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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년]] 음력 2월에 장수왕은 말갈 군사 1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 성을 빼앗았다. 이때부터 고구려와 나제연합군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다. [[469년]]에는 백제가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고, 또한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북위가 이를 거절함으로써 백제의 의도는 관철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는 백제를 공략하기 위해 승려 도림을 백제에 잠입시켰다. 그리고 도림으로 하여금 개로왕을 충돌질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했다. 이 때문에 백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고구려는 [[475년]]에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하여 도성을 무너뜨리고 개로왕을 사로잡았으며, 곧 아차성 밑으로 끌고 가 참수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백제는 수도 한성이 파괴되어 도읍을 [[공주시|웅진]]으로 옮겼다.
 
이로써 고구려는 소수림왕 이래 국가의 숙원 사업이던 고국원왕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이 사건으로 백제는 한성이 완전히 붕괴되어 도읍을 [[공주시|웅진]]으로 옮겼다.<ref>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309쪽.</ref>
 
[[481년]]에는 신라의 호명성 등 7성을 함락시켜, 미질부까지 진군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으로는 훈춘, 남으로는 아산만에서 동쪽의 죽령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는 요하 이동의 만주지방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장수왕은 내정개혁에도 힘을 기울여 부족연맹제도의 5부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