 경상남도 당국이 감액을 요구하자 결국 1000만원으로 감액했다.
 
당시 경상남도 당국은 도민의 숙원인 국립대학 설립에 총력을 집중하여 미군정청이 제시한 국립대학 설립기금 1,000만 원 조달에 매진하였다. 경남 불교교무원은 고성 옥천사 사찰 소유의 토지 13만 5천 평(당시 500만 원 감정)을 내놓았고<ref group="주">1946년 초에 경상남도 불교교무원이 부산에 6년제 해동중학교를 설립하고자 경상남도 학무과에 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경상남도 학무과장 윤인구는 해동중학교 설립기금으로 신청되었던 고성 옥천사 사답 13만5천평을 국립대학 설립기금으로 희사해 줄 것을 권고하고 그렇게 해주면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건물 중에서 적당한 것을 해동중학교 교사로 선정하여 그 불하까지 주선해 주겠으며, 나아가서는 학교의 설립허가를 확정짓겠다고 언약했다. 경상남도 불교교무원장 박원찬은 이 제안에 대해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나, 경상남도 출신으로서 당시 중앙 불교교무원 총무부장으로 있던 최범술의 지시와 경상남도 내무부장 서상환의 강권에 못이겨 박원찬은 옥천사 사답 토지문서를 경상남도 당국에 전달했다. 이러하여 6년제 해동중학교 설립이 인가되고 영도 소재의 적산건물인 일제 때 입정(立正)상업학교 교사가 해동중학교 교사로 알선되었다. 그리고, 경상남도 당국은 김찬성의 후원을 얻어 영주동에 있는 조흥은행 부산지점에 의뢰하여 옥천사 토지를 500만원으로 감정받았다.</ref> 지역민과 기업들은 십시일반 헌금을 모아 1,000만 원이 넘는 1,032만 9,000원의 기금을 마련해주었다.<ref group="주">부산대학교 설립기금 1,000만원 내역=경상남도 불교교무원 고성 옥천사 사답 13만 5천평(조흥은행 감정가 5백만원), 부산음식조합의 대학설립기금 모금액 105만원(문병조 명의로 납입), 민립대학설립기성회 배인환 회장과 김찬성 부회장 유기처분금 80만원과 자동차 1대, 일본인 131개 어용단체 강제해산후 청산금의 국가귀속분 347만 9,000원</ref> 이 중 1,000만 원은 미군정청 문교부에 국립대학 설립기금으로 납입하였고, 일부는 대학도서관을 채울 막대한 양의 장서 확보에 사용했다. 국립대학 설립의 기초작업이 일단 완료된 뒤에는 윤인구 당시 경상남도 학무과장이 대학 설립을 위한 제반 행정절차를 밟았다.
 
[[1946년]] 5월 15일 국립부산대학교의 설립이 확정되었다. 윤인구 경상남도 학무과장과 학무과 고문관 에디 중위가 관계 기관과 협의하여 한미 양 문교부장의 최종 결재를 얻어낸 것이다. 정식 교명은 ‘국립 부산대학’으로 정해졌고, 인문학부와 수산학부의 두 학부가 개설되었다. 이때의 학부는 오늘날의 단과대학(Faculty)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1946년 3월 7일에 공포된 대학령 제2조 후단에는 인문계 및 자연계의 학부가 병설될 때는 2개 이상의 학부로써 ‘종합대학교’를 구성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ref>{{저널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