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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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종합대학 교육에서 어려운 문제의 하나는 교원, 학생 대열을 꾸리는 문제였다. 미래의 인재양성을 하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952년]] 초에 전선에 나간 교원, 학생들을 소환하여 종합대학에서 다시 학습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종합대학 학생수는 [[1951년]]에는 848명, [[1952년]]에는 995명, [[1953년]]에는 1,049명으로 늘어났으며, 이조병제사(李朝兵制史)비롯한 인문과학연구논문들을 많이 내놓았다.
 
[[6·25 전쟁]] 중 월북한 유명인사 중 상당수는 그 후 김일성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며 전후 김일성대학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당시 25~45세 사이의 월북자들은 [[개성]]에 설치된 송도정치경제대학에서 한반도 통일 후를 대비해 [[남한대한민국]] 통치구도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중앙간부훈련원과 정치학원을 통합하여 설립한 인민경제대학에도 특설반이 설치되어 공산주의 적응교육을 실시하였다.
<ref name=autogenerated1 /><ref>서적 '인민의 대학'/김일성종합대학 출판사, 주체72(1983)~평양</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