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3세 (스페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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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외 관계에서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의 정치는 스페인 국내에 크게 이익이 되었다. 우선 카를로스는 [[마드리드]]의 시민들이 오폐수를 창문 밖에 버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1766년]]에는 마드리드에 프랑스식 복장을 도입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결국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 이후 카를로스는 오랜 기간 동안 [[아랑후에스]]에서 머물렀으며, 정치는 [[아란다 백작 페드로 파블로 아바르카 드 보레아|아란다 백작]]에게 맡겨졌다. 카를로스는 [[1766년]]의 폭동에 [[예수회]]가 관련되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1767년 2월 27일 왕실의 명령에 따라 예수회를 스페인에서 추방하였고 예수회의 모든 소유물은 몰수되었다. 이로 인해 나폴리의 왕이었던 시절 교회의 권한 억제로 인해 마찰이 있었던 [[교황]]과의 사이가 다시 틀어지게 되었다. 카를로스는 교회를 억압하여 성직자, 특히 수도사의 수를 줄이고 [[종교재판소]]를 철폐하지는 않았지만 활동을 억제하였다. 이와 함께 카를로스는 무역과 산업의 성장을 억제하던 오래된 법을 폐지하였고, 도로, 수로 등 기반시설을 지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스페인이 예전보다 좀 더 번영하도록 하였다. 말년에 카를로스는 그의 장남 [[카를로스 4세 (스페인)|카를로스]]와 마찰이 있기도 하였다. 카를로스는 [[1788년]] [[12월 14일]]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참고 문헌 ==
{{1911브리태니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