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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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책봉 문제: "분을 참지 못했다" 등은 출처가 없는 독자 연구 및 사감입니다. 또한 현재 국편위 한국사 공식 기술은 사병 혁파 문제를 중요한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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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책봉 문제: 태조의 장남 진안군은 정치에서 관심이 멀어 보였기 때문에 세자 책봉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고, 조선 개국 이후 우창비왕설에 따라 추폐된 우왕과 창왕 즉위를 이끈 이색과 인척이었기 때문에 그의 장남 지위가 차남 방과에게 승계되었다는 것이 현재 일반적 견해입니다. 또한 "창업을 도와 공로가 크고 또한 자질(資質)이 영매(英邁)한 인물이라" 는 표현은 마치 1982년도 태종 주인공 대하 소설 같은 사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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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씨는 조선개국전에 이미 사망했으므로 [[조선 태조|태조]]는 고려조 왕비를 배출하는 최고 명문 가문이자 당대 제일 권문세가의 딸이었던 [[신덕왕후|강씨]]의 집안 배경 및 [[신덕왕후|강씨]]의 두터운 인맥과 지모의 도움으로 개국왕(開國王)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에 [[조선 태조|태조]]는 왕으로 등극한 직후, 강씨를 왕비로 책봉하여 정비(正妃)로 삼았으며<ref>태조실록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8월 7일(병진) 1번째기사</ref> 그녀의 소생인 어린 두 왕자 중에서 왕세자를 간택하여 막내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한씨가 추존 왕비가 된 것은 그로 1년 후의 일로, 비록 한씨가 먼저 [[조선 태조|태조]]에게 출가하긴 하였으나 서열상 한씨는 차비(次妃)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조선 태조|태조]] 5년(1396년), 현비 강씨가 병으로 서거하자 [[조선 태조|태조]]는 강씨를 추모하기 위해 왕후(王后)로 추봉하는데, 이로 인하여 이미 고인이된 한 씨의 서열은 명목상 후궁이 되었다.
 
[[신의왕후|절비 한씨]] 소생으로 1남 방우, 2남 방과([[조선 정종|정종]]), 3남 방의, 4남 방간, 5남 방원([[조선 태종|태종]]), 6남 방연이 있었는데, 특히 5남 이방원은 부왕(父王)의 창업을 도와 공로가 크고 또한 자질(資質)이 영매(英邁)한 인물이라 부왕의 처우에 대한 불평이 대단하였다. 또한 개국공신으로서 왕세자 이방석의 보도(輔導)를 책임지고 있는 [[정도전]] 이하 [[남은]]·[[심효생]] 등이등 소수 재신이 모든국왕과의 권력을정치적 장악하고소통을 있는데장악한 대해서도상황에서 대단한일반 불만을신료들의 품고불만이 있었다.
 
더군다나 세자책봉시 장남 방우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물론 절개 개가했고 이듬해에 사망한것으로보면 정치에 멀어보였기에 대상에서 제외되었더라도 차남인 방과를 제쳐두고 단지 정치적인 이유로 강씨의 소생을 세자로 삼은것부터가 다른 이복 형제들은 불만이었던 것이다.
 
=== 군권 분장 정책과 요동 정벌 준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