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잘루트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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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260년]] [[9월 3일]]
|장소= 예루살렘 근방의 아인잘루트
|결과= 맘루크 왕조술탄국의 승리
|이유=
|교전국1={{국기그림|이집트국기|맘루크 술탄국}} [[맘루크 왕조]]
|교전국2=
[[몽골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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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2=거의 대부분 전사
}}{{전역상자 몽골 제국}}
'''아인잘루트 전투'''({{llang|en|Battle of Ain Jalut}})는<ref>'''Ayn Jalut'''(아랍어: عين جالوت)는 "골리앗의 눈"(Eye of Goliath) 혹은 "골리앗의 우물"(Spring of Goliath)이라는 뜻</ref> [[1260년]] [[9월 3일]] 현재는 웨스트 뱅크라 불리는 지방의 북부인 팔레스타인의 갈릴리, 제즈리엘 계곡에서 [[쿠투즈]]가 이끄는 이집트계 [[맘루크 왕조술탄국]]군이 키트부카가 이끄는 시리아 주둔 몽골 제국군 및 기독교도 제후연합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많은 역사가들로부터 거시 역사학적 측면에서 몽골군의 정복이 공세종말점에 이른 것을 나타내는 아주 큰 중요성을 지니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아인잘루트의 전투는 몽골군이 겪은 최초의 결정적인 패배였다. 몽골군은 비록 전에 실패를 겪었더라도 언제나 되돌아와 실패를 설욕하였다. 그러나 아인잘루트의 전투는 몽골인들이 완전히 패배한 최초의 전투이다. 몽골 일칸국의 제왕, 훌라구칸은 다시는 이집트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가 페르시아에 건설한 칸국은 오직 맘루크들을 단 한번 격파하기만 했을 뿐 1300년의 몇 개월간 이외에는 레바논과 시리아를 재점유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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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군은 유목지역으로 가장 최적지였던 [[아제르바이잔]] 방면으로 진격하던 중 [[1260년]] 시리아 북부로 침공하여 [[알레포]]를 점령했다. 몽골군에게는 십자군이 시리아 북부에 세웠던 기독교도의 여러 정권 및 키리키아-아르메니아 왕국, 거기에 쟈지라-아나톨리아 방면의 이슬람교도의 여러 정권이 복속하였다.
 
몽골군이 바그다드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군대는 실리시아인,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심지어 안티오크 공국에서 항복한 프랑크 인의 군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페르시아에 있는 하쉬샤신이 함락되자, 500년된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 왕조는 파괴되었다.(1258년 바그다드의 전투)그리고 아이유부 왕조의 다마스쿠스 역시 함락되었다. 훌라구의 계획은 팔레스타인을 통해 이집트로 향해 남진을 하여 마지막 남은 이슬람 정권인 맘루크 왕조와술탄국과 대치하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이슬람 정세는 아이유브 정권 하에서 이집트, 레바논-시리아, 이라크 등지로 분열되어 있었고, 본 전투가 있기 10여년전 이집트를 침공해들어온 루이 9세의 7차 십자군 원정군을 상대하느라 국력은 소모되었고 정세는 불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50년 5월 2일 아이유브 왕조의술탄국의 마지막 술탄 '투란 샤'가 암살당하고 맘루크들이 카이로에서 정권을 잡게 됨으로써, (비록 이집트에서나마) 강력한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 이집트에 온 몽골사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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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후 상황 및 후세에 남겨진 영향 ==
아인잘루트 전투 후, 맘루크 왕조군은술탄국의 군대는 팔레스타인을 북상하여 몽골군의 잔당 및 레바논에 재침입한 부대를 격파하는 것을 계속해 시리아 거의 대부분을 평정했다. 그러나 알레포를 회복할 때쯤 이번 전투의 공로자였던 바이바르스와 총사령관 쿠투즈의 대립이 재연되었다. 바이바르스는 알레포의 총독에 임명되어 이 지방에서 자립할 야망을 갖고 있었으나, 쿠투즈는 바이바르스가 독립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해 이것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카이로로 돌아도는 도중에 바이바르스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쿠투즈는 살해되고 바이바르스가 새로운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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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르스는 몽골의 침공을 막아낸 영웅으로서 카이로에 개선하여 이집트, 시리아의 왕으로써 확고한 지위를 쌓았다. 그 후에도 매년 벌어진 몽골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바이바르스는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약소자들이었던 맘루크들을 안정한 정권의 주인으로 상승시키는 데 성공해, 사실상 맘루크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아인잘루트 전투 이전에 귀환했던 몽골제국의 훌라구는 아제르바이잔의 [[타브리즈]]에 이르러, 둘째형 [[쿠빌라이]]와 동생 [[아리쿠브케]]가 칸의 지위를 놓고 내분이 시작되는 것을 알고는 이 땅에 머물기로 하고, 이란-이라크를 세력권으로 삼아 자립하였다. 이때부터 훌라구의 자손에 의한 세습이 이루어지게 된 이란에 위치한 몽골왕국을 [[일 한국칸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인잘루트 전투의 결과 팔레스타인은 맘루크 왕조의술탄국의 영토가 되었고, 그 후에도 일 한국 왕조와칸국과 맘루크 왕조술탄국 사이에 레바논, 시리아를 둘러싼 대립이 계속되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양국의 각축전은 [[킵차크 한국칸국]](주치 우르스울루스) 및 [[비잔틴 제국]], 서유럽 여러나라를 포함시키게 되어, 13세기 후반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외교전으로까지 번질 정도였다.
 
이 전투는 맘루크 왕조측의술탄국 측의 역사가들이 남긴 동시대 아라비아어사료에서 현대 역사연구에 이르기까지 무슬림이 몽골제국군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처음으로 이들을 격파한 전투로써 매우 명성이 높다.
그러나 맘루크 왕조의술탄국의 군대가 몽골제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례는 이미 [[1221년]] [[호라즘 왕조]]의 [[잘랄 웃딘]]의 군단이 시기 쿠토쿠가 이끄는 3만기병을 격파한 [[아프가니스탄]]의 [[파르완 전투]]가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었다.
 
한편 [[집사]](集史) 등 몽골제국 측의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전초전]](前哨戰)이 아닌 [[국지전]](局地戰) 취급을 받고 있었다. 몽골측 입장에선 이 전투에 참가했던 몽골제국군은 훌라구의 귀환으로 인해 시리아에 남아있던 주력군의 일부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기타 몽골제국군이 실패한 전투는 후일 몽골측에게 반격을 받아 패주하거나 괴멸당하는 상황이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아인잘루트 전투는 다른것에 비해 인상이 희박할 수밖에 없다. 아인잘루트 전투가 인상적인 이유는 놀랍게도 그 후 몽골측의 정정(政情)이 놀랍도록 변화하여 레바논, 시리아 탈환의 기회를 잃어버렸고, 결과적으로 이 지역들도 맘루크 왕조 통치하에 있게되는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일 한국]]에서는 1260년 이후 훌라구, [[아바카]] 등은 킵차크 한국과칸국과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차가타이 한국]]과는 호라산 지역의 국경지역 분쟁에 신경을 썼기에 바이바르스가 지배하던 시리아 국경지역 침공에는 후속대책만이 되풀이 되었다.
 
역대 군주들 중에도 [[가잔 칸]]만이 레바논, 시리아 지역에 여러차례 원정군을 파견하였으나, 대부분 군의 규모도 많아야 3만전후에 불과해 알레포 이남지역에 대한 정복엔 실패하였다. 쿠빌라이와 아리쿠브케의 제위계승분쟁 후에도 몽골제국 자체, 왕가간의 분쟁이 장기화가 계속되어 제국전체에 의한 군사행동이 불가능하게 된 것도, 몽골측에 있어 레바논, 시리아에 있던 잃어버린 영토 탈환의 기회가 상실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