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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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기 ===
1945년 [[11월 18일]] 금융조합 본부 지도과장으로 인사발령을 받아 서울로 이전했다. [[1946년]] [[서울대학교|경성대학]]에 복학, 졸업한 후 동 대학 사학과 조수로 임용되어 동양사연구실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모교인 경성법학전문학교에서 전임교수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한 대신, 시간강사로 출강하며 한국사와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학자로서의 삶이 시작되자 김성칠은 금융조합을 사직했으며, 광복 직후라 한자로 쓰인 한국사 책이 여전히 대다수였던 시기에 한글로 저술한 한국사 도서 《조선역사》를 출간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4월에 [[제천여자고등학교|제천고등여학교]] 교장직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이 해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명조사연구회를 조직, 한자로 된 지명의 순한글 이름을 발굴하는 연구를 하였으나 분단이 시작되며 [[한반도]] 남부에 한해서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인해 중도에 그만두어야 했다. 이듬해인 [[1947년]], [[서울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1948년]]부터는 《[[용비어천가]]》, 《[[열하일기]]》, 《[[초당 (소설)|초당]]》 등을 번역, 출간하는 데에 힘을 쓰기도 했고 교과서 《중등사회생활과 이웃나라의 생활 역사》를 공저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 한국 전쟁 시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