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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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1 = [[파일:Flag of the Qing Dynasty (1889-1912).svg|center|90px]]{{중앙|[[청나라]]}}
|교전국2 = [[파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center|90px]]{{중앙|[[조선|조선]]}}
|지휘관1 = [[파일:Left-facing dragon pattern on Wanli Emperor's imperial robe.svg|17px]] [[숭덕제]]<br>[[아이신 교로 다이샨]]<br/>[[아이신 교로 지르가랑]]<br>[[아이신 교로 도르곤]]<br>[[아이신기오로 호오거]]<br>[[아이신 교로 요토]]<br>[[아이신 교로 도도]]<br>[[타타라 잉굴다이]]<br>[[슈무루 양구리]]{{KIA}}<br>[[마푸타]]<br>[[사르후다]]<br>[[상가희]]<br>[[경중명]]<br>[[공유덕]]
|지휘관2 = [[파일:Coat of Arms of Joseon Korea.png|17px]] [[조선 인조|인조]]<br>[[김자점]]<br>[[임경업]]<br>[[이완]]<br>[[신경원]]<br>[[김준용]]<br>[[유림]]<br>[[홍명구]]{{KIA}}<br>[[허완]]{{KIA}}
|병력1 = 1차 선봉대 300명<br>2차 선봉대 1,000명<br>3차 선봉대 3,000명<br>좌익군 12,761명<br>본군 15,272명<br>후미군 12,840명<br>쿠툴어<ref>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018, [[강희]]기에 출반된 [[만주어]][[사전]]《어제청문감(細製淸文鐘, Han i Araha Manju Gisun i Buleku Bithe》은 쿠툴어(Kutule)를 따르는 노복(Dahame Yabure Ahasi)이라고 설명한다. 청 초기에 조선인도 이와 유사하게 인식하여 《심양일기》에서 구토리(驅土里)를 종인(從人)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런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쿠둘어는 원래 노복들이 담당했고, 전쟁이 일어나면 팔기의 기병을 수행하어 참전했다. 쿠툴어는 참전하여 말을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물을 긷고 밥을 짓는 등 온갖 잡일을 담당하면서 주인을 모셨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약탈할 따도 쿠툴어가 중요했다. 쿠툴어가 많을수록 약탈품도 많이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쿠툴어는 전세가 불리해지거나 전투 병력이 부족할 때는 곧바로 전투병으로 전환해서 쓸 수 있었다.</ref> 2천<ref>구범진・이재경, 「丙子 胡亂 당시 清軍의 構成과 規模」, 『韓國文化』 2015</ref><br>총 병력 47,173명 ~ 14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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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상자 병자호란}}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부터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까지 [[조선]]과 [[청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병자란''', '''병란''', '''병자노란'''(丙子虜亂), '''병정노란'''(丙丁虜亂), '''만주의 조선 침공'''(Manchu invasion of Korea), '''청의 조선 침공'''(Qing invasion of Joseon)이라고도 부른다. [[청 제국]]의 [[숭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조선 인조|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나라|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 제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