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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는 이성계의 5남인 [[조선 태종|이방원]]이 [[정몽주]]를 개경 [[선죽교]]에서 척살(斥殺)하고, 그 해 [[음력 7월 17일]]([[8월 5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고려 공양왕|공양왕]]에게 왕위를 받은 이성계가 마침내 조선을 건국했다.<ref name='kaa_10107017_001' />
 
이성계는 건국 후 1년이 되어서야 국호를 바꾸었다.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에는 나라의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고치고<ref name='kaa_10202015_001' />, [[1394년]] 음력 1월에 [[한성부]]로 천도했다. 태조는 고려 때에 큰 폐단이 되었던 [[불교]] 대신에 유교를[[유교]]를 존중하여 이를 정치·교육의 근본이념으로 삼으니, 불교는 점점 쇠퇴하여 천대를 받고, 유교는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 왕자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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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구도의 변화 ====
[[조선 중종|중종]]은 [[1506년]] [[음력 9월 2일]],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으로 왕으로 추대되었다. [[조선 중종|중종]]은 왕권 강화보다는 왕권의 안정을 이루는 데 주력하였는데, 그 방책으로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철저한 [[유교]]적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파]]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차츰 싫증을 내게 되었다. 결국, 중종은 [[1519년]]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 사림들을사림을 실각시켰고, 조광조와 사림파는 죽음을죽임을 당하게 된다([[기묘사화]]). 그 다음에는그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45년]], [[조선 명종|명종]]이 조선 13대 임금으로 등극하자, 어머니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했다. 이에 명종을 지지하는 소윤파가[[소윤파]]가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파를[[대윤파]]를 공격하면서 [[을사사화]]가 벌어졌다. 약 12년간의12년 간의 섭정으로 정국은 상당히 혼잡해졌다.
 
[[1567년]] 왕위에 오른 [[조선 선조|선조]]는 [[이황]], [[이이]] 등 사림을 대거 중용하였다. 선조는 사림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기묘사화]] 때 당쟁으로 억울하게 숙청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를 복권했으며, 훈구대신인훈구 대신인 [[남곤]], [[윤원형]] 등을 대역죄로 단죄하여 관작을 추탈하고 삭훈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후에 사림이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인 (정치)|동인]]과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서인]]으로 분리되어 [[붕당]]이 형성되자, 선조는 어느 한 쪽의한쪽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에 따라 정국이 단번에 교체되는 일이 잦았다.
 
거듭되는 사화 속에서도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발전하여 갔으며, 드디어 선조 때에는 재차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또다시 당쟁이 일어나게 되어 정쟁은 파노라마처럼 되풀이되었다.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과 김효원 양파의 전랑직[[전랑]]직(詮郞職)을 에워싼 암투에서 비롯되었다.
 
==== 경제 체제의 해이 ====
양반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과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신전·별사전(別賜田)을 받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세습되었다. 양반 관리들은 또 매입(買入)·겸병(兼倂)·개간 등의 각종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했다. 특히 비옥한 삼남 지방의 넓은 공전(公田)을 침식하였다. 직전법조차[[직전법]]조차 폐지되자 그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농장의 확대를 가져왔고, 토지를 잃고 유망(流亡)하는 농민의 증가는 점차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한편 양반 관리들의 사치를 위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공납]](貢納)이나 진상 또한 농민들의 커다란 고통이었다. 방납까지[[방납]]까지 생겨 그 피해는 극심해졌다. 이런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사림의 [[이이]](李珥)와 [[유성룡]]은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환곡 제도로 정부는 농민을 상대로 일종의 고리대를 하기도 했다. [[환곡]]은 원래 의창이 담당하는 일이었으나 의창이 제구실을 다하지다 하지 못하자 상평창이 이를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농민 진휼 정책(賑恤政策)에서 발단했던 환곡은 점차 변질되었다변질하였다.
 
특수직에 종사하는 직역(職役) 외에 양인에게 부과되는 신역(身役)은 주로 군역이었다[[군역]]이었다. 군역 또한 신역의[[신역]]의 포납화[[포납]]화(布納化) 경향을 촉진하여 제도가 붕괴되었다붕괴하였다. 초기에 군역의 대가로 바치는 포(布)는 상당히 고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포 대역제(收布代役制)가 관행이 되면서 포납은 정남(丁男)에 대한 [[인두세]](人頭稅)와 같이 되었으며, 평가도 절하되어 갔다. 그리하여 그 공정액이 당시 전세(田稅)의 약 3배에 해당하여 양인에게는 극히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원래의 신역은 붕괴되었다붕괴하였다. 그 결과로 농민들의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해졌다. 많은 농민이 유민(流民)이 되어 농촌은 황폐하여 갔으며, 각지에는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중에서도 임꺽정이[[임꺽정]]이 대표적이다.
 
==== 임진왜란(임진왜란+정유재란), 일본과의 7년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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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ongnaebusunjeoldo.jpg|섬네일|200px|《동래부순절도》]]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 20만 병력의 일본군을병력을 조선에 대거 보내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초반 [[제승방략]] 체제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고, 일본군의 [[백병전]] 능력과 신무기인 [[조총]]에 압도당했다. [[부산진성]]의 [[정발 (1553년)|정발]]과 [[동래성]]의 [[송상현]]이 삽시간 만에삽시간에 일본군에게 무너졌다. 그리고 상주의[[상주시|상주]]의 [[이일]]과 [[충주시|충주]] 탄금대에서[[탄금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신립]]의 군대도 일본군이 무장한 조총에 의해 궤멸당한다. [[조선 선조|선조]]는 뚜렷한 전략 없이 수도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변에 있는 [[의주]]로 피난을 갔다피난하였다. 일본군은 개전 20여 일 만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임진강 방어선도 뚫은 채 [[평양]]까지 손쉽게 점령하였다.
 
이 기세로 가면 [[의주군|의주]]도 점령될 것 같았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옥포 해전|옥포]]·[[사천 해전|사천]]·[[한산도 대첩|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해군|수군]]을 크게 격파해버림으로써격파함으로써, 일본군은 수군을 통한 보급작전에보급 작전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고 더 이상되어 북진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 권율에게[[권율]]에게 크게 격파당했고([[행주대첩]]), 그리고 [[삼남]] 지역에서도 조선 각지의 [[의병]]과 관군의 반격을 받았고, 명나라에서도 [[이여송]]이 지휘하는 대군을 파병하였다. [[조선군]]은 [[명나라]]의 지원군에 힘입어 일본군을 몰아내어 그 세력을 [[경상도]] 해안 일대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5년5년간의 간의 지리멸렬(支離滅裂)한지지부진한 휴전협상이 실패하자,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칠전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조선 수군을 크게 격파했으나, 그 다음에그다음에 벌어진 [[이순신]]이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조선 수군에 [[명량 해전|명량]]에서 크게 격파당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히데요시의 [[병사]](病死)로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고, [[노량 대첩]]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도 막을 내렸고, [[노량 대첩]]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이순신]]이이순신이 이 전투에서 총을 맞고 전사하였다.
 
==== 전후 복구 사업 ====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조선 광해군|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매일 훈련해 국방을 강화하였고, 호적을 다시 정비했다. [[임진왜란]] 초기 도성이 함락되어 노비문서와노비 문서와 군적 등이 불에 탔고, 이후에도 전란 중에 [[노비]], [[호적]] 등의 문서가 소각되어 많은 양의 도망 노비와 유랑민이 나타났고, 이는 조선 후기의 신분제 붕괴를 유발하게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에 조정에 곡식과 금전 등을 내고 관직을 사는 공명첩과[[공명첩]]과, [[선무군관]] 등의 임명장을 발행하여 조정의 재정을 충당하였다. 전란 중의 호적자료의 소실로 일부 부유한 상인들과 농민들은 가난한 양반의 족보를 사들이거나 위조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임진왜란]] 직후 전쟁 중 세운 공로로 벼슬을 받거나 노비에서 면제된 이들을 다시 노비로 환원시켜 불만이 일자, [[조선 광해군|광해군]]은광해군은 임진왜란 전후에 대한 사료를 보강하고 공이 있는 노비와 양인에게는 역을 면제시키거나 관직을 제수하였다. 전쟁 직후의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백성 구휼과 부역 면제 등의 시책을 활용하는 한편 전쟁 기간에 불에 탄 사고를 재정비했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중립적인 외교를 새롭게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어 [[조선 인조|인조]]를 왕위에 옹립하였다([[인조반정]]).
 
==== 인조 반정 ====
{{본문|인조반정|병자호란|정묘호란|삼전도의 굴욕}}
 
[[조선 인조|인조]]는 [[능창대군|능창군]]의 친형으로 [[북인]] 정권의 광해군의 서형인 [[임해군]] 처형, [[영창대군]] 사사, [[진릉군]] 처형, [[칠서의 변]], [[인목대비]](인목왕후) 폐모론 등의 옥사를 명분으로 삼아 광해군을 연산군에 이어 패륜의 군주로 규정하고 [[1623년]] 3월 반정을 계획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공신|반정 공신]] 내부에서도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이 발생하였다.
 
=== 후기 (1637~1897) ===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마침내 서인은 [[17세기]] 중반의 예송논쟁에서[[예송논쟁]]에서 남인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하지만 남인도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어 싸우다 1680년의[[1680년]]의 경신환국으로[[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에게 철저히 탄압당했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조정에는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몰아내는 '''일당 전제화 현상'''이 일어나고 환국이 자주 생기는 기이한 일이 반복되면서 영조와 정조는 당파의 균형을 고려한 인재기용(→[[탕평책]])을 실천하였다. 19세기의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 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지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이어 일본, 미국 등에 문호를 개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