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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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 표}}
{{그리스의 역사}}
'''비잔티움 제국''', 또는 다른 말로 '''동로마 제국'''({{llang|en|ByzantineEastern Roman Empire}}) 또는, '''동로마비잔틴 제국'''({{llang|en|Eastern RomanByzantine Empire}})은 [[중세 시대]] [[로마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에천도 의해이후의 [[로마 제국]] 수도를일컫는 [[로마]]에서명칭으로,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시기부터의였고 [[로마 제국]]을제국의 말한다. 고대의 [[황제|로마 제국황제]]과는 같은 국가로 이 때문에다스렸다. 제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자신이 사는 나라를 '''로마 제국''' 또는 '''로마니아'''({{lang|el|Ῥωμανία}}){{sfnm|1a1=Millar|1y=2006|1pp=2, 15|2a1=James|2y=2010|2p=5|3a1=Freeman|3y=1999|3pp=431, 435–37, 459–62|4a1=Baynes|4a2=Moss|4y=1948|4p=xx|5a1=Ostrogorsky|5y=1969|5p=27|6a1=Kaldellis|6y=2007|6pp=2–3|7a1=Kazhdan|7a2=Constable|7y=1982|7p=12|8a1=Norwich|8y=1998|8p=383}}라고 불렀으며, 주민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이라고 불렀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이 로마 제국의 [[동방 그리스와 서방 라틴]]이라는 전환점으로 이어졌다. 324년부터 337년까지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국을 재조직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고, [[크리스트교]]를 합법화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집권한 시기에 크리스트교는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고 여러 다른 종교 행위는 금지되었다. 마침내 [[헤라클리우스]] 시기에 제국의 행정과 군사가 재조직되고 라틴어를 대체해 그리스어가 공식언어로 채택되었다.{{sfnm|Ostrogorsky|1969|1pp=105–07, 109|Norwich|1998|2p=97|Haywood|2001|3pp=2.17, 3.06, 3.15}}
 
이로 인해 로마 제국의 유산은 이어지고 있었고 그 전통은 유지되었지만, 현대 사학자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플이었다는 것과 라틴 문화보다는 그리스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동방 정교회]]라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을 구별하고 있다.{{sfnm|1a1=Millar|1y=2006|1pp=2, 15|2a1=James|2y=2010|2p=5|3a1=Freeman|3y=1999|3pp=431, 435–37, 459–62|4a1=Baynes|4a2=Moss|4y=1948|4p=xx|5a1=Ostrogorsky|5y=1969|5p=27|6a1=Kaldellis|6y=2007|6pp=2–3|7a1=Kazhdan|7a2=Constable|7y=1982|7p=12|8a1=Norwich|8y=1998|8p=383}}
 
제국의 국경은 여러 차례 변화했으며 쇠퇴와 수복의 순환된 과정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 제국은 역사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서지중해 일대를 회복함으로써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이 때 제국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남부, 시칠리아, 크레타를 점령하고 2세기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다. [[제7차 비잔틴-사산 전쟁]]으로 인해 제국의 자원은 소모되었고, 이로 인해 7세기 [[초기 무슬림 정복전쟁]] 당시 제국이 상당한 영토를 잃는 원인이 되었다. 무슬림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이집트, 시리아와 같은 부유한 지역을 잃었다.<ref>{{서적cite book 인용|url=https://books.google.com/books?id=iSWPAgAAQBAJ |title=Warfare, State And Society in the Byzantine World 560–1204 |work= |page=47|isbn=978-1-135-36437-3 |author1=Haldon |first1=John |last2=Haldon |first2=Shelby Cullom Davis 3.0. Professor of European History Professor of History Hellenic Studies John |date=2002}}</ref>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에 제국은 다시 팽창했고, 2세기 동안 지속되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를 맞이했지만,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하면서 [[소아시아]]를 잃게 되었다. 이후 튀르크족은 이 전투를 계기로 [[아나톨리아]]에 정착하게 될정착하게될 발판을 마련하였다.
 
[[콤니노스 왕정복고]] 이후 제국은 다시 부흥했으며, 12세기 콘스탄티노플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다.<ref>Pounds, Norman John Greville. ''An Historical Geography of Europe, 1500–1840'', p. 124. CUP Archive, 1979. {{ISBN|0-521-22379-2}}.</ref> 그러나 [[제4차 십자군]] 때 콘스탄티노플이 약탈당하고 함락되었으며, 옛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계 국가들과 [[프랑크인의 지배|라틴계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1261년 비잔티움 제국은 회복되었으나, 이미 그 영향력은 상당히 쇠퇴되었다. [[비잔틴-오스만 전쟁]]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영토의 거의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에 잃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ref>{{웹 인용|url=http://www.shsu.edu/~his_ncp/EndByz.html |title=The End of the Byzantine Empire, 1081–1453 |url-status=dead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24101549/http://www.shsu.edu/~his_ncp/EndByz.html |archivedate=24 September 2015 |df=dmy-all }}</ref> 비잔틴 제국의 계승 국가였던 [[트레비존드 제국]]은 1461년 [[트레비존드 포위전]]으로 멸망했다.<ref>William Miller, ''Trebizond: The last Greek Empire of the Byzantine Era: 1204–1461'', 1926 (Chicago: Argonaut, 1969), pp. 100–06</ref>
 
[[콤니노스 왕정복고]] 이후 제국은 다시 부흥했으며, 12세기 콘스탄티노플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다.<ref>Pounds, Norman John Greville. ''An Historical Geography of Europe, 1500–1840'', p. 124. CUP Archive, 1979. {{ISBN|0-521-22379-2}}.</ref> 그러나 [[제4차 십자군]] 때 콘스탄티노플이 약탈당하고 함락되었으며, 옛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계 국가들과 [[프랑크인의 지배|라틴계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1261년 비잔티움 제국은 회복되었으나, 이미 그 영향력은 상당히 쇠퇴되었다. [[비잔틴-오스만 전쟁]]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영토의 거의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에 잃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멸망했다.<ref>{{cite web 인용|url=http://www.shsu.edu/~his_ncp/EndByz.html |title=The End of the Byzantine Empire, 1081–1453 |url-statusdeadurl=deadyes |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24101549/http://www.shsu.edu/~his_ncp/EndByz.html |archivedate=24 September 2015 |df=dmy-all }}</ref> 비잔틴 제국의 계승 국가였던 [[트레비존드 제국]]은 1461년 [[트레비존드 포위전]]으로 멸망했다.<ref>William Miller, ''Trebizond: The last Greek Empire of the Byzantine Era: 1204–1461'', 1926 (Chicago: Argonaut, 1969), pp. 100–06</ref>
== 국호 ==
{{참조|그리스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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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사람들은 자국을 ‘로마 제국', ‘로마인들의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Imperium Romanor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Αρχη τῶν Ῥωμαίων), ‘로마니아'{{#tag:ref|비공식명으로 ‘로마인들의 땅’을 뜻하는‘로마니아'<ref>{{harvnb|Fossier|Sondheimer|1997|p=104}}.</ref> 도 범용됐다. 이 용어는 오늘날 [[루마니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group="주"}}([[라틴어]]: Romania, [[그리스어]]: Ῥωμανία),‘로마 공화국'‘([[라틴어]]: Res Publica Romana, [[그리스어]]: Πολιτ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ref>{{웹 인용|url=http://dio.sagepub.com/cgi/reprint/31/124/47 |title=Nation and Liberty: the Byzantine Example|doi=10.1177/039219218303112403 |publisher=Dio.sagepub.com|date=|accessdate=2010-08-07}}</ref>, ‘그라이키아'(Γραικία),<ref>[[Theodore the Studite]]. ''Epistulae'', 145, Line 19 ("ή ταπεινή Γραικία") and 458, Line 28 ("έν Αρμενία καί Γραικία").</ref>, ‘로마이스’(Ῥωμαΐς)라고 불렀다.<ref>{{harvnb|Cinnamus|1976|p=240}}.</ref>
 
제국은 오랜 세월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ref>{{harvnb|Ahrweiler|Laiou|1998|p=3}}; {{harvnb|Mango|2002|p=13}}.</ref> [[그리스-로마 세계|그리스-로마]] 전통을 계승한 나라였다.<ref>{{harvnb|Gabriel|2002|p=277}}.</ref> 당대 서방과 북방에서는‘그리스인들의 제국'{{#tag:ref|‘임페리움 그라이코룸’(Imperium Graecorum), ‘그라이키아’(Graecia), ‘유나스탄’(Yunastan) 등을 이르는 말이다. 기타 서방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imperium Constantinopolitanum), ‘로마니아의 제국’(imperium Romaniae)으로 부르기도 했다.|group="주"}}이란 표현이 쓰였는데,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점차 [[비잔티움 그리스인|그리스적 요소]]가 우세해졌기 때문이다.<ref>{{harvnb|Ahrweiler|Laiou|1998|p=vii}}; {{harvnb|Davies|1996|p=245}}; {{harvnb|Moravcsik|1970|pp=11–12}}; {{harvnb|Ostrogorsky|1969|pp=28, 146}}; {{harvnb|Lapidge|Blair|Keynes|1998|p=79}}; {{harvnb|Winnifrith|Murray|1983|p=113}}; {{harvnb|Gross|1999|p=45}}; {{harvnb|Hidryma Meletōn Chersonēsou tou Haimou|1973|p=331}}.</ref>
 
서방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이 [[로마 제국]]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뜻도 있어서있이서 '그리스인들의 제국'(Imperium Graecorum)이라고 칭하기도 한다.<ref>{{harvnb|Fouracre|Gerberding|1996|p=345}}: "The Frankish court no longer regarded the Byzantine Empire as holding valid claims to universality; instead it was now termed the 'Empire of the Greeks'."</ref> 적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도움이 필요했던 [[교황 레오 3세]]는 로마 제국의 황위가 공위 상태라고 간주하고 서기 800년 [[샤를마뉴]]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여 대관식을 치렀으므로, 로마의 여황 [[아테네의 에이레네]] 시대 때 (남성 황제가 아니므로) 기존 로마 제국의 권위는 도전받았다.
 
[[로마 교황]]이나 서방의 지배자들이 제국의 황제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쓰려고 할 때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대신 '로마니아의 황제'(Imperator Romaniæ)라는 표현을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전자를 서방인들은 샤를마뉴와 그 사람의 후계자를 일컫는 의미로만 썼기 때문이다.<ref name="Helios">{{백과사전 인용|제목=Hellas, Byzantium|백과사전=Encyclopaedia The Helios}}</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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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복 과정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크레테 섬을 잠시 재정복했다가(843년) 로마 군대는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패배한 와중에 황제들은 무슬림의 잇따른 [[시칠리아]] 침략을 막지 못했다. (827년~902년) 무슬림은 오늘날 [[튀니지]] 땅을 발판 삼아 831년에는 [[팔레르모]]를, 842년에는 [[메시나]]를, 859년에는 [[엔나]]를, 878년에는 [[시라쿠사]]를, 900년에는 [[카타니아]]를, 902년에는 로마의 최후 거점이었던 요새 [[타오르미나]]를 정복한<ref name="Norwich1">[http://books.google.com/books?id=5rOePwAACAAJ&hl=ko]</ref> 후 로마 제국은 타지에서 복수에 성공하는데 이집트의 [[다미에타]]로 원정해 승리하고 (856년), 멜리테네 아미르를 무찔렀으며 ([[랄라카온 전투]], 863년), 바실레이오스 1세는 [[유프라테스]] 강 쪽으로 반격했다. (870년대) 제국은 시칠리아를 잃었으나 바실레이오스 1세는 남부 이탈리아 지방은 잘 지켜내어 향후 200년간 이 땅은 로마 제국 영토로 남는다.
 
904년에 로마를 배반한 [[트리폴리의 레온]]이 이끄는 아랍 함대가 제국의 제2 도시인 [[테살로니키]]를 약탈하면서 제국은 시련에 처했다. 로마 군대는 908년에 아랍 함대를 파괴하여 보복했으며, 2년 후에는 시리아의 [[라오디케이아]] 시를 약탈했으나 로마 제국은 무슬림 세력에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일격하지 못했고 이 사람들은 911년에 크레테 수복을 시도하면서 제국 군대를 대타격했듯 로마 제국과 아랍 간 경계는 번갈하 반격하고 방어하는 부단히 흘러 움직이는 상황인 일변, [[바랑기아인바랑인]]이 86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처음 침략하면서 제국의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941년에 이 사람들은 보스포로스 해협의 아시아 쪽 해안에 나타났으나 금번에는 격퇴돼 907년에 로마 제국이 바랑기아인과바랑인과 외교 조약으로써 침략자를 막으면서 제고된 제국의 군사상 위상을 현로했다. 바랑기아인을바랑인을 무찌른 사람은 유명한 장군인 [[요한네스 쿠르쿠아스]]로,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유명하게 승리하고 (943년), [[에데사]]를 재정복한(944년) 일은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만딜리온]] 성물을 되찾아와 경축받았다.<ref name="Norwich1"/>
 
병사 출신의 황제인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963년~969년 재위)와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969년~976년)는 제국의 영토를 [[시리아]]까지 넓히고 [[이라크]] 북서부의 토후들을 무찔렀으며, 크레테와 [[키프로스]]를 되찾았다. 요한네스 1세 치세에는 제국 군대가 남으로 예루살렘까지 위협하기도 했다. 제국 최대 위협인 [[파티마 왕조]]가 자리 잡은 동부에서 [[알레포]] 토후령과 인근 지역은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ref name=Norwich /> 수차 전쟁 끝에 바실레이오스 1세가 로마령 시리아를 평정하고자 기병 40,000명을 급파하여 제국은 아랍의 최후 위협 세력을 무찌른다. 불가리아와 시리아에서 승리해 얻은 잉여 자원을 동원해 바실레이오스 2세는 아랍인이 장악하던 시칠리아를 수복할 원정을 계획한다. 1025년에 바실레이오스 2세 몰후, 1040년대에 원정대가 출정해 당초 목적을 빈약하게나마 이룬다.<ref name="Norwic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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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간 계속 이어진 해묵은 갈등은 새로이 기독교화한 불가리아에서 양 세력의 종교상 수위권을 놓고 재대두했다. 이 일로 894년에 불가리아의 강력한 차르 [[시메온 1세]]가 제국을 침공했으나 제국은 외교 수단을 동원해 헝가리인에게 구구해 이 사람들을 물리쳤으나 [[불가로피곤 전투]](896년)에서 로마는 패배했고 불가리아인에게 연공을 바쳐야했다. 912년에 시메온은 한술 더 떠 로마 제국이 자신에게 불가리아 황제인 바실레우스의 관을 부여하고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게끔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차르가 한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그 사람은 트라키아를 재침공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했다.<ref name=Norwich />
 
[[레온 포카스]]와 [[로마노스 레카페노스]]가 이끄는 거대한 원정군이 출정했으나 917년 [[아켈로오스 전투]]에서 제국군은 패하고 이듬해 불가리아는 [[코린토스]]까지 남하하여 북부 그리스를 유린했다. 923년과 아드리아노폴리스는 불가리아 군대의 손아귀에 다시금 떨어졌고 이 사람들은 92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성전을 벌였다. 927년에 시메온이 죽자 발칸 반도 상황이 그제야 나아졌다. 968년에 불가리아는 [[키예프 루스루시]]의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침략받았으나 3년 후에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 황제는 [[도로스톨론 전투]]에서 루스를루시를 무찌르고 불가리아 동부를 제국 영토로 회복했다.
 
[[코메토풀리 왕조]]의 지도로 불가리아는 제국에 재저항했으나 [[바실레이오스 2세]](976년~1025년)는 불가리아의 복종을 우선 과제로 삼았으나 바실레이오스의 첫 불가리아 원정대는 [[트라야누스 문 전투|트라야누스 문]]에서 치욕스럽게 패배한 후 몇 년간 황제는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불가리아가 발칸 지역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상황을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양 세력 간 전쟁은 거의 20년 가까이 질질 끌었다. 로마 제국은 [[스페르케이오스 전투]]와 [[스코페 전투]]에서 승리해 불가리아 군대를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약화시켰으며, 해마다 작전을 수행해 불가리아의 거점을 조직 성격을 띠게 줄여 나아가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는 결국 완벽히 패배했다.<ref name=Angold>{{harvnb|Angold|1997}}.</ref> 야샤에서는 생포된 불가리아 포로들을 100명씩으로 나누어 99명은 눈을 멀게 하고 100번째 병사는 한쪽 눈만 남겨 맹인들을 고향으로 인도하게끔 하였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차르 [[사무일]]은 한때 용맹했던 불가리아 군대의 참상을 보고 충격으로 죽었다. 1018년, 불가리아의 최후 요새가 항복했고 이 나라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승리로 로마 제국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 이래 처음으로 [[도나우 강]] 국경선을 확보했다.<ref name=Norwich />
[[파일:Byzantine Empire Themes 1025-pt.svg|섬네일|비잔틴 제국의 1025년 영토. 가운데가 하얗게 칠해진 곳은 속국을 의미한다.]]
 
==== 키예프 루스와루시와 제국의 관계 ====
 
850년에서 1100년까지 로마 제국은 흑해 북부 해안에서 발생한 [[키예프 루스루시]]와 이런저런 관계한다. 양국의 관계는 [[동슬라브족]]사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쳤다. 제국은 키예프 대공국의공국의 주요 무역과 문화 교류 상대가 재빨리 되었으나 늘 사이좋게 관계하지는 않았다. 양 세력은 968년에서 971년에 불가리아에서 전쟁했고 루스인은루시인은 흑해 해안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략하기도 했다. 대개 제국은 루시의 침입을 격퇴했으나 루스인은루시인은 보통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무역 조약을 조인했다.
 
[[포르피로게니타|포르피로예니타]] [[안나 포르피로게니타|안나 공주]]와 [[블라디미르 대공]]이 혼인하고 뒤이어 [[루시의 기독교화|루시가 기독교화]]하면서 루스와루시와 로마의 관계는 돈독해졌다. 로마제국의 성직자, 건축가, 예술가가 루스의루시의 수많은 성당과 교회 건축에 초빙되면서 로마 문화가 전파되었다. 수많은 루스루시 사람들이 로마 군대에 용병으로 복무한 중에는 유명한 [[바랑인 근위대]]도 있었다.
 
==== 절정 ====
 
이제 로마 제국의 영토는 동으로는 [[아르메니아]], 서로는 [[남부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에 이르렀다.<ref name=Norwich>{{harvnb|Norwich|1998}}.</ref> 제국은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조지아 (국가)|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일부 지역을 병합했으며, [[안티오케이아]] 바깥에서 이집트 침략군을 궤멸시켰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시칠리아 토후국|아랍의 시칠리아 지배]]를 치욕으로 간주한 바실레이오스 황제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래 로마의 땅이었던 이 섬을 수복하기로 계획했으나 1025년에 포카스장군이그 사람이 죽으면서 시칠리아 수복은 계획에 그친다.<ref name=Norwich />
 
11세기에는 종교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다. 1054년에 동서 교회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로 치달았다. 이미 조직 분리가 공식 선언된 바 있었으나 그 해 6월 16일 토요일 오후에 [[성체 의례]] 중에 교황 특사 세 사람이 성 소피아 성당에 들어와 제단에 [[파문]] [[교황 칙서]]를 놓으면서 수백년간 이어져온 [[동서 교회의 분리]]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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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Byzantine Empire, c.1180.PNG|섬네일|왼쪽|300px|콤네노스 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든 1180년경 로마 제국의 영토.]]
 
요한네스가 황제로 선택한 사남 [[마누엘 1세 콤네노스]]는 동부와 서부 양방에서 주변 지역을 공격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하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예루살렘 왕국과 함께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 마누엘은 여러 십자군 국가의 종주국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했고 안티오케이아의 공작 [[르노 드 샤티용]]과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과 협정을 조인해 패권을 확보했다.<ref name="S">{{harvnb|Magdalino|2002|p=74}}; Stone, [http://www.roman-emperors.org/mannycom.htm Manuel I Comnenus].</ref>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여러 항구를 재장악하고자 1155년에 마누엘은 이탈리아로 원정대를 보냈으나 연합군 내홍 탓에 원정은 결국 실패했으나 1167년에 마누엘에 [[헝가리 왕국]]을 침공해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를 격파했다. 1168년에 아드리아 해 동안 거의 대부분을 장악한<ref name="S372">{{harvnb|Sedlar|1994|p=372}}.</ref> 마누엘 황제는 황제와 여러 서방 기독교 왕국과 수 차서방기독교왕국과 수차 동맹했고 [[제2차 십자군]]으로 하여금 제국을 별탈없이 통과시킬 수 있었으나<ref name="M67">{{harvnb|Magdalino|2002|p=67}}.</ref> 동부에서는 1176년에 마누엘 2세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튀르크인에게 대패했지만, 패배한 손실은 이내 만회했고 익년에 마누엘의 군대는 "선발된 튀르크인들"을 무찔렀다.<ref name="B129">{{harvnb|Birkenmeier|2002|p=128}}.</ref> [[히엘리온과 레이모케이르 전투]]에서 튀르크 침략군을 섬멸한 로마 군대 사령관 요한네스 바타체스는 수도에서 군대를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자체로 모집 가능했는데 이는 로마 제국 군대가 아직 강력하며 소아시아 서부의 방어 제도가 아직 제구실하는 형편을 나타냈다.<ref name="B196">{{harvnb|Birkenmeier|2002|p=196}}.</ref>
 
==== 12세기의 부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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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겔로스 황조 ====
 
1180년 9월 24일에 마누엘이 죽자, 당시 11살이었던 아들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가 제위에 올랐다. 알렉시오스는 정치에 무능했고 프랑크인 세력을 등에 업은 [[안티오케이아의 마리아]] 탓에 섭정은 인기를 없었다.<ref name="Norwich291">{{harvnb|Norwich|1998|p=291}}.</ref> 알렉시오스 1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가 어린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결국 정변을 일으켰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인 데다가 군대에게 더 뛰어난 힘이나 재주로 남을 눌러 꼼짝 못하게 하는 지지를 이용해 1182년에 수도로 진군하여 라틴인들을 학살한 <ref name="Norwich292">{{harvnb|Norwich|1998|p=292}}.</ref> 안드로니코스는 정적이 될지도 모를 세력을 제거하고서 1183년 9월에 공동 황제로 즉위했고 알렉시오스 2세를 처단하고 그 사람의 열두 살 난 아내 [[프랑스의 아녜스]]를 자신의 황후로 맞이했다.<ref name="Norwich292"/>
 
[[파일:Schnorr von Carolsfeld - Die Schlacht von Iconium.jpg|섬네일|제3차 십자군이 [[이코니온]]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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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astern Mediterranean 1450 .svg|섬네일|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직전 동지중해 지도.]]
 
황제들은 서방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교황은 오직 [[성좌 (가톨릭)|로마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재통합을 조건으로 지원을 고려할 뿐이었다. 제국 행정부는 교회 통합을 고려해 때로는 칙령으로 통합을 명령하기도 했으나 정교도 시민과 성직자들은 로마 교회와 [[라틴 전례]]의 권위에 격렬하게 반발했다.<ref>{{harvnb|Runciman|1990|pp=71–72}}.</ref>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독교를 수호하고자 일부 서방 군대가 오기도 했으나 서방 지배자 거의 대부분은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 오스만 제국이 로마 제국의 잔여 영토를 잠식하는데도 아무것도 돕지 않은<ref name="R84-85">{{harvnb|Runciman|1990|pp=84–85}}.</ref> 시기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인구가 급감해 벌판에 마을이 모인 정도 밖에 안 되는 초라한 도시가 됐다. 1453년 4월 2일,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군대 80,000여 명과 대규모 비정규군이 도시를 포위했다.<ref name="R84-86">{{harvnb|Runciman|1990|pp=84–86}}.</ref> 수를 기준으로 열세였던 기독교도 군대(약 7,000여 명으로, 이 중 2,000여 명은 외국인이었다.)가 필사로 해자를 방어했으나<ref name="R84-85" /> 2개월간 벌인 공성전 끝에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로마 제국의 최후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적군이 도시 성벽을 장악하자 황제의 예복을 벗고 육박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ref>{{harvnb|Hindley|2004|p=300}}.</ref>
 
=== 멸망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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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트 2세]]는 1460년 [[미스트라]]를, 1461년에 [[트라페주스 제국]]을 정복해 그리스인 세력을 모두 멸망시켰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안드레아스 팔라이올로고스]]는 이미 소멸된 [[비잔티움 황제|로마 황제]]의 칭호를 물려받아 1465년부터 1503년 죽을 때까지 지녔다.<ref name="Helios" /> 15세기 말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 일부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메흐메트 2세와 그 사람의 후계자들은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간주한 일변, [[도나우 공국]]에서는 로마 제국의 일부 귀족을 비롯한 정교도 피난자들을 수용했다.
 
그 사람이 죽자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동방 정교회]]의 보호자로서 대공의황제의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 사람은 [[안드레아스]]의 누이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혼인했고 이 사람들의 손자 [[이반 4세]]는 처음으로 [[러시아 차르국]]의 [[차르]]가 되었다.(이 말은 [[카이사르 (칭호)|카이사르]]를 뜻하고뜻고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슬라브인들이 로마 제국 왕을황제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반 뇌왕의황제의 후계자들은 [[모스크바]]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생각을 지지했다. [[러시아 차르국제국]]이 [[세 번째 로마]]라는 관념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존재했다.<ref>Seton-Watson, 1967, p.31.</ref>
 
== 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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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ptember byzantinisch.jpg|섬네일|왼쪽|250 px|[[9월]]의 우의적 묘사. 11세기경]]
 
로마 제국의 경제는 수 백년간수백년간 지중해와 유럽에서 단계가 가장 발전되어 앞서 있었다. 특히 유럽은 중세 후기까지 로마 제국의 경제력을 따라가지 못했고 로마 제국에서는 서유럽과 달리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하였다. 제국 행정부에서 발행한 금화 [[노미스마]]는 [[11세기]] 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해 후세에 ‘중세의 달러’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나라에서 화폐로 유통되었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이용한 국가에 의거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쳤으므로, 국영 공장에서 독점으로 제조된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품, 타국과 한 무역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이라고 칭해질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거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무역망의 중심지였으며, [[비단길]]의 서측 관문이기도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7세기에 아랍인이 쳐들어오기까지 제국은 세계에서 최강한 경제력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출처|날짜=2013-06-18}} 아랍인의 정복으로 부는 역전되어 로마 제국은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개혁(765년경)으로 제국은 부흥해 1204년까지 발전하였다. 10세기에서 1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은 화려를 과시했고 여행자들은 수도의 부에 깊이 인상받았으나 경제상 재앙이었던 [[제4차 십자군]]으로 일체가 달라졌다.<ref name="M532">Magdalino ''in Laiou''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20.pdf 532]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20.pdf |date=20080625192523 }}<!-- application/pdf, 531963 bytes -->}}</ref> [[팔라이올로고스 황조]]는 경제를 회생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후기 로마 제국은 국내외 경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12세기 이후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의 상공업 발전에 밀려나 제국 내 산업은 쇠퇴헤 해군력 제공을 담보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에 무역 특권 부여로 무역 이익도 잃은 제국은 쇠퇴일로에 들어섰다. 점차 제국은 교역과 가격, 귀금속 유통에 영향력을 잃었고 어떤 학자들은 화폐 주조권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ref name="M806">Matschke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37.pdf 805–806]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37.pdf |date=20080625235853 }}<!-- application/pdf, 262093 bytes -->}}</ref>
 
교역은 제국의 경제 기반이었다. 섬유는 최요한 수출품이었을 텐데 특히 [[비단]]은 이집트에 수출됐고 불가리아나 서방에서도 유통되었다.<ref name="L723">Laiou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36.pdf 723]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36.pdf |date=20080625235908 }}</ref> 국가는 국내외 무역을 강력하게 통제했으며, [[화폐 주조]]를 독점하였다. 행정부는 금리도 직접 통제하였고 [[길드]]나 조합의 활동도 제한했다. 황제와 제국 관리들은 수도의 물자 공급을 확실히 하고 곡물 가격을 억제하고자 위기 상황에 때때로 개입하기도 하였으며, 행정부는 세금을 이용해 잉여량을 저장했다가 공무원 급료나 공공 사업 투자로 재유통하기도 하였다.<ref name="L3-4">Laiou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01.pdf 3–4]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01.pdf |date=20080625235933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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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라야]]는 "로마 문화와 [[동방 정교회]]는 같은 하나다."라고 말한 바 있다.<ref>Raya, [http://rumkatkilise.org/rayabyzantium.htm#cooliris The Byzantine Church and Culture] {{웨이백|url=http://rumkatkilise.org/rayabyzantium.htm |date=20081009091253 }}</ref> 동방에서 제국이 존속하면서, 황제는 교회의 일에 적극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로마 국가는 고대 종교 시대에서 일상으로 종교와 관련한 행정ㆍ재정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이는 [[기독교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카이사레이아의 에우세비우스]]가 고안한 모범에 따라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나 전령으로 간주됐으며, 황제는 타 종교인에게 기독교를 선교하고 행정이나 재정을 위시해 종교 "외부상" 일을 맡는다고 보았으나 황제가 교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고정된 형태로 법에 따라 정해진 제도로 발전되지는 않았다.<ref name="M14">Meyendorff, 1982, p.13.</ref>
 
로마 제국의 기독교도는 제국사를 통틀어 통일된 상태였다는 주장은 기독교를 향한 일반인의 오해이다. 제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동방 정교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절대로 제국 전체의 모든 기독교도를 대표한 적이 없었다. 5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보급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제국 교회를 분열시켜 오늘날 [[아시리아 동방 교회]]로 이어졌다. 6세기에 교회의 대분열 당시 [[오리엔트 정교회]]가 [[칼케돈 공의회]]의 선언에 반대하여 제국 교회에서 떨어져나갔다. 5세기에 로마가 몰락한 당시 아리우스주의는 대개 서유럽 게르만족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초기 제국에는 이들 종파와 더불어 [[아리우스주의]]나 타 기독교 분파도 있었으나 제국이 후기로 접어들면서 동방 정교회는 제국에 남은 기독교도 거의 대부분을 대표하게 되었다. [[유대교]]도 제국사에서 중요한 소수 종교였다. 이들은 박해받는 시기도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 시기에는 보통 용인되었다.
 
로마가 붕괴하고 여타 동방 총대주교들의 내부 불화를 겪으면서 6세기에서 11세기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기독교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중심지가 되었다<ref name="M19">Meyendorff, 1982, p.19.</ref> 제국이 허울만 남으면 쇠퇴한 때에도 교회는 제국 국경 안팎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로마 제국의 활발한 선교로 동구권([[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를 위시해 슬라브 민족) 거의 대부분과 일부 중동권에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었고 로마 제국은 자연스레 정교회의 본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슬라브 민족은 [[동방 정교회]]와 함께 [[키릴 문자]]와 [[동방정교회]]의 교회 헌법을 수용했다.<ref>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교양》(들녘, 2001) 103쪽.</ref> [[게오르기예 오스트로고르스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정교 세계의 중심지로 남았으며, 소아시아와 발칸 영토의 대주교는 그 예하에 있었으며, 비잔티움을 잃은 지금에도 [[카프카스]]와 러시아, [[리투아니아]]도 이에 종속되어 있다. 정교회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요소였다.<ref name="M130">Meyendorff, 1982, p.13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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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
 
로마가 몰락하고서 제국의 최대 난관은 제국과 주변 세력의 관계를 유지였다. 주변 여러 민족이 공식 정치 제도를 이룰 때 이 사람들은 로마 제국을 본뜨기도 하였다. 로마 제국의 외교는 주변 여러 세력을 국제와 국가 내부의 관계망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ref name="N1">Neumann, 2006, pp.869–871.</ref> 로마의 외교망 사이에서는 조약이 주기로 조인되었고 새로운 지배자가 왕가 형성에 기꺼이 수용됐으며, 로마 사회의 의견, 가치, 제도로 포섭하였다.<ref>Chrysos, 1992, p.35.</ref> 고전 저자들은 평화와 전쟁을 도덕상ㆍ법상 구분하길 좋아하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외교를 다른 형태의 전쟁 수단으로 보았다.<ref name="Ant">Antonucci (1993), 11–13</ref> 가령 [[불가르족]]이 제국을 위협하자, 이에 대응하여 [[키예프키이우 대공국공국]]에 돈을 주어 반격하는 식이었다.<ref name="Ant"/> [[야만족 담당국]]은 최초의 대외 정보 기관으로, 제국의 적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합하였다.<ref name="Ant"/>
 
로마 사람들은 여러 가지 외교 제도를 두었다. 가령 수도에는 여러 대사관이 수년간 상주하기도 하였다. 타국의 왕가 일원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정치 상황에 따라 유용한 볼모가 될 수 있었으며, 중요한 관습으로 방문자들을 호화로운 모습으로 압도하기도 하였다.<ref name="N1" /> [[디미트리 오볼렌스키]]는 노련하고 책략을 갖춘 로마 제국의 외교 덕분에 [[동유럽]]에서 보전된 문명은 오랫동안 유럽사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한다.<ref name="O3">Obolensky (1994), 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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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로마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한 토대에 [[기독교]]다운 요소를 결합하여 천년 간에 걸쳐 중세 서유럽의 라틴-게르만 문화권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하였다. 중세를 이용해 유지한 로마 문화는 근세 서유럽에는 그리스 정신을 전해주었고 발칸과 [[루스러시아]]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민족의 문화상 수준을 한 단계 제고했다. 특히 6세기와 9세기~10세기, 14세기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로마 문화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면서 신비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점이 있으며, 로마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외면적 요소보다는 정신적인 요소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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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 ===
 
[[고대]]의 저작들은 로마 시대에도 계속 장려되어 로마의 학문은 [[고대 철학]]과 [[형이상학]]과 긴밀하게 이어졌다.<ref>Anastos (1962), 409</ref> 로마 제국에서는 과학을 응용하는 면에서 여러 번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으나(유명한 사례로 [[성 소피아 성당]]을 들 수 있다.), 6세기 이후 로마의 학자들은 고대 저술가의 사상을 확대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발전하는 측면에서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ref>Cohen (1994), 395<br />* Dickson, [http://www.roma.unisa.edu.au/07305/medmm.htm Mathematics Through the Middle Ages] {{웨이백|url=http://www.roma.unisa.edu.au/07305/medmm.htm |date=20080513152720 }}</ref>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역병이 창궐한 후 아랍인이 침략하는 등 특히 혼란기에 학문은 정체되었으나 제국이 천 년을 넘긴 시점에서 소위 "로마 르네상스"로 로마의 학자들은 특히 [[천문학]]과 [[수학]] 등 아랍과 페르시아의 과학 발전에서 전문가 역할을 자임하였다.<ref>King, 1991, pp.116~118.</ref>
 
제국의 마지막 세기에 로마의 문법학자들은 개인으로서나 저술로서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고대 그리스어 문법과 문학 연구에 주되게 기여하였다.<ref>Robins, 1993 , p.8.</ref> 이 시대에 [[트라페주스]]에서 천문학과 여타 수리 과학 교육이 이루어졌고 약학은 거의 모든 학자들이 관심하였다.<ref name="TM189">Tatakes-Moutafakis (2003), 18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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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과 문학 ===
 
로마 제국과 거기서 영향받은 여러 지역에서는 독특한 건축, 회화를 비롯한 여러 예술을 남겼다. 로마 예술은 거의 전체에 걸쳐 종교상 표현과 유관하며, 더욱 구체로 보면, 면밀하게 정해진 교회 신학의 비인격다운 특성을 예술로 표현하였다. 로마의 예술 양식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무역으로써 교류하면서 퍼졌고 이곳에서 그 양식은 12세기경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 형성에 영향을 준다. 동방 정교가 확산하면서, 로마 양식은 동유럽의 중심지, 특히 루스로러시아로 확산되었다.<ref name="BAr">{{백과사전 인용|제목=Byzantine Art|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ref> 종교 건축을 위시해 로마 건축의 영향은 이집트에서 아랍, 루스러시아, 루마니아를 위시해 다양한 지역에서 노정한다.
 
로마의 문학에서는 네 가지 요소를 꼽을 수 있는데 [[그리스어 문학|그리스어]], 기독교, [[라틴어 문학|로마]], 동방이 바로 그것이다. 로마 문학은 역사, 연대기, 백과사전(포티오스 총대주교, [[미카엘 프셀로스]], [[미카엘 코니아테스]]는 로마의 위대한 백과사전 저자로 간주된다.), 수필, 세속 시문{로마에서 유일한 진짜 영웅 서사시는 [[디게니스 아크리타스]](Digenis Acritas)이다.}으로 이렇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기도 하며 기타 교회와 신학 문학과 민중 시가가 있다. 현존하는 로마의 두루마리 서적 2천에서 3천여 권 중에 세속 시가, 역사, 과학, 의사과학(pseudo-science)을 다룬 책은 330권에 불과하다.<ref>Mango, 1980, pp.233–4.</ref> 로마 제국의 세속 문학이 가장 발달한 시기는 9세기에서 12세기경이고 종교 문학([[설교문]], [[전례문]], 시, 신학, 신앙 논문 등)은 훨씬 이전인 [[로마노스]] 시대에 발달하였다.<ref name="CLi">{{백과사전 인용|제목=Byzantine Literature|백과사전=Catholic Encyclopedia|url=http://www.newadvent.org/cathen/03113a.htm}}</ref>
 
=== 유산 ===
 
중세 시대에까지 존재했던 로마 제국은 '''천년 제국''' 또는 '''중세 로마'''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후에 [[그리스]]나 로마를 정복한 [[오스만 투르크]] 조차도 자신들을 로마의 후계자, 로마 황제를 칭하기도 했다. [[러시아 차르국제국]]의 차르 역시 로마 제국의 황녀와 결혼한 것을 근거로 자신들을 제3의 로마, 근대 로마라 칭하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 유일하게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 나라인 로마 제국은 서유럽과 동떨어져 있었다. 끊임없이 이민족에게 공격받은 로마 제국이 방파제 역할을 하여 서유럽은 페르시아, 아랍,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한동안 오스만 투르크와제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가령 로마와 아랍의 전쟁 덕분에 [[샤를마뉴]]가 부상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며<ref name="Pirenne">[[Henri Pirenne|Pirenne, Henri]]
* ''Mediaeval Cities: Their Origins and the Rivival of Trade'' (Princeton, NJ, 1925). {{ISBN|0-691-00760-8}}
* See also ''Mohammed and Charlemagne'' (London 1939) Dover Publications (2001). {{ISBN|0-486-42011-6}}.</ref>, [[카를 마르텔]]이 [[투르-푸아티에]]에서 [[사라센]] 족을 격파한 것도 로마가 방패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로마 제국이 유지한 고대 로마 제국의 각지역 속주와 지방 파견한 파트리키우스 등은 [[봉건 제도]]와 자급자족 경제를 크게 자극했다고도 주장한다.
 
수백년간 서방 사가들은 '비잔티움다운', '비잔티움주의'라는 말을 '쇠퇴, 믿을 수 없는 정치, 복잡한 관료제'를 뜻하는 말로 썼으며, 이 말 속에는 로마 문명과 [[남동부 유럽]]의 로마가 남긴 유산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ref name="A1">Angelov (2001), 1</ref> 비잔티움주의(''Byzantinism'')이라는 말은 일반으로 종교ㆍ정치ㆍ철학 등에서 서방의 것과 반대되는 태도를 정의하는 표현이나<ref name="A7-8">Angelov (2001), 7-8</ref> 20세기와 21세기에는 서방 사가들이 로마 제국이 서방에 끼친 영향을 위시해 더 균형잡히고 정확한 방법으로 이것들을 이해하려는 듯하여 로마 문화의 복잡한 성격이 더욱 관심받으면서 전보다 더욱 객관으로 평가된다.<ref name="A7-8" />
 
== 역대 왕조 ==
== 함께 보기 ==
{{본문|*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목록}}|로마 제국의 황제 목록]]
* [[콘스탄티누스 왕조]] (306년 ~ 363년)
*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364년 ~ 383년)
* [[테오도시우스 왕조]] (383년 ~ 457년)
* 레오 왕조 (457년 ~ 518년)
*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518년 ~ 602년)
* 헤라클리우스 왕조 (610년 ~ 711년)
* 이사우리아 왕조 (717년 ~ 802년)
* 니카포로스 왕조 (802년 ~ 813년)
* [[아모리아 왕조]] (820년 ~ 867년)
* [[마케도니아 왕조]] (867년 ~ 1056년)
* [[두카스 왕조]] (1059년 ~ 1081년)
* [[콤네노스 왕조]] (1081년 ~ 1185년)
* [[앙겔로스 왕조]] (1185년 ~ 1204년)
* [[라스카리스 왕조]] (1204년 ~ 1259년)
*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1259년 ~ 1453년)
 
==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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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 [http://www.roman-emperors.org/ De Imperatoribus Romanis]. Scholarly biographies of many Byzantine emperors.
* [http://www.anders.com/lectures/lars_brownworth/12_byzantine_rulers/ 12 Byzantine Rulers] by Lars Brownworth of [[The Stony Brook School]]; audio lectures. [https://www.nytimes.com/2007/01/31/education/31education.html NYTimes 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