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히로유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 개의 출처 구조, 0 개의 링크를 깨진 것으로 표시) #IABot (v2.0.1
Yerim Han (토론 | 기여)
→‎약력: adding link
7번째 줄:
1836 년 [[다지마국]] 이즈번([[도요오카시]])의 [[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번의 [[가로 (관직)]]였던 加藤正照였다. 어릴때 이름은 토요시(土代士)였다. 1852년에 에도로 올라와 [[사쿠마 쇼잔]]에게서 서양식 군사학을 배웠다. 1854년에는 大木仲益에게서 [[난학]]을 배웠다.
 
1860년엔 [[반쇼시라베쇼]]의 교수가 되었고 이 시기부터 독일어를[[독일어]]를 공부했다. 1861년 첫 저작 토나리구사(『鄰草』, 1889년 간행)를 써서 서구의 입헌사상을 소개했다. 1864년 [[하타모토]]가 되어 [[카이세이쇼]]의 교수가 되었다.<ref>[[小川恭一]]編著 『[[寛政重修諸家譜|寛政譜]]以降 旗本家百科事典 第2巻』 [[東洋書林]]、1997年11月、832頁。</ref> 1868년엔 메츠케(目付)가 되었다. 1869년 신정부에서 일하게 되어 외무성에서 근무했다. 이 즈음 공의소에 자신의 생각을 적은 『非人穢多御廃止之儀』를 작성해 제출했다. 1870년 진정대의『真政大意』를 써서 [[천부인권]]론을 소개했다.
 
1872년 요한 블룬칠리(Johann Kaspar Bluntschli)의 저서인 국가학『国家学』을 강의한다. 이는 후에 국법범론『国法汎論』으로 번역출간되었다. 73년부터 [[메이로쿠샤]]에참가하여 민선의원 설립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74년에 국체신론『国体新論』을 발표했다. 77년에는 [[가이세이 학교]] 총장이 되었다. 81년에는 교육제도 개혁으로 구 도쿄대학 초대 총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