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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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역사}}
 
'''예케 몽골 울루스'''({{llang|mn|Их Монгол улс}})는 [[칭기즈보르지긴 테무친]]이 [[1206년]]에 건국한 [[제국]]이다. 몽골 제국은 칭기스 칸의 중앙 울루스를 중심으로 [[주치 카사르]](1164?-1219?) 이하 동생들에게 흥안령 지역을, 장남 [[주치]]에게 알타이산에서 [[이르티시강]] 유역(킵차크 초원)을, [[차가타이]]에게 알타이산에서 주변 츄강 유역([[서요|카라 키타이]] 고지), 그리고 [[우구데이]]에게 알타이산에서 우룽구강 일대([[나이만]] 고지)를, 막내아들인 [[톨루이]]에게 몽골리아 지역을 분봉했다.<ref>김호동, 「몽골제국의 ‘울루스 체제’의 형성」, 동양사학연구 131 (2015), pp. 333-386</ref><ref>김호동(2010),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pp.112~113.</ref>
 
== 국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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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칭기즈 칸]] ===
1206년 [[카마그 몽골]] 속한다스리던 [[보르지긴 씨족의씨족]]의 수장인 [[보르지긴 테무친]]이 [[몽골]] 지방의 동부를 흐르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오논 강에서 개최된 [[쿠릴타이]] 회의에서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면서 대제국이몽골 제국이 시작되었다.
 
제국 건국 이전 [[칭기즈 칸]]은 [[바이칼 호]]의 남쪽과 동남쪽의 초원 지대에서 패권을 다투던 여러 부족장 중의 한 군인에 불과했으나 몽골 제국의 건국과 함께 그의 권위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의 정복 전쟁의 야심이 주변 여러 부족들을 향한 정복 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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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위크 칸 ===
오고타이 칸의 전사 후, 새로운 칸의 선출은 몽골군 군사령관들이 모여서 전쟁과 황제 선출에 관해서 회의를 하는 군사회의인 쿠릴타이에서[[쿠릴타이]]에서 의견 일치를 얻기 어려웠다. 당분간 섭정을 하던 오고타이 칸의 제자 [[귀위크 칸]]가 칸위에 오르기를 희망했으나, [[칭기즈 칸]]의 장손으로서 자신이 적임자라고 자부하고 있던 [[바투]]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1246년 오고타이 칸의 아들 귀위크는 칸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나 3년 만에 원정길에서 전사하고, 다시 군사 회의인 [[쿠릴타이]]가 계속되었다.
 
=== 몽케 칸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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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은 [[흉노]] 이래의 몽골 제국 유목 국가의 전통을 따라 지배하던 유목민을 병정일치의 사회 제도로 편성하였다. 몽골에 있어 유목집단의 기본 단위는 천호라고도 불린 천명 부대라고 할 수 있는데, 100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유목집단을 다스리는 장군이나 부족장을 그 수장, 즉 천호장으로 임명하였다. 천호 가운데 10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백호, 백호 안에는 10인 정도의 병사를 차출할 수 있는 십호가 설치되어, 각각의 장에는 그 소속 천호장의 근친 가운데 유력한 자가 지명되어 십호 이상의 유목 전사가 몽골 제국의 지배층이었던 유목 귀족(노얀)을 형성하였다. 천호장 가운데 가장 유력한 자는 다수의 천호를 거느린 만호장이 되어, 전시에는 군사령관직을 지냈다.
 
[[칭기즈 칸과칸]]의 씨족인 형제들은[[보르지긴]]은 [[황금씨족]](알탄 우룩)이라 불리며, 영지 백성(우르스)으로 나뉜 천호・백호・십호 집단의 위에 상급 영주 계급으로써 군림했고, 몽골 황제 즉 대칸은 크고 작은 우르스의 가장 큰 부분을 가진 맹주였다. 대칸이나 왕족들의 막영은 오르도라 하여, 유력한 후비마다 오르도를 갖고 있었다. 각각의 오르도에는 게린 코우(게르 백성)라 불리는 영민이 있었는데 그 관리는 오르도의 수장인 황후가 관리하였다.
 
== 행정 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