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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金德齡, [[1567년]] [[음력 12월 29일|12월 29일]]~[[1596년]] [[음력 8월 21일|8월 21일]])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김씨|광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별칭은 신장(神將), 초승장(超乘將), 익호장군(翼虎將軍), 충용장(忠勇將) 등이며,<ref name='tn94580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5803&cid=62132&categoryId=62132 김덕령 :: 《국조인물고》 권56 왜난시 정토인(倭難時征討人)] </ref><ref name='E000893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931 김덕령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f><ref name='duklung'> [http://kwangsankim.ne.kr/inmul/duklung.htm 김덕령 - 광산김씨 허주공파 종중] </ref><ref name='memoryhonam'> [http://www.memoryhonam.co.kr/sub03/sub04_detail.php?page=&SeCate=&seq=969 김충장공옥사사초 - 호남기록유산] </ref><ref name='gjsgcc'> [http://gjsgcc.or.kr/ko/35/view?SEQ=2273 김덕령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ref> 일본군은 석저장군(石底將軍)이라 부르기도 했다.<ref name='tn945803' /><ref name='서하집'> 《[[서하집]]》권14 〈김장군전〉</ref>{{sfnp|김세곤|2013|p=388}} 본관이 광산이기는 하나, 동시에 [[용안 김씨]]의 시조로 받들어진다.<ref name='rootsinfo586'> [http://www.rootsinfo.co.kr/info/roots/view_roots.php?Bid=586 용안 김씨] </ref>
 
문무겸전의 인물로, 향교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던 중 [[임진왜란|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지방에서 그동안 모은 의병 1천여3천여 명을 모집하여이끌고 출정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이에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조선 광해군|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의 군호를, 권율로부터 초승장의 군호를 받았고, 이듬해 1월 선조로부터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는다. 1594년(선조 27년) 4월에 28세(만26세)에 팔도 의병 총사령관이 되었다.{{sfnp|김세곤|2013|p=363}}{{sfnp|오수열|황태섭|2014|p=3~4}}
 
그러나 김덕령이 의병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이루어지던 시기라서 큰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아 별다른 공은 없으며, 1594년(선조 27년) 수륙합동 작전이 이루어졌던 [[장문포 해전]]에도 김덕령이 참전했으나 거의 활약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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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에 따르면, 그해 [[음력 11월 4일|윤11월 4일]] 친구 최담령(崔聃齡) 등 수십 명과 함께 다시 의병을 담양에서 일으키고{{sfnp|김세곤|2013|p=331~334}}, 논밭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니, 정병(精兵)이 1천여 명이 모였다.<ref name='kna_12701005_003'>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1005_003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5일 갑신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무군사에서 김덕령에 종사하는 위대기 등에 대한 처리방법을 건의하다] </ref><ref name='kna_12612013_009' />{{sfnp|김세곤|2013|p=336~337}}
 
현직 관료인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도 김덕령을 적극 도와주었다. 관내의 병역기피자들을 색출하여 의병에 편입시키었고, 전쟁 물자를 많이 지원하여 주었다.<ref name='kna_12701005_003' /><ref name='kna_12612013_009' /> 지역 유지들도 적극 도왔다. 송제민은 제주도까지 가서 말을 가져왔으며, 고봉 [[기대승]]의 아들 함재 [[기효증]]은 김덕령 의병의 [[도유사]]가 되어 각 지방에 통문을 보내어 양곡을 모았다. 김덕령의 친척인 김응회, 이인경,김언욱, 김존경, 김덕후 등도 큰 역할을 하였다. [[김응회]]는 김덕령의 매형으로 김덕령 군대의 핵심참모였고, [[이인경]]은 손위처남으로 군관으로 활약했고, [[김언욱]](金彦勖)은 고종사촌으로 김덕령 군대의 핵심참모였고, [[김존경]]은 김언욱의 아들로 문장이 뛰어나 문서 작성과 전령 업무를 담당하였다. [[김덕휴]]는 사촌동생인데 김덕령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였다.{{sfnp|김세곤|2013|p=336~337}}<ref name='무등일보h380627'> [http://www.honam.co.kr/detail/etc/38062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74. 세자 광해군, 김덕령에게 익호장군 칭호를 내리다] 무등일보, 2012.05.30. </ref>
 
[[음력 12월 13일|12월 13일]] 이정암은 자신이 천거한 김덕령에게 각 고을에 저축한 군량과 병기를 내어줄 수 있도록 분조에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ref name='kna_12701005_003' />{{sfnp|김세곤|2013|p=337~338}} 또한 전혁직 관료도 김덕령을 도왔다. 현직 관료로는 해남 현감 위대기(魏大器)와 군산 만호 이세침(李世琛)이 있고, 전직 관료로는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도와준 전 별좌(別坐) 김응회와 전 찰방(察訪) 김언욱이 있었다.<ref name='kna_12701005_003' /><ref name='kna_12612013_009' /> 한편 이정암이 청한 군량은 11월에 명을 받고 해산한 계의병으로부터 일부 받았다.<ref name='E0003231' />
 
하편 이정암의 장계에 따르면, 첫째 모병은 조정의 하명에 따랐으며, 둘째 이정암이 김덕령을 직접 만나 추천할 만한 장수임을 확인했고, 원근에서 그를 좆아서 의병이 많이 모였으며, 셋째 조정에 군량과 병기 등을 지원하고 표창하는 등 사기를 북돋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sfnp|김세곤|2013|p=337~338}}<ref name='kna_12612013_009' />
<ref name='kna_12612013_009' />{{sfnp|김세곤|2013|p=338~339}}
 
==== 군호를 받다 ====
 
1593년 [[음력 12월 22일|12월 22일]] 김덕령은 담양부사 이경린의 주선으로 전라도 삼례에서 세자 광해군을 만나게 된다. 당시 세자는 무군사(撫軍司)를 이끌고 군인과 백성들을 위로하고 장수를 모집하려고 전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ref name='knb_12612001_002' /><ref name{{sfnp|김세곤|2013|p='무등일보h380627' />339}}
 
[[음력 12월 27일|12월 27일]] 분조의 광해군은 전주 과거시험장에서 주재하였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12001_003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2월 1일 경술 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세자가 전주에 머무르며 과거를 실시하다] </ref> 문과 시관은 좌의정 윤두수, 호조판서 한준, 세자 우빈객 이항복, 문학 유몽인 등이었고, 무과 시관은 좌참찬 이산보, 동지사 박진, 훈련원 첨정 정사시, 병조정랑 조응록 등이었다. 김덕령은 수많은 수험생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었다.<ref name='무등일보h380627' /><ref name='slwk' /> 전주 과거시험에서는 문신 11인과 무신 1천 6백 인이 뽑히었다. 한편 도원수 권율도 무군사의 명령을 받들어 경상도 합천에서 무과시험을 치러 무인 9백 명을 뽑았다.<ref name{{sfnp|김세곤|2013|p='무등일보h380627' />339~341}}{{sfn|문화자원총람|p=5~7}}
 
김덕령이 보인 무술 시범을 보고 흡족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翼虎將)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ref name='kna_12701005_003' /> 이후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에게도 그간의 경과와 군사상황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권율은 김덕령에게 초승장(超乘將)의 군호와 초승군(超乘軍)이란 표장을 내린다.<ref name{{sfnp|김세곤|2013|p='무등일보h380627' /> 341}}
 
한편 김덕령이 세자 광해군을 만나 군호를 수여 받는 사이 명군이 경주경주와 삼지 등에서 철수하는 등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이에 경상도에 내려가 있던 병조판서 이덕형은 경상도 진주와 경주를 지켜야 함을 역설하며, 그동안 불어나서 3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끄는 김덕령에게 그 방어를 맡기기를 청한다.<ref name='kna_12612029_002'>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2029_002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29일 무인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병조 판서 이덕형이 중국군의 동태와 김덕령에게 일면의 방어를 맡길 것 등을 아뢰다]</ref><ref name{{sfnp|김세곤|2013|p='h381086'> [http://www.honam.co.kr/detail/etc/381086 호남정신 뿌리찾아-75. 선조, 김덕령에게 충용이란 군호를 내리다 - 광주 충장사] 무등일보, 2012.06.06.</ref> 344~345}}
 
그 보고를 받고 비변사는 급히 선조에게 김덕령의 군대에 초승군이라 칭하고 기치를 내리기를 청하나, 선조는 아직 김덕령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큰 공이 없으니, 기치를 내리는 일은 신중히 하라고 명한다.<ref name='kna_12612030_005'>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2030_005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30일 기묘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에서 김덕령의 군대를 충용군이라 칭하고 기치를 내릴 것을 청하자 다시 의논하라고 하다] </ref> 이틀 뒤, [[1594년]] [[음력 1월 1일|1월 1일]] 선조는 충용장(忠勇將) 및 충용군(忠勇軍)의 군호를 내리고내리지만, 기치를 내리는 일은 보류한다.<ref name='kna_12701001_008'>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1001_008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1일 경진 8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김덕령의 군대에 군호만 내리고 기치를 내리는 일은 보류하기로 하다] </ref> 1594년 [[음력 1월 5일|1월 5일]] 선조는 김덕령을 선전관과 좌랑의 벼슬을 내린다. 이때 아직 군공이 없다는 이유로 고관에 제수하지는 못하였다.<ref name='wna_12701005_001'> [http://sillok.history.go.kr/id/wna_12701005_001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5일 甲申 1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김덕령을 선전관에 제수하다] </ref><ref name='h381086'당시 />사정이 급박하다고는 하나, 선조가 직접 군호를 내리고 교지까지 남겼다는 것은 김덕령에 대한 선조의 기대가 컸음을 뜻한다.{{sfnp|김세곤|2013|p=346~349}}
 
==== 출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