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33번째 줄:
}}
[[파일:김규식(AMJ).jpg|섬네일|100픽셀|김규식의 필체]]
'''김규식'''(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대한제국]]의 종교가,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으며 대한민국 [[종교인]] · [[독립운동가]] · [[정치가]] · [[영문]][[학자]] · [[교육자]] · [[작가]] · [[시인]] · [[교육자]] · [[외교관]]이었다.
 
== 개요 ==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 [[경신학교]]의 [[교수]]와 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1918년]] 파리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10여년간 외교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ref name="autogenerated10">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01페이지</ref>
 
각지에서 세워진 임시정부로부터 전권대사와 외무부서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외무부|외무 총장]]에 임명되고 파리대표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외교위원회 총본부 부위원장]], 위원장,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각료#학무부|대한 임정 학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국민대표회의|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 뒤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임정에 다시 참여,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