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다중계정자의 독자연구 복구
1번째 줄:
{{다른 뜻|한명회 (드라마)||[[한국방송공사]]의 대하 [[드라마]]}}
{{공직자인물 정보
|이름 = 한명회(韓明澮)
|원래 이름 = 韓明澮
|출생일= [[1415년]] [[음력 10월 25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조선]] [[경기도]] [[광주목]] 언주면 압구정리
|사망일= [[1487년]] [[음력 11월 14일]] (73세)
|국적= [[조선|조선국]]
|국가 = 조선국
|군주 = [[조선 예종|조선 예종 이황]]
|필명=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狎鷗)·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 별명은 장량, 칠삭동이, 작위는 상당군, 상당부원군, 시호는 충성(忠成)
|정당 = 훈구파 세력
|학력= 한학 수학
|직업= 문신
|경력= 문신, 군인, 사상가, 작가, 시인, 정치인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
|배우자= 정실 여흥 민씨 부인<br/>첩 연일 정씨(정종화의 딸)<br/> 첩 전주 이씨(선천공조의 딸)<br/> 첩 연일 정씨(정종성의 서녀)<br/> 첩 이름 미상
|자녀= 아들 한보, 딸 [[공혜왕후]], [[장순왕후]], 딸 한씨, 한씨, 아들 한복(韓福), 한임(韓林), 한수(韓壽), 한목(韓睦), 한석(韓碩), 한서(韓恕), 한우(韓佑), 한온(韓瘟), 딸 한씨(韓氏), 한씨(韓氏), 한씨(韓氏)
|부모= [[한기]](부)<br/>[[여주 이씨]] 부인(모)<ref>이조참판 겸 직제학 [[이척 (조선)|이척]]의 딸 [[여주 이씨]] 부인</ref>
|직책 = 영의정 겸 섭정승
|임기 = [[1469년]] [[1월 31일]] ~ [[1469년]] [[2월 20일]]
|친인척= [[한상질]](할아버지), [[한확]](친족), [[소혜왕후]](친족), [[조선 세조|세조]](사돈), [[조선 예종|예종]](사위), [[조선 성종|성종]](사위)
|서명= 한명회 서명.jpg
|웹사이트=
}}
'''한명회'''(韓明澮, [[1415년]] [[11월 26일]]([[음력 10월 25일]]) ~ [[1487년]] [[11월 28일]]([[음력 11월 14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1475년에서 1476년까지 1년간 조선국 상급 국상 지위를 지낸 그의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ref>7개월만에 출생하여 생애 초기에 칠삭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ref>,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일찍이 [[조선 태조]]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자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의 아들이고, 이조참판과 직제학을 지낸 [[여주 이씨]] [[이척 (조선)|이척]]의 외손자이자 [[대제학]] 이행의 증외손이다. [[조선 예종|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조선 성종|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상환(韓尙桓), 류태재(柳泰齋)의 문인이다. [[한성부]] 출신.
'''한명회'''(韓明澮, [[1415년]] [[11월 26일]]([[음력 10월 25일]]) 조선 한성부 출생 ~ [[1487년]] [[11월 28일]]([[음력 11월 14일]]) 조선 경기도 광주목에서 별세.)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조선국 영의정 겸 섭정승 등을 지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ref name="park115">{{서적 인용|author=박영규|date=1996|title=,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publisher=》 (도서출판 들녘|page=115}}, 1996) 115페이지</ref>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조선 세조|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조선 세조|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1466년]]~[[1467년]], [[1469년]]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러나 후일 [[종묘]] 세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ref>7개월만에 출생하여 생애 초기에 칠삭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ref>,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일찍이 [[조선 태조]]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이자 [[증직|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의 아들이고, 이조참판과 직제학을 지낸 [[여주 이씨]] [[이척 (조선)|이척]]의 외손자이자 [[대제학]] 이행의 증외손이다. [[조선 예종|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조선 성종|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상환(韓尙桓), 류태재(柳泰齋)의 문인이다. [[한성부]] 출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ref name="park115">{{서적 인용|author=박영규|date=1996|title=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publisher=도서출판 들녘|page=115}}</ref>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조선 세조|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조선 세조|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1466년]]~[[1467년]], [[1469년]]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러나 후일 [[종묘]] 세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오가작통법]]과 [[면리제]](面里制)를 창시한 인물이며, 그가 만든 행정제도인 [[면리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한말의 [[불교]][[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은 그의 친아우인 [[한명진 (1426년)|한명진]]의 후손이었다.
 
== 생애 ==
 
=== 초기 활동 ===
줄 73 ⟶ 65:
 
==== 집권 계획 준비 ====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ref name="park115">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8) 115페이지</ref>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 (1383년)|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이 집권하자,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자주 만나며 집권 계획을 역설,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추천하여 그의 심복을 삼게 하였다.
 
그는 [[권람]]에게 집권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줄 186 ⟶ 178:
[[1472년]] 영[[춘추관]]사로서 최항(崔恒)·신숙주 등과 함께 참여한 《세조실록》을 완성시켰으며, 그해 성종에게 학문을 진작, 장려할 것을 건의하였고,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확충을 위하여 경사(經史)관계의 서적을 많이 구하여 성균관에 기증, 비치하게 하였다. 또한 명륜당(明倫堂) 북쪽에 새 전각을 마련하고 추가로 장서를 마련할 공간을 만들 것을 건의하고 직접 이를 감독하였다.
 
== 생애 후반 ==
==== 좌의정 재임명 ====
[[1474년]](성종 5년) 다시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다. [[1475년]] 초 사은사(謝恩使)로 연경(燕京)에 가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줄 196 ⟶ 188:
조정에서 [[평안남도]] 병영을 폐지하려는 의견이 강해지자 그는 직접 나서서 이를 강하게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 해임과 군사 활동 ====
 
 
 
그는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성종의 만류로 치사를 못하다가 [[1476년]](성종 7년) [[좌의정]]직과 [[병조판서]]에서 해임되었다.
줄 215 ⟶ 209:
또한 그는 [[두만강]]과 [[압록강]]에 장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다. '조종조(祖宗朝)에 압록강 연안에 위아래로 장성(長城)을 쌓으려고 하다가 일이 커서 이루지 못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다시 그 일을 거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하니, [[조선 성종|성종]]은 [[의정부]][[좌의정]] [[홍응]](洪應)을 파견하여 성곽의 수축, 개보수를 감독하게 했다.
 
==== 국가 원로 활동 ====
{{참고|압구정}}
[[1480년]](성종 10년) 가을에 부원군직을 사임하려 하였으나 [[조선 성종|성종]]이 승낙치 아니하고 성종이 어찰(御札)을 보내 " 국가의 공적이 여러 세대에 이르고 재주와 식견은 한 세대를 앞서 갈 만큼 밝으며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나라 근심으로 염려하여 논의하면 반드시 적중하였다. 원로가 조정에 있음은 나라의 영광이며,믿는 신하가 힘을 다함은 임금에게 힘과 의지가 되는도다. 아무리 오래도록 병에 시달리더라도 많은 약을 내리니 힘써 치료하여 내 뜻에 부응하라. 그러면 경도 노년에 편안함이 있고 나도 옛 것을 버리고 허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사퇴를 만류하였다. [[1483년]] [[경상도]]에 저수지를 만들어가뭄을 대비하였다.
줄 233 ⟶ 227:
그는 자연을 벗삼겠다 하였으나 시중의 학자들은 권력과 벗삼았다며 조소하였다. [[한강]] 남쪽에 지은 그의 정자와 별장은 화려하기로도 이름높았다.
 
== 몰락과 죽음 ==
==== 생애 후반 ====
그는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측근이 된 이후 계속 [[조선 세조|세조]]의 책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고, 세조의 즉위 이후 성종조까지 고관요직을 역임, 군국대사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세조는 특히 그를 총애하여 "나의 장량(張良)" 이라고까지 하였다. 또한 가난한 환경에서 어렵게 성장했지만 스스로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차례나 공신으로 책록되어 가세를 일으키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말년에는 권력과 함께 호부(豪富)를 누렸다.
 
줄 241 ⟶ 235:
[[1484년]](성종 14년) 70세가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한편 그의 정자 [[압구정]]이 화려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명나라]] 사신과 [[일본]]의 사신들이 와서 구경하려 하자, 그는 궁중에서만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쳐서 화려하게 꾸미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성종|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이에 노골적으로 좋지 않은 기색을 보이게 되었다. 이어 [[대간]]과 [[사헌부]]로부터 무례하다는 이유로 탄핵 대상이 되어 외지로 유배되었으나 배소로 가던 도중 사면되어 곧 풀려났다.
 
==== 은퇴와 최후 ====
[[1484년]](성종 14년) 세자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니 황제가 '충직한 노한이 또 다시 왔다'면서 금전(金錢)과 채단(彩緞, 채색한 비단)을 선물하였다. 이후 사재를 털어 [[도서관]]을 마련하여 유생들에게 한문을 권하였고 [[1485년]](성종 15년)에 병을 이유로 [[치사]]를 청하였으나 [[조선 성종|성종]]이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성종에게서 [[지팡이]]와 의자를 선물로 하사 받았다. 그러나 [[1485년]]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불러서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줄 262 ⟶ 256:
[[2000년]] 그의 묘소가 도굴되어 지석(誌石) 등이 유출되었으나 [[2009년]] 6월 도굴범들은 검거되었다.<ref>[http://cheon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4503015&local=cheonan 한명회 지석] "디지털천안문화대전"</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3008038 청주한씨 종친회, '한명회 지석' 천안 박물관에 기탁] "뉴시스 2009년 12월 21일자 기사내용"</ref>
 
== 평가와 비판 ==
 
[[조선 성종|성종]]때 이후 [[사림]]의 정계진출 이후 도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그가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주도한 점이 집중 부각되어 비판과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 가족 관계 ==
정실 부인 민씨와 여러 첩이 있었으나, 첩실의 존재는 네 명이 확인되고 있다. 이 중 정종화(鄭宗和)의 딸 연일 정씨와 전주 이씨는 [[조선 세조|세조]]가 특별히 [[정경부인]]에 봉작하였으므로, 이후 정식 부인으로 대우하게 되었다.
 
줄 316 ⟶ 310:
** 사위: 홍갑생(洪甲生)
* 첩: 연일 정씨, [[정종성]](鄭宗誠)의 서녀, [[정보 (조선)|정보]]의 서매, 포은 [[정몽주]]의 서손녀(庶孫女)
* 첩: 창녕성씨, 성수량(成守良) 의 서녀
* 장인: [[민대생]](閔大生, 1372 ~ 1467) - 단종비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이다.
* 장모: 양천 허씨, 찬성(贊成) 허선의 딸
줄 322 ⟶ 316:
* 당숙모: 한씨
 
== 한명회를 다룬 작품 ==
===; 드라마 ===
* 《[[설중매 (드라마)|설중매]]》 ([[MBC]], [[1984년]]~[[1985년]] 배우: [[정진 (1941년)|정진]])
* 《[[파천무 (1990년 드라마)|파천무]]》 ([[KBS]], [[1990년]]~[[1990년]] 배우: [[주호성]])
줄 334 ⟶ 328:
* 《[[인수대비 (드라마)|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배우: [[손병호]])
 
===; 영화 ===
* 《[[칠삭동이의 설중매]]》 ([[1988년]] 배우: [[정진]])
* 《[[관상 (영화)|관상]]》 ([[2013년]] 배우: [[김의성]], [[우상전]])
* 《[[광대들: 풍문조작단]]》 ([[2019년]] 배우: [[손현주]])
 
===; 연극 ===
* 이창수 - [[2005년]] 《길》, 연극
* 박정순 - [[2008년]] 《길》, 연극
 
== 사상과 치적 ==
=== 오가작통법과 면리제 ===
{{참고|오가작통법}}
줄 358 ⟶ 351:
[[1464년]](세조 10년)에는 [[평안북도]] [[의주]]의 하류에는 진보(鎭堡)가 설치된 곳이 없는 점과 희천(熙川)과 영흥(永興)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점을 들어 의주에 새로이 진을 설치하고, 희천과 영흥 사이에는 새 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인산진(麟山鎭)과 훗날의 영원군(寧遠郡)을 설치하게 했다. 또한 [[조선 성종|성종]] 즉위 초, [[두만강]]과 압록강변에 성곽을 쌓을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 기타 ==
세조는 나의 장량이라고 할 정도로 그를 총애했으며,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획득하기도 했다.<ref name="park116"/> 서울의 압구정동은 그가 만년에 여생을 보낼 목적으로 세운 정자이자 그의 아호인 압구정에서 유래한 지명(地名) 이름이다.
 
줄 365 ⟶ 358:
야사에 의하면 그의 외모는 얼굴이 아래가 너무 넓게 퍼지고, 위는 좁고 뾰죽하여 마치 손으로 잡아 늘인 듯 길쭉한데다, 주먹코에 눈은 크고 눈동자가 바로 잡히지 않은 사팔뜨기로 극히 못 생겼었다고 전한다.
 
== 정보와의 관계 ==
[[1456년]] [[6월]]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정보 (조선)|정보]]는 서매제인 한명회를 찾아가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한명회가 이를 들어주지 않자 [[정보 (조선)|정보]]는 천추의 악인이라며 규탄하였다. 그해 12월 한명회가 그를 난언죄(亂言罪)로 고발하여 죽음을 받게 하였다.<ref name="정보1">[http://www.sugmo-jeon.co.kr/haenglog/haenglog-jeongbo.htm 정보(鄭保)<!-- 봇이 붙인 제목 -->]{{깨진 링크|url=http://www.sugmo-jeon.co.kr/haenglog/haenglog-jeongbo.htm }}</ref>
 
줄 372 ⟶ 365:
[[조선 단종|단종]] 복위를 꾀한 성삼문, 박팽년을 변호하여 세조가 직접 신문할 때에 “일찍이 성삼문.박팽년 등을 정인군자(正人君子)라고 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말을 하였다.”라고 하여 환열(轘裂)을 명하였다가, 세조는 [[정보 (조선)|정보]]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손자임을 감안하여 정상을 참작, 죄질을 한 등급 감하여 감형, 연일(延日)에 유배시켰다.<ref name="정보1"/>
 
== 장순왕후와 공혜왕후 ==
그는 [[조선 세조|세조]]와 그의 장남이자 자신의 사위인 [[조선 예종|예종]]의 형인 [[조선 덕종|의경세자]]와도 이중 사돈관계를 형성하였다. [[조선 예종|예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는 그의 셋째 딸이고, [[조선 성종|성종]]의 원비 [[공혜왕후]](恭惠王后)는 넷째 딸로, 이들은 친정 자매간이면서 시가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관계가 된다.
 
[[폐비 윤씨]]와는 먼 인척이었다. 둘째 사위 신주(申澍)의 아버지 [[신숙주]]는 [[폐비 윤씨]]의 외당숙이다.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이자 금삼을 전한 군부인 신씨는 신숙주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 신주의 당고모가 된다.
 
== 압구정 ==
한명회는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송나라 정승 한충헌의 정자를 흉내내기 위해 명나라 한림원시강 예겸에게 정자 작명을 청하면서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하는 정자를 짓고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노년에도 부원군의 자격으로 여전히 정사에 참여하여 권좌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백성들에게 압구정은 자연과 벗하는 곳이 아닌 권력<ref name="park116"/>과 벗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 정경부인이 된 두 명의 첩 ==
후배 연일 정씨는 통의원사(通議院事) 정종화(鄭宗和)의 딸이며 포은(圃隱) [[정몽주]]의 손녀이니 그가 서북 양도의 관찰(西北兩道 觀察)사로 재직할 때 마음과 몸차림이 단엄한 것을 보고 함께 왔다. [[전주 이씨]] 선천공조의 딸은 아버지의 이름이 정확히 전하지 않는다. 그가 서백(西伯)이 되었을 때 이름 미상의 전주 이씨에게 사위 되기를 위협 받았는데 한명회가 승낙하지 않자, 그가 칼을 들고 사생결단하여 부득이 배필로 취하여 데려왔다.
 
집안에서 상하를 막론하고 두 부인을 부인으로서 대우하지 않았다. 어느 날 [[조선 세조|세조]]가 그의 집에 방문하니 정종화의 딸 정씨, 이씨가 모셔서 술을 나누니 왕이 누구인지 물으니 양 부인이 뜰에 엎드려 그 원통한 사실을 울면서 하소연하자 [[조선 세조|세조]]가 형수(兄嫂)라고 부르며 입시하도록 하여, 특별히 가져온 종이와 먹에 어필로써 직접 써서 교지를 전하고 양 부인에게 정경부인(貞敬夫人)을 봉하는 옥새를 눌러주니 온 집안이 이때부터 양 부인을 괄시하지 않고 부인의 예로써 대했다.
 
== 논란과 의혹 ==
조선왕조실록에왕조실록에 의하면 밀양 사는 박씨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억지로 이혼시키고 조카의 아내가 되게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세조조(世祖朝)에 한명회(韓明澮)가 한언(韓堰)의 숙부로 밀양 사는 박씨가 재산이 많다는 말을 듣고 세조에게 청하여 전부(前夫)와 이이하게 하고 언의 아내로 삼았는데, 성종조에 이르러 무릇 재가(再嫁)한 사족은 청현직(淸顯職)에 서용하지 않게 되자, 홍윤(弘潤)이 형조의 낭관이 되어 대간의 논박을 받고 체직당하였기 때문에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끝내 변명(辨明)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같이 보기 ==
{{col-begin}}
{{col-3}}
줄 470 ⟶ 463:
{{col-end}}
 
== 각주 ==
<references/>
 
== 참고 문헌 ==
* 세종실록
* 문종실록
줄 485 ⟶ 478:
* 연려실기술
 
== 관련 서적 ==
<small>
* 이수광, 《책사 한명회:오백년 조선왕조에 가장 뛰어난 지략가》 (작은씨앗, 2006)
줄 498 ⟶ 491:
</small>
 
== 관련 문화재 ==
* [[한명회 선생 신도비]]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2호
 
== 외부 링크 ==
* {{두피디아|101013000892681}}
* {{브리태니커|b24h2859a}}
줄 512 ⟶ 505: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42700&cloc=rss%7Cnews%7Csociety 한명회, 황보인 사위 될 뻔했다?]{{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42700&cloc=rss%7Cnews%7Csociety }} 중앙일보 2009년 6월 10일자
* [https://web.archive.org/web/20050218212136/http://www.ilyosisa.co.kr/ILYO/176/culture/48-1.html 한명회의 절묘한 '혼맥정치' 30년 권력]
*[[https://www.familysearch.org/ark:/61903/3:1:3QS7-897Q-5S2T-Q?i=4&wc=4X9C-D92%3A1589988323%2C1589982393%2C1589982395%2C1589985116%2C1589982392%2C1589988322&cc=1398522/&#x20;창녕성씨족보 <nowiki>https://www.familysearch.org/ark:/61903/3:1:3QS7-897Q-5S2T-Q?i=4&wc=4X9C-D92%3A1589988323%2C1589982393%2C1589982395%2C1589985116%2C1589982392%2C1589988322&cc=1398522/ 창녕성씨족보]</nowiki>]
* {{글로벌대백과|제목=조선 왕조의 통치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