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토리 도시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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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iratoriToshio.jpg|180px|thumb|시라토리 도시오]]
'''시라토리 도시오''' ({{llang|ja|白鳥 敏夫}}, しらとり としお, [[1887년]] [[6월 8일]] ~ [[1949년]] [[6월 3일]]) 는 주 이탈리아 대사를 지낸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이다. 숙부는 동양 사학자 시라토리 구사키치이며, [[일본 외무성|일본 외무 대신]]을 지낸 [[이시이 기쿠지로]]도 숙부에 해당된다. [[1978년]], 다른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생애==
시라토리 도시오는 [[지바 현]] 출신으로, [[1912년]] [[7월]]에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13년]] [[10월]]에 고등 문과 시험·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해 [[외무성]]에 입성하였다. [[1930년]]에는 외무성 정보부장이 되어 [[만주 사변]] 당시에 내각 서기관장이었던 [[모리 가쿠]]나 당시 일본 육군 중령이었던 [[스즈키 데이이치]]와 제휴하여 사변에 대한 [[국제 연맹]]의 비판에 대항하기 위한 외교 정책의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였다.
 
[[만주 사변]] 이후에도 국제 연맹 탈퇴 등, 일본 군부와 제휴해 [[영국]]과 [[미국]]에 대한 강경 외교를 추진하였고, 이를 위한 여론 유도에 힘썼다. [[1938년]]에는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추천에 의해 주 이탈리아 대사로 임명되었고, [[오시마 히로시]]와 협력해 일본· 독일 ·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 추진을 도모하였다.
 
시라토리는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A급 전범으로 체포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 금고형 판결을 받았고, 복역중 후두암으로 사망하였다. [[1978년]] [[10월 17일]], 야스쿠니 신사 합사제에서 다른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A급 전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