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36번째 줄:
[[1910년]] [[8월]] [[한일 합방]] 이후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한일 합방]] 이후 교육 계몽활동에 나섰고, 청년들의 깨달음과 실력 양성, 해외 유학과 견문 시찰을 청년들에게 당부하였다.
 
한일합방 직후 [[조선총독부|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우연히 조선미술전람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인사말로 '대감은 동경으로[[도쿄|동경]]으로 이사가셔야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인직이[[신소설]] 《모란봉》에서 [[청일 전쟁|청일전쟁]]을 서술하는 장면에서, [[일본군]] [[군의관]]을 엄마와 헤어져 [[고아]]가 된 옥련을 치료하고 [[입양]]까지 한 은인으로 친절하게 묘사하는 등 [[친일]] 성향이 농후한 [[소설가]]인 [[이인직]]이 의문을 표하자 이상재는 '대감은 나라 망하는데 선수 아니십니까.? 대감이 일본으로 이사가면 일본이 망할 것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했다 한다. 그의 풍자, 조롱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일합방 직후 그는 일체의 공직활동을 자제하고, 언론, 문필, [[기독교청년회|YMCA 청년회]]와 선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143번째 줄:
[[파일:윤치호 이상재 외.jpg|썸네일|왼쪽|230px|엄낙만 환영회장에 참석<br />(뒷줄 왼쪽이 이상재, 앞줄 왼쪽은 [[윤치호]], 앞줄 가운데는 [[신흥우]]]]
{{참고|기독교청년회|105인 사건}}
[[1913년]] [[조선총독부]]는 [[YMCA]]의 확장을 경계,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동원, 기독교 청년회를 파괴하려 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 구금, 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출국한 [[이승만]]의 [[미국]] 체류를 위한 장학금을 지원하는 한편 [[윤치호]]에게도 출국을 권한다. 그러나 노부모가 생존해있던 [[윤치호]]는 출국을 주저한다.
 
그러나 그는 1913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하여, 지도자들의 이탈과 구속, 추방 등의 가운데 [[윤치호]]와 함께 YMCA의 간판을 지키고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1914년]]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YMCA, 군산의 YMCA연맹, 전주의 YMCA신흥, 공주의 YMCA연맹 등 학생YMCA와 연합, 황성기독교청년회와 통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한국 YMCA의 모태가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계몽]]운동에 참가했는데, 이는 1920년대 조선 [[기독교계]]에서 계몽운동에 중점을 둔 사회참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기독교청년회([[기독교청년회|YMCA]])는 [[3·1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그도 이 일로 관련자로 지목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으나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다.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의 전신인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 초대 총재,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을 하였다.그러나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으로부터33인]]으로부터 조선독립선언문에 서명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은 거부하였다.
 
===== 청년들과의 교유 =====
[[파일:Rhee Sang-jae 01.jpg|섬네일|right|180px|만년의 이상재]]
 
그 뒤 그는 YMCA 청년회의 제2대 총무에 취임한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3101471901 개화창구 봉사 소비자.환경운동/YMCA 창립 90년] 조선일보 1993년 10월 14일자</ref> 그는 기독교에 늦게 입문하여 나이가 들어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청년회 운동을 하였고, 사망하는별세한 해에도해인 1927년에도 중도 [[우익|우파]](비타협적인 [[민족주의]])와 [[좌파]]([[사회주의]])가 합작한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 초대 회장을 맡는 등 끝까지 원기 왕성한 활동을기독교 사회활동을 펼쳤으며, 유머가 넘치는 밝은 성격이라 "만년청년"으로 불렸다. 당시 보수적인 이들은 "나이지긋한 분이 체통을 지키지 않는다"며 그의 그러한 행동에 불만을 가졌으나, 이상재 자신은 "내가 청년이 돼야지, 청년더러 노인이 되라고 할 수 없다"면서 청년들과 교류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또한 그 자신은 셋방에서[[셋방]]에서 살면서도 어려운 고학생이 있으면 학비를 줄 정도로 청년들을 다음 세대의 지도자로 키우는 일에 헌신하였다.
 
=====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독교 비판 =====
이렇듯 이상재는 너그럽고 밝은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옳지 못함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 실례로 [[1923년]] 이상재는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여, 당시 조선 [[개신교]] 교회에서 선교사들과 조선인 신자들이 대립하게 된 원인인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하였다.
 
{{인용문2|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이다. [[하느님의 나라|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어떤 경계도 초월한다. 그러므로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자.<ref>《[[기독교사상]]》2005년 9월호, 무엇이 이 시대의 복음이고 선교인가:선교의 반성과 오늘의 방향성 모색,한규무, 대한기독교서회 p.56</ref>}}
 
그는 일부 개신교 선교사와 교인들의 오만함과 독선이 사회적인 분열과 갈등을 야기할 것이라 예견하였고, 이해와기독교 정신인 관용과 사랑으로 감싸려고 노력하자고 권고하였다. 그의 이런 예견은 틀림이 없어서, [[사회주의]]가 본격 조선에 도입된 [[1920년]]대초에 이르러 대다수 [[기독교인]]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세력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난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인민의 아편]]([[마약]], [[진통제]]), [[미신]]이라 비판하고, 기독교계는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대화와 협력을 할 수 없는 사탄인양 취급을 했다. 하지만 소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기독교사회주의|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협력과 대화를 생각했고, 몽양 [[여운형]] 선생처럼 기독교계의 사회운동이 한계가 있음을 직시하여 사회주의로 전향하는 이들도 있었다.(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이덕주 지음/홍성사)
 
==== 교육, 강연 활동 ====
177번째 줄:
[[105인 사건]]의 실패 이후에도 [[조선총독부]]는 통치에 부정적이었던 [[기독교]] 단체들을 타도할 계획을 꾸몄다.
 
[[1920년]] [[9월]]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에 [[권성영]](權聖英)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상을 당하자 아침 저녁으로 상식(上食)을 했다.<ref name="sangn184">전택부, 《이상재 평전》 (범우사, 2002) 184페이지</ref> 그러던 중 남편이 [[예수교]] 신자가신자(우리나라에 개신교는 예수교를 음역한 말인 [[기독교|야소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음)가 되면서부터, 성서말씀을 엄격하게 해석하여 조석 상식이 [[미신]]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엄금하게 하였다. 아내는 남편에게 애원도 하고 설득도 해봤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므로 차라리 죽음으로써 불효의 죄를 갚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 생각하고는 자결하였다.<ref name="sangn184"/>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부모의 신주(神主) 앞에 절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부모에게 1년에 한 번씩 세배 드리는 것마저 [[우상]] 숭배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는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범하는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ref name="sangn184"/> 이 일로 서구의 [[미신]]이 조선을 짐승 사회로 만든다며 [[기독교]]에 대한 [[유교]]의 [[기독교]] 성토가 이어졌고, [[사회주의]]자들 역시 [[기독교]]의 배타성과 맹신을 집중공격했다. 민족대표 33인에 [[장로교]] 장로인 남강 [[이승훈 (1864년)|이승훈]] 선생 등이 참여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했던 [[기독교]] 단체를 타도하려 했던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성토를 부추기거나 수수방관하였다.
 
이 사건은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9월 1일]]자 [[동아일보]]<ref name="sangn184"/>에 '애매 무리한 [[기독교]]의 희생자, 남편이 예수교를 믿고 상식을 폐한 결과 마누라가 대신 죽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ref name="sangn185">전택부, 《이상재 평전》 (범우사, 2002) 185페이지</ref> 이후 사회에서는 기성 교회에 대하여, 특히 선교사들에 대하여 비난의 소리가 빗발쳤다.<ref name="sangn185"/> [[안티 기독교|반기독교]]적 시위와 항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그는 [[기독교]]의 본질이 부모를 공경하고 조상에게 예를 표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며 해명하였다.
197번째 줄:
[[1922년]] [[신흥우]], 이대위(李大偉), [[김활란]], 김필례(金弼禮) 등 YMCA대표단을 인솔, 북경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기독학생연맹(WSCF)]] 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YMCA가 단독으로 국제 YMCA연맹에 가입을 허락해줄 것을 각국의 YMCA 대표자들에게 설득 호소하고, 일본 YMCA 대표단과 담판하여 한국 YMCA가 단독으로 국제 YMCA에 가입케 하고, 독자적으로 국제 YMCA 행사에 참여하게 하여 한국 YMCA의 국제 YMCA 가입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물산장려운동·절제운동·지방전도운동·창문사운동 등을 지도했다. 24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퇴하였다.
 
[[1925년]] [[2월]] 손자 [[이홍직|홍직]]이 공부한 [[감리교]] [[고등학교]]인 [[배재고등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조선총독부]] 총독과 [[일본인]] [[경기도지사]]의 축사를 대신 낭독한 [[한국인]] 직원들의 낭독 이후, 내빈 대표로 축사를 낭독할 때 그는 "여러분, 조선말 들으실 줄 아시오? 나는 일본말을 몰라서 조선말로 하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11900329101013&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2-01-19&officeId=00032&pageNo=1&printNo=14292&publishType=00010 여적]</ref>"라며 한글로 축사를 낭독하였다.
 
==== 신간회 회장 추대와 임종 ====
[[파일:월남 이상재 사회장.jpg|썸네일|270px|right|[[1927년]] [[4월 7일]], 이상재 사회장. 당시 그의 장례행렬은 수 많은 인파가 몰렸다.]]
 
1925년 4월 15일 제1회 전국기자대회가 열리자 의장에 피선됐고,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이념을 초월한 각계 인사가 모여 [[신간회]]를 결성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상재는 당시 병석에 누워 있었으나 [[신간회]] 회장직을 수락했다.
 
만년에 노환으로 고생하다가 말초신경에 부종 증세로 고생하였으며, [[1927년]] [[3월 19일]]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다.
257번째 줄:
풍자와 기지가 넘쳐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어하였다. 그 근거로 계몽사에서 만든 이상재 전기에는 이상재 선생이 풍자와 경구로써 부당한 현실에 저항한 재담가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나온다. 이상재 선생은 신사유람단에 따라갔을 때 일제가 총과 칼을 보여주며 힘을 자랑하자 "[[칼]]로 일어서면 칼로 망한다."는 [[예수]]가 [[로마제국]]의 [[군국주의]]를 논박하기 위해 한 말([[마태복음서]] 26:52)을 인용했고, [[을사오적]]들에게는 "대감들, [[일본]]에 가시지요. 당신들 나라 망하게 하는데 재주가 있으니 말이오"라고 독설을 보여주었다.
 
[[서재필]]은 월남의 부음을 듣고 조선일보에 한 기고에서 "그는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ref name="seos">[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1030170346 조선일보 사장열전/①월남 이상재 선생] 조선일보 2001.03.01</ref>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세상을 풍자하는 해학은 동방삭을 앞섰고, 슬플 때는 굴원을[[굴원]]을 생각하게 한다"며,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고 일신은 근심하지 않아 머리는 희고 마음은 붉었다"고 평하였다. [[윤치호]]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인 분"이라고 평하였다.
 
교육자 겸 정치인 [[김동길]](金東吉)은 그의 "솔직함과 가식이 없음<ref name="ga01">[http://www.dgn.or.kr/news/articleView.html?idxno=5289 자연스럽기를 바랍니다]</ref>"을 높이 평가했다. [[김동길]]에 의하면 "월남 이상재가 한 시대에 우뚝 선 거물인 까닭은 범사에 솔직하고 가식이 없고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보여주신 어른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ref name="ga01"/>"고 평하였다.
 
== 일화 ==
이상재가 강연회와 [[기독교]] 선교 활동을 다닐 때는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헌병과 순사들이 들어와 그를 감시하고 강연내용을 주시했다. 겨울의 어느 강연에서 그는 개나리꽃이[[개나리속|개나리꽃]]이 활짝 폈다고 일갈했다. 당시 순사와 헌병의 제복이 황색인 점을 착안, 개는 황색 제복이었고, 나리는 헌병을 조롱했던 것이다.
 
[[경술국치]] 직후, 어느 저명 인사가 자발적으로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였는데 이토(伊東)라 하였다. 그의 개명 소식을 듣고 이상재는 그 인사의 집 대문에 가서 용변을 보았다. 그 인사가 이상재에게 항의하자 너는 이 똥과 같은 놈이라고 조롱하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