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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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후 새 사회 건설에 들어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자체의 간부를 육성하는 것은 당시의 절박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의 결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해방 직후 고등교육을 받은 민족 인텔리가 매우 적었으며, 주민의 절대 다수가 문맹상태에 있었다. 해방 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한 개의 대학도 없었으며 몇 개의 전문학교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나마 일반서민의 자녀들은 그러한 학교에 다닐 기회가 없었다.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여러 분야의 인재를 양성할 대학들을 한꺼번에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종합대학을 먼저 창립하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우선 종합대학을 설치하고 그것을 모체로 하여 많은 대학을 설치하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해방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첫 대학을 창설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1945년 11월에 대학건설기성회를 결성하였다.
 
1946년 5월 25일 종합대학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종합대학 창립사업이 전 주민의 운동으로 전개 되었다. 1946년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대학을 설치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법령 40호를 발표하였다. 법령 서문에서 [[김일성]]은 ‘진보적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인민경제와 문화를 건설할 지도력 있는 고등기술인들을 발달시키는 것을 중요시하여’ 대학을 설치한다고 밝혔고, [[1946년]] [[10월 1일]] 창립을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