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령 서아프리카: 두 판 사이의 차이

독일의 서아프리카 지역 식민지들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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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령 서아프리카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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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21일 (목) 16:27 판

독일령 서아프리카 (독일어: Deutsch-Westafrika) 는 1884년부터 1914년까지 존속하였던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독일의 식민지를 일컫는 말이다. 독일령 서아프리카라는 용어는 보통 독일령 카메룬독일령 토고를 묶어서 지칭할 때 사용되었으며, 독일의 실제 행정 구역 단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역 종사자들과 전문적으로 이 지역을 지칭할 때 가끔씩 사용되었다.

1884년 이전의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독일의 관심

독일의 서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은 17세기에서 18세기, 쿠를란트 공국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아프리카에 요새를 짓고, 항구를 만들어 교역을 시작하였을 때부터 드러났다. 1720년 이후 19세기까지 서아프리카에서의 독일인의 활동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C. 보어만, 얀찬 & 토르멜렌, 벨버 & 브롬과 GL 가이저와 같은 독일의 무역 회사가 서아프리카 해안에서의 활동을 재개하였다. 또한, 북독일 선교사회와 같은 독일의 장로교 선교사들도 서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880년대까지 독일의 서아프리카에 대한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은 다음과 같다.

  • 프리드리히 콜린이 관리하고 운영하였던 기니의 카피타이와 코바 무역소
  • 토고의 1857년부터 운영이 시작된 바구이다와 아네호 무역
  • 빔비아, 말림바, 크리비를 포함하는 카메룬의 일부 해안가 마을 지역

1882년에 있었던 영국-프랑스 협의는 함부르크의 상인들의 이익에 위협을 주었고, 그들은 독일 제국의 정부에게 자신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내려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또한, 동시기에 서아프리카에 있었던 독일인들의 이익 집단은 정부와 해군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제국주의에 대한 사회적인 큰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882년 12월 6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독일식민회사가 설립된다. 이 회사의 초대 이사는 호헨로헤-랑겐부르크의 공자 헤르만이 맡았고, 15,000명의 회원을 보유한 회사가 되었다.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제국 판무관

독일 제국의 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뤼베크, 함부르크, 브레멘의 의원들로부터 향후 독일의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개입에 대한 입장을 표명할 것을 요구받았다. 또한, 보어만은 수상에게 1883년, 독일-서아프리카 무역 식민지 설립을 위한 계획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의문점을 가져 일단 계획을 유보시켰다. 하지만 1883년 12월, 독일 제국 정부는 독일 무역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토착 지배자들과의 협상을 맺어 서아프리카 지역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절차에 착수하기 위해 제국 판무관을 보내기에 이른다.

1884년 5월, 비스마르크는 구스타프 나흐티갈을 제국 판무관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나흐티갈의 임무는 대륙의 서안을 따라가면서 독일이 주장하는 영토를 탐사하고, 새로 설립할 수 있는 지역을 찾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의 계획은 나흐티갈로 하여금 조약을 맺어 서아프리카의 이미 존재하는 독일의 식민지를 넘어 더 많은 지역을 상업적 회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1884년 6월, 나흐티갈은 상가레야 해변과 로스 제도에 도착한다. 그는 조약을 맺기 위해 해안가로 부하들을 보내 카파타이와 코바의 족장들을 찾았다. 하지만, 벌써 족장들은 프랑스와 조약을 맺은 상태였고, 더이상의 조약을 맺기를 원치 않았다. 나흐티갈은 그리하여 베냉만으로 향하게 되었다.

1884년 6월 5일, 나흐티갈은 토고빌의 족장인 음라파 3세와 조약을 맺어 토고 해안을 넘어 독일의 보호령을 설립하기로 합의하였다. 이것이 독일령 토고의 시초가 된다. 1884년 7월 14일, 나흐티갈은 두알라에 독일 제국의 깃발을 꽂고 이 지역을 독일의 보호하에 둔다고 합의하였다. 이것이 독일령 카메룬의 시초가 된다. 그는 가봉, 앙골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로 항해하기 전, 우선 이 지역을 둘러보며 지역의 항구를 시찰하였다. 그는 1884년 12월에 카메룬에 도착하였고, 1885년 1월에는 니제르 삼각주에 도달하였다. 1885년 1월 29일, 나흐티갈은 조약을 맺어 마힌란트를 독일의 보호하에 두는데 협의한다. 이 조약을 맺은 후, 나흐티갈은 독일로 돌아오는 길에 말라리아에 걸려 1885년 4월 기니만에서 죽게 된다.

서아프리카 함대

나흐티갈이 서아프리카에서의 독일의 권리를 확립하는 임무를 완수한 후, 독일 정부는 독일의 권리와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해군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1885년 9월 30일, 빌헬름 1세는 에두아르트 폰 크노르 제독을 필두로 하는 서아프리카 함대를 창설하게 된다. 이 함대는 코르벳인 기함 SMS 비스마르크, SMS 그나이세나우, SMS 아리아드네, SMS 올가와 부속선인 증기선 아들러로 구성되어 있었다. 함대는 10월 30일 서아프리카로 떠났다. 카보베르데 제도에 다다른 이들은, 함대를 나누어 SMS 아리아드네는 라이베리아부터 기니만까지 관할하도록 하고, SMS 그나이세나우는 동아프리카를 관할하기로 한다. 12월 18일, SMS 비스마르크와 SMS 올가는 카메룬 강에 이르게 된다.

함대가 카메룬 강에 도착한 직후, 나히티갈과 협약을 맺었던 족장 망가 은둠베 벨은 독일 국기를 불태워 없애는 행동을 취한다. 크노르 제독은 그것을 본 즉시 반란군을 진압하고 마을을 불태워 족장을 잡아오기 위한 상륙군을 보내게 된다. 두 해안 증기선인 판과 두알라가 307명의 군사들을 히코리타운에 상륙시키기 위해 12월 20일 사용되었다. 상륙군은 다른 둑에 있는 반란군이 얀첸 & 토르멜렌의 공장을 공격하여 공장의 관리인들을 끌어내서 포로로 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즉시 그들은 요스타운으로 가서 관리인들을 구하려 하였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다음날 SMS 올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을을 불사지르고 폭격하였다. 제독이 타고 있던 SMS 올가는 반독일 봉기가 발생한 근거지까지 다다르게 된다. 평화는 빠르게 찾아왔다. 1885년 1월, 봉기는 진압되었고, 그해 3월 공장 관리인을 살해한 자들은 처형되었다.

영토

1884년부터 1919년까지 독일령 서아프리카 지역의 영토는 다음과 같다. (단,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는 빠져있다.)

영토 이름 기간 추정 면적 추정 인구 현재 국가
알트카메룬

(북동부 지역 제외)

1884-1919 488,000 km² 2,588,000 카메룬

나이지리아

암바스베이/빅토리아 1887-1919 ? 12,000 카메룬
엔텐슈나벨 1894-1911 12,000 km² ? 카메룬

차드

카피타이 운트 코바 1884-1885 2,310 km² 35,000 기니
마힌란트 1885 ? 10,000 나이지리아
노이카메룬 (독일령 콩고) 1911-1919 295,000 km² 2,000,000 가봉

콩고 공화국

차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살라가 게바이트 (지역) 1899-1919 ? ? 가나
토골란트 1884-1919 87,200 km²

(살라가 게바이트 포함)

1,000,000 가나

토고

879,510 km² 5,645,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