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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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넘어옴|다산}}
{{인물공직자 정보
|이름= 정약용(丁若鏞)
|원래 이름 = 丁若鏞
|그림 = Jeong Yak-yong.jpg
|그림설명 = 다산 정약용 초상
|출생일= [[1762년]] [[8월 5일]]
|출생지= [[조선]] [[경기도]] [[광주군 (경기도)|광주부 양주목]] [[초부면]] 마재 <br/> (現 [[대한민국]]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사망일= {{사망일과 나이|1836|4|7|1762|8|5}}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광주군 마재 사저
|본관= [[나주 정씨|나주]]
|학력= [[1783년]]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br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 갑과(甲科) 아원(亞元) 급제
|정당 = 남인 세력
|직업= 문관, 실학자, 저술가
|학력= [[1783년]]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br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 갑과(甲科) 아원(亞元) 급제
|별명 = 호 다산(茶山)
|경력= 문관, 정치인, 실학자, 저술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 [[공학자]], 관료, 사헌부 수찬, 병조참의, 동부승지
|종교= [[유교]]([[성리학]]) → [[천주교]]([[세례명]]: [[세례자 요한|요한]])
|별명 = 호 다산(茶山)
|배우자= [[풍산 홍씨]] 부인
|종교= [[유교]]([[성리학]]) → [[천주교]]([[세례명]]: [[세례자 요한|요한]]) → [[무종교]]
|자녀= 슬하 6남 3녀<br/>(그 중 아들 정학연, 아들 정학유)
|배우자= [[풍산 홍씨]] 부인
|부모= [[정재원]](부)<br/> [[해남 윤씨]] 부인 윤소온(모)<br/>[[의령 남씨]] 부인(전모)<br/>김씨 측실(서모)
|자녀= 슬하 6남 3녀<br/>(그 중 아들 정학연, 아들 정학유)
|형제= 첫째 형 [[정약현]], 둘째 형 [[정약전]], 셋째 형 [[정약종]]
|부모= [[정재원]](부)<br/> [[해남 윤씨]] 부인 윤소온(모)<br/>[[의령 남씨]] 부인(전모)<br/>김씨 측실(서모)
|친인척 = 조부 정지해 <br> 숙부 정재운 · 정재진 <br> 사돈 심오 <br/> 매부 [[이승훈 (1756년)|이승훈]] <br> 처남 이복형 [[이벽]] <br> 외사촌 [[윤지충]] <br> 손자 정대림 · 정대무 · 정유역
|형제= 첫째 형큰형 [[정약현]], 둘째 형 [[정약전]], 셋째 형 [[정약종]]
|친인척 = 조부 정지해 <br> 숙부 정재운 · 정재진 <br> 사돈 심오 <br/> 매부 [[이승훈 (1756년)|이승훈]] <br> 처남 이복형 [[이벽]] <br> 외사촌 [[윤지충]] <br> 손자 정대림 · 정대무 · 정유역
|국가 = 조선국
|직책 = 사헌부 수찬
|군주 = [[조선 정조|조선 정조 이산]]
|임기 = [[1792년]] [[2월 1일]] ~ [[1794년]] [[6월 1일]]
|웹사이트=
}}
[[파일:Geojunggi.png|200px|섬네일|[[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거중기]]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1762년 [[음력 6월 16일]]) 조선국 광주군 양주목 초부면 마재 출생 ~ [[1836년]] [[4월 7일]](1836년 [[음력 2월 22일]]) 조선국 경기도 광주군 마재 사저에서 별세.)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조선국 사헌부 수찬 등을 지냈다.

본관은 [[나주 정씨|나주]], [[자 (이름)|자]]는 미용(美庸), [[호 (이름)|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6JOc_A1762_1_0012162}}</ref>
 
== 생애 ==
=== 마재 향리에서의 유년 ===
==== 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다. ====
[[1762년]] [[8월 5일]](영조 38년 [[음력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부]] 초부면 마재(마현(馬峴),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이 태어난 곳은 오늘날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므로, 현재 남양주시에서는 정약용이 남양주시 출신임을 [[지하철]] [[광고]] 등으로 선전하고 있다.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정재원(1730년)|정재원]]에게서 학업하였다.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윤선도|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해남 윤씨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며, 약용은 넷째 아들이었다.
 
==== 글을 쓰다. ====
일곱 살 때 '바다'라는 [[시 (문학)|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는데,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내었다. 삼미(三眉)라는 별명은 어릴 적에 걸렸던 천연두가 나으면서 생긴 흉터 때문에 눈썹이 세 개 생겼다는 뜻이다. 9세 때 모친상을 당해(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맏형수 [[경주 정씨]]와 서모 또는 새엄마 김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사가 명의였던 [[이헌길]]의 진료로 인하여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을 구한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에 승지 혼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 (1756년)|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은 조선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이익 (학자)|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 청년기. ====
[[1776년]] 결혼하던 해에 부친 정재원이 벼슬길에 다시 나가게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 살게 되었다. 15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19세 때는 [[예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같은 해 음력 9월 장남 학연이 태어났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3세 때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25세 때 차남 학유가 태어났다.
 
==== 대과 급제. ====
[[1789년]](정조 13년),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조선 정조|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 검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시|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30세이던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죽는다.
==== 성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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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 : [[풍산 홍씨]](1761~1839) :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에 혼인하였으며 10번 잉태하여 첫 잉태 때 유산하고 6남 3녀를 낳았지만 4남 2녀가 요절하였는데 요절한 자녀들은 대부분은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 장녀 : 4일만에 사망(1781.7 ~ 1781.7)
** 장남 : [[정학연]](丁學淵, 1783.9.12~1859) : 아명은 무장(武䍧) · 무아(武兒), 초명 후상(厚祥), 자는 치수(穉修)
*** 손자 : [[정대림]](丁大林, 1807.5.28~1895) : 진사, 현감. 자는 사형(士衡)
*** 손녀 : [[청풍 김씨]] 김형묵(金亨默)에게 출가
** 차남 : [[정학유]](丁學游, 1786.7.29~1855) : 아명은 문장(文䍧) · 문아(文兒), 초명은 학상(學祥), 자는 치구(穉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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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
* 《[[다산 정약용 (드라마)|다산 정약용]]》([[MBC]], [[1983년]], 배우:[[정욱 (1938년)|정욱]])
* 《[[만남 (1988년 드라마)|만남]]》([[MBC]], [[1988년]], 배우:[[권성덕]])
* 《[[파문 (드라마)|파문]]》([[MBC]], [[1989년]], 배우:[[전국환]])
* 《[[소설 목민심서]]》([[KBS2]], [[2000년]], 배우:[[이진우 (배우)|이진우]])
* 《[[이산 (드라마)|이산]]》([[MBC]], [[2008년]], 배우:[[송창의]] (67회~7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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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성론(人性論)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기호(嗜好)라는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주장하고, 사람에게는 도의지성(道義之性)과 금수지성(禽獸之性)의 양성(兩性)이 있음을 밝혀 이들 양자간의 갈등을 인정하였다.
* [[인물성동이논변]](人物性同異論辨)에 있어 [[한원진]]의 인물성이(人物性異)를 지지하면서도 기질(氣質)의 성(性)은 같되 본연의 성은 다르다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주자학의 기질지성청탁수박설(氣質之性淸濁粹駁設)을 부정하였다.
* [[주자]]의 [[이기론]](理氣論)을 전면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양기설(養氣說)을 다시 주장하고 이를 목민(牧民)사상과 연결지었다연결 지었다.
 
* 역리(易理)의 성립과정을 합리적·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음양(陰陽) 64괘(卦) 등을 미신적인 교리(敎理)로 보는 데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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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 토지정책 ===
1755년 사형당한 유수원 선생이 <우서>에서 비판한 대로, 다산 당시 농토의 100%를 사대부가 독점하여 평민들은 모두 소작농이었다. 이 상태는 일제강점기까지 계속되었다. 1944년 일제의 통계는 전국 농토의 64%가 소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36%는 사대부가 머슴들을 부려 직접 경작한 것이다. 이는 조선 사대부 계층이 일제와 협력했다는 증거다. 다산의 <전론>에 따르면 당시 인구 800만 추정(백골포 징수로 사망신고를 해도 산 사람으로 처리하여 세금을 징수 하는징수하는 등으로 정확한정확하지 않은 투정 불가) 농토가 800만결이었다. 일 가구당 1결이 되어야 굶어죽지 않는다. 다산의 추정에 따르면 사대부 1인이 평균 990명분의 농토를 차지하였고, 영남의 최씨와 호남의 왕씨는 3990명이 소유할 농토를 독점하고 있었다. 사대부는 소작인에게 세금까지 부담시켰다. 소작료는 평균 소출의 25%였으나 30%까지 올랐다. 당쟁과 홍경래의 난 등으로 당재에 패한 양반들과 난에 가담한 평민들이 노비계층으로 떨어져 헌종 때는 노비의 인구비중이 35%에 달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노비제도가 없어져 노예의 신분에서는 벗어났지만 빈곤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리승만의이승만의 토지개혁을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토지정책이라 할 수 없듯, 다산의 정책건의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부를 수 없다.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토지의 무상 분배, 공동 노동-공동 분배를 함으로써 토지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한 [[사회주의]] 토지 정책인 [[여전론]]과 [[정전론]]을 상상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정전론은 토지를 우물 정(井)으로 나누면 모두 9구역의 땅이 나오는데, 이중 8구역은 8명의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농사를 짓도록 하고, 1구역은 공동 노동을 하여 국가공동체의국가 공동체의 복리를 위한 비용인 [[세금]]을 내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전론은 여(이문 여,閭)를 농민들이 공동 노동, 공동 분배하는 사회주의 토지정책이다. 그렇지만 일한 만큼 나눠주는 정책이니 현재 북한과 같은 토지정책은 아니다.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점진적인 방법이 [[1819년]]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군에서 유배를 할 때에 상상한 정전론이다.<ref>《교실밖의 국사여행》/역사학 연구소/사계절 164쪽.</ref>
 
=== 청렴하고 평등한 경제 ===
다산의 사상을 연구하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에 의하면, 다산 선생은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公廉)으로써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손부익빈(損富益貧)으로써 소득불평등을 풀어가고자 했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을(4대 궁인(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노약자, 어린이, 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은 환우, 재난피해자)사회와 국가에서 배려하는 애민(愛民)사상으로써 조선이 [[복지 국가|복지국가]]가 되기를 바랐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33488.html|제목=“다산 정약용, 200년 전에 이미 국민저항권 지지”|날짜=2018-02-24|언어=ko|확인날짜=2018-02-28}}</ref>
 
=== 과학기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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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 저서 ===
이른바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주요 저서로 꼽힌다.
* 《[[목민심서]]》 :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목민관(牧民官, 수령)의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감계(鑑戒)가 될 만한 마음가짐과 태도 등을 저술한 책 이다책이다.
* 《[[흠흠신서]]》 : 곡산부사로 재직할 때 실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서술한 판결과 형벌 및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에 관한 책으로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을 가벼이 처리하지 않도록 유의할 점을 적었다.
* 《[[경세유표]]》 : 관제·군현제와 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거제·해세(海稅)·상세(商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準則)이 될 만한 것을 논정(論定)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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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과회통]]》
* 《삼미자집(三眉子集)》 : 정약용이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다가 나았는데, 그때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렸다. 이 《삼미자집》은 정약용이 10세 이전에 지은 글을 모은 문집이다.
* 《[[물명고]]》
 
=== 편지모음편지 모음 ===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1년]]부터 [[1818년]]까지 장기와 [[강진군|강진]]에서의 유배길에 올랐을 때에, 두 아들(학유,학연)에게 보낸 [[편지]], 부인이 결혼할 때에 입은 [[치마]]에 써내려간 시(히피첩[[하피첩]]), 따님에게 보낸 시화집을 [[창비]]에서 출판했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석무 편역/창비<ref>{{웹 인용|url=https://magazine.changbi.com/authors/3332/?board_id=417|제목=박석무 {{!}} 계간 창작과비평|언어=ko|확인날짜=2018-02-26}}</ref>)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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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조선 정조|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가 [[홍국영]]의 증조부뻘, [[혜경궁]]에게는 할아버지(조부)뻘이 된다.
 
홍이상의 둘째 아들 [[홍영]](1584년생)과 넷째 [[홍탁]](1597년생)은 13년 나이차였고, 홍영의 증손자 [[홍중기]](홍만용의 아들)와 홍탁의 손자 홍만기가 동갑이었고, 홍탁의 손자 홍만기는 40세가 다된다 된 늦은 나이에 아들 홍중후를 봤다. 홍중후는 1687년생으로 8촌인 홍중해([[홍국영]]의 고조부), 홍중기([[혜경궁 홍씨]]의 증조부)와는 29세와 38세의 나이차이가나이 차이가 난다. 따라서 같은 친척임에도 항렬차가 많이 나게 되었다.
 
== 사진 ==
줄 235 ⟶ 248:
* [[정약종]]
* [[정약현]]
* [[정해인]]
* [[황사영]]
* [[이승훈 (1756년)|이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