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보쿠초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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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노의 소란과 남조세력의 쇠퇴 ===
남조측은 [[나와 나가토시]], [[유키 지카미쓰]], [[지구사 다다아키]] 이외에 [[기타바타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닛타 요시사다]]가 [[1338년]]까지 연이어 전사하자, 군사적으로 북조측이 압도적 우위에 서게된다. [[1348년]]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적장자 [[구스노키 마사쓰라]], [[구스노키 마사토키|마사토키]] 형제가 아시카가측의 [[고 모리나오]]에게 토벌되, 요시노 행궁(吉野行宮)이 함락되자 [[고무라카미 천황]]과 남조의 가신들은 아노(賀名生)(현 [[고조 시]])로 피신하였고, 점차 북조로 기울어져 갔다. 하지만 그 후, 정무를 맡고 있었던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인 고 모리나오와의 마찰이 심화되었고, [[간노]] 연간 다다요시파와 반 다다요시파 간의 [[간노의 소란]]이 일어난다. 정쟁에서 패한 다다요시는 남조에 귀순하여 다카우지의 자식이며 다다요시의 양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도 양아버지를 따라 규슈로 도망쳐 북조와 싸우게 된다. 또, [[야마나 도키우지]] 등 [[슈고]]의 일부도 남조편에 서 대항하자, 남조는 다시 활기를 띄게 된다. [[고무라카미 천황]]은 스미요시 신사의 신관 가문인 쓰모리 가문의 저택을 [[스미요시 행궁]](住吉行宮)으로 삼아 거처를 옮긴다.
 
[[1351년]]에는 다카우지가 다다요시파에 대항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남조에 항복한다. 이에 의해 다카우지는 [[정이대장군]]에서 해임되었다. 남조는 이를 기회로 삼아 교토로 진격해 교토에 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몰아내고 신기를 회수한다. 요시아키라는 북조 [[연호]]를 부활시켜, 다시 교토를 탈환하지만 남조는 물러날 때에 고곤, 고묘 상황과 천황에서 퇴위한 [[스코 천황]]을 아노로 끌고갔다. 이 때문에 북조는 고곤의 아들이며 스코의 동생인 [[고코곤 천황]]을 신기 없이 즉위시키고, 아울러 공무의 관직을 전상태로 되돌렸으며 다카우지도 정이대장군직에 복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