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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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시카 출신의 하급귀족으로 시작해 [[프랑스 혁명]]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통해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며 유럽의 모든 열강들을 굴복시키고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된 인물이다. [[샤를마뉴]] 이후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대의 유럽은 나폴레옹을 빼고는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엄청난 족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근대 유럽이 배출한 최고의 군사적 천재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가 남긴 나폴레옹 법전은 전 세계의 [[민법]] 관할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나폴레옹이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법치주의, 능력주의, 시민 평등사상 등 혁명의 정신들이 온 유럽에 전파 되었다. 근대 유럽은 영국의 산업혁명이라는 경제적 혁명과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치적 혁명을 통해 탄생한 세계였으며 결국 이후 전 세계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근대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럽화, 된 만큼 유럽 뿐 아니라 전 세계 역사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그가 전쟁사에 남긴 영향은 대단했는데 현대전에까지 영향을 끼친 군사전략가([[클라우제비츠]], [[투하체프스키]], [[슐리펜 계획]], [[만신재]] 까지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았다.)이다. 전술과 전략은 물론이고 훈련, 조직, 군수 심지어는 의복과 포상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전반적으로 선진화시킨 장본인이다. 그가 육성한 프랑스 육군은 유럽을 넘어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조직된 선진 군대였고 결국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프랑스 육군을 흉내내게 된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출신 하급귀족으로 파리 육군사관학교 졸업 이후 프랑스 육군 포병 소위 임관되었다. 그는 [[프랑스 제1공화국]]에서 눈에 띄게 지위가 올랐고 [[제1차 대프랑스 동맹|제1차]] 및 [[제2차 대프랑스 동맹]]과의 전쟁에서 강력한 반 프랑스 연합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프랑스 통령정부|제1통령]]에 취임하였다. 5년 뒤에 프랑스 원로원이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을 주도하였다.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이 전쟁에 휘말렸으며, 많은 승리 뒤에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적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의 각국들을 분할하고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한편 자신의 측근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케 하여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시켜나갔다. 하지만 [[스페인]]의 무장시민들의 끈질긴 쿠데타와 [[1812년]]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나폴레옹의 삶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의 [[대육군]]은 스페인과 러시아에서의 실패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손실을 보았으며 이후 재건된 프랑스 군대는 규모는 여전히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육군이었으나 내실에서는 결코 전성기 때 만큼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의해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그 동맹이 [[파리 (프랑스)|파리]]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을 정권에서 내려오게 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 보냈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았을 때 그는 엘바 섬에서 도망쳐 나오고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1815년]] 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완전히 상실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영국 왕실에 의해 구속된 채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보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위암으로 결론이 났으나, 그의 사인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일부 학계 측에서는 [[비소]](만신재) 중독설도 제기되었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