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L. 무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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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 사역 ===
17세 때인 [[1854년]] [[시카고]]에 간 무디는 외삼촌 새뮤얼 홀턴(Samuel Holton)의 제화점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는데, 5년 만에 7,000달러를 모았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일했다. [[1855년]] [[주일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빌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된 그는 [[시카고]] 빈민가의 어린이들에게 전도하는 어린이 사역을 하였다. 당시 그는 어린이들에게 구두팔듯이 화려한 언변으로 전도하여, 술집을 빌려 주일학교 공과수업을 할 정도로 어린이들이 매우 많이 모였으나, 정작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이들은 없었다. 비로소 무디는 자신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영업'한 것이지, 전도한 게 아님을 알게 된다.<ref name=autogenerated1 />
 
=== 전도 ===
[[1875년]] [[시카고]] 빈민가에 교회를 설립했는데, 구두판매원출신다운 쉽고 설득력있는 무디의 [[설교]]와 감성을 자극하는 가수 아이라 생키([[1870년]] 무디의 전도사업에 참여)의 성가는 많은 이들이 신앙을 갖게 했다. [[잉글랜드|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전도했는데,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그의 설교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남북전쟁]]때는 전쟁터에서도 설교했는데 많은 군인들이 무디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다고 한다. 이러한 설교자로서의 활약상은 청년들이 해외선교 특히, [[아시아]]와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게 했다. 무디성서학교([[1886년]])와 마운트 헤르몬 학교를 설립하는 업적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