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산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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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사 경찰서는 한국인 다수가 살상되었다는 허위정보를 제공하였으며, 조선 내 신문들은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오보를 하면서, 조선 내에 거류하는 중국인을 적대시하는 운동을 도발시켰다.<ref>《조선일보》, 1931.7.2., 《경성일보》, 1931.7.4.</ref> [[조선일보]]는 7월 2일 호외로 '만보산에서 중국농민과 조선농민이 충돌해 많은 조선인이 피살됐다'는 보도를 했다. 이는 조선일보의 장춘지국의 조선인 기자 [[김이삼]]이 전한것으로 그는 이 정보의 진위를 가리지 않고 타전했다. 이 때문에 [[인천]]을 필두로 경성·원산·평양·부산·대전·천안 각지에서 수천 명이 참가하는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으며, 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는 등 잔인한 폭력사태로 확산되었다. 일제는 조작된 기사를 보도하게 하였고, 부산과 천안에서 불량배를 매수하여 폭력행위를 조장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동아일보]]》 등이 오보임을 알리고 진정을 호소하는 보도로 7월 10일 이후로 진정되었으며, 이후로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수가 급감하였다.
이상하게도 첫 보도를 내었던 조선일보 기자 김이삼은 정정보도와 사죄문을 조선일보에 발표한 다음날 조선인에게 피살되었다. 김이삼이 일본의 특무기관에 의하여 살해당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충돌로 인해 127명(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만 94명)의 중국인 사망자가 있었으며, 부상자가 400명이었고 손해는 250만 원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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