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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설명|이 문서는 1392년에 [[조선 태조|이성계]]가 세운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기원전에 단군이 세운 고대 국가에 대해서는 [[고조선]] 문서를, 1897년 이후의 조선에 대해서는 [[대한제국]] 문서를, 그 밖의 다른 뜻에 대해서는 [[조선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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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환조|이자춘]]의 아들이자 고려의 신흥 무인세력이었던 [[조선 태조|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창왕]]·[[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가 [[신돈]]의 사생아라고 사건을 조작하여 폐위하는 등 정권·군권·경제권을 행사하였고, 전제 개혁을 단행했다. [[1392년]] 음력 7월 17일에는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왕조는 막을 올린다.<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07017_001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년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s:태조강헌대왕실록/1년|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1년]]〉7월 17일,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ref> [[1393년]] [[음력 2월 15일|2월 15일]]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ref>{{서적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2015_001|제목=태조실록|성=|이름=|날짜=1393년(태조 2) 음력 2월 15일|권=3권|출판사=|장=국호를 대조선국 정하는 예부의 자문|확인날짜=2018-12-13|인용문='왕은 이르노라. 내가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아 나라를 처음 차지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중추원 사(中樞院使) 조임(趙琳)을 보내어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더니, 회보(回報)하기를, ‘나라는 무슨 칭호로 고쳤는지 빨리 와서 보고하라.’ 하기에, 즉시 첨서중추원사 한상질(韓尙質)로 하여금 국호(國號)를 고칠 것을 청하였다. 홍무(洪武) 26년 2월 15일에 한상질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본부(本部)의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이 홍무(洪武) 25년 윤12월 초9일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조칙에, 「동이(東夷)의 국호(國號)에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고 하였소.’ 하였다. 지금 내가 불선(不善)하니 어찌 감히 스스로 경하(慶賀)하겠는가? 실로 이것은 종사(宗社)와 백성의 한이 없는 복(福)이다. 진실로 중앙과 지방에 널리 알려서 그들과 함께 혁신(革新)하게 할 것이니, <ins>지금부터는 고려(高麗)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조선(朝鮮)의 국호를 좇아 쓰게 할 것이다.</ins>'}}</ref>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ref>{{서적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10025_001|제목=태조실록|성=|이름=|날짜=1394년(태조 3) 음력 10월 25일|권=6권|출판사=|장=한양으로 서울을 옮기다|확인날짜=2018-12-13|인용문=한양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에 머물러 있게 하고, 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다.}}</ref> '재상 중심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의 기존 제도를 급진적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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