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쿠 다 가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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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정준비 ===
[[파일:Map of Portuguese Carreira da India.gif|썸네일|300px|계절풍의 변화에 따른 항해 경로]]
카브랄이 이끈 포르투갈 2차 원정(1500~1501)은 브라질 발견, 코친과[[코친]]과 [[칸나노르]] 등과 우호관계 형성등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지만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귀국했다. 13척의 함선이 출발했으나 5척만이 돌아왔으며 많은 선원들을 잃었다. 가장 중요한 임무였던 캘리컷과 무역협정 체결은 실패한 채 [[향신료 무역이무역]]이 가장 크게 번창한 국가이자 인도 말라바르 연안의 지배적 위상을 지닌 도시국가 [[캘리컷]](코지코트)과 적대관계를 형성한 후 귀국하고 말았다.
 
2차원정중에는 캘리컷에 개설했던 교역소(재외상관)가 습격을 당하여 50여 명의 포르투갈인이[[포르투갈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ref>윌리엄 번스타인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하우스 2019.4.10 p277</ref> 이는 4차 원정의 목표중에 하나가 캘리컷에 대한 응징이 되도록 만들었다.<ref> Chroniclers are generally unanimous about the avenging nature of the expedition, e.g. Castanheda, p.130</ref> 4차 원정대는 총 1500명의 인원과 20척의 선박으로 구성되었다. 선박의 대부분은 중무장하였는데, 이는 캘리컷에[[캘리컷]]에 대한 복수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인도 서안지역의 도시국가들과 무역협정을 체결하기 위함이었다.
 
1502년 2월 12일 20척 중 15척의 선발대가 바스코 다 가마의 지휘 아래 인도를 향해 출발하였으며<ref>15척이 먼저 출발하였고 나머지 5척은 4월 1일에 리스본을[[리스본]]을 출발하였다.</ref> 나머지 5척은 4월 1일에 리스본을 출발하였다. 3차 원정대(사령관: 주앙 다 노바)가 아직 귀국하지 않았지만 계절풍을 이용하지 못할 경우에 1년을 지체해야 하기 때문에 출발을 서둘렀다(3차 원정대는 1502년 9월 11일이 되어서야 리스본에[[리스본]]에 귀항하였다.).
 
=== 동아프리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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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의 만행 ====
미리호 사건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인들은 여러 선박을 약탈하고 시체를 매달아 사격 연습을 했으며 현지 통치자에게 시체 토막을 보내면서 카레[[커리]] 재료로<ref name="william"/><ref>Boxer, The Portuguese seaborne Empire,xxiii</ref> 쓰라는 메시지를 동봉했다. 포르투갈인들의 잔인한 행위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도 정도가 심했다.<ref name="william"/><ref>[네이버 지식백과] 바스코 다가마 (인물세계사, 김정미)...그는 먼저 인도 북부에서 이슬람 상선을 잡아 재물들을 빼앗은 후 배를 불태워 버려 몇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수장시켰다. 그 외에도 그의 함대는 이슬람 상선을 상대로 해적질을 일삼았다...(중략)...바스코 다가마는 병사뿐만 아니라 항구에 사는 죄 없는 많은 어부와 상인들마저 대량 학살하였다.</ref> 이런 온갖 만행이 자행된 이유중 하나는 중세 유럽인들의 기본사고가 불신자들은 지옥으로 보내야 마땅하다고 보았이며, 이교도들이란 어차피 사후에 지옥에 떨어질 운명이기에 현세에서 고통을 당한들 동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f name="william"/>
 
==== 캘리컷과의[[캘리컷]]과의 갈등 ====
[[파일:Zamorin of Calicut.jpg|썸네일|캘리컷의 지배자 자모린]]
1502년 10월 18일, [[칸나노르]](Kannur)로 이동하여 교역협상을 한후 10월 29일에 드디어 캘리컷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다가마는 사절을 통해 교역소 습격사건(1500)의 주동자 처벌, 적절한 보상, 이슬람 상인 추방을 요구했다. 무리한 요구에 대해 자모린이 거부하자<ref>Lopes (p. 188) estimates Calicut had 4,000 to 5,000 wealthy Muslim merchant households.</ref> 1502년 11월 1일 포르투갈 전함들이 캘리컷 항에 대해 무차별적인 함포사격을 가하였다. 캐리컷의캘리컷의 육상 대포는 성능과 화력에서 밀려 제대로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아울러 다가마는 생포했던 포로들의 손과 발을 잘라 모욕적인 서신과 함께 자모린에세자모린에게 보냈다.<ref>Lopes (p. 190). The severing of the hands-and-feet is confirmed by Bergamo (p. 117) and the anonymous Flemish sailor (p. 63).</ref> 이틀날 역시 함포사격을 재개하여 항구도시 캘리컷에 심각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참모들이 상륙전 진행을 건의했으나 다가마는 협상의 여지를 남긴채 코친으로[[코친]]으로 주력함대를 이동시켰다. 코친에서는[[코친]]에서는 교역조건에 대해 재협상을 하였고 퀼론(Quilon)과도 거래를 진행하였다. 얼마지나지 않아 캘리컷에서[[캘리컷]]에서 평화협상 의사를 전해왔다. 다가마는 캘리컷으로 이동하여 함상에서 협상을 진행하던중 매복공격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시킨후 그곳을 빠져나왔다.<ref name="william">윌리엄 번스타인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하우스 2019.4.10 p279</ref>  
 
=== 귀국 ===
[[파일:India Malabar Coast locator map.svg|썸네일|인도 말라바르 해안 (주황색)]]
1503년 초에 다가마는 향신료를 싣은 함대를 이끌고 인도를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으며 9월경에 리스본에 도착하였다. 귀국직후 다가마는 코친과[[코친]]과 칸나노르에[[칸나노르]]에 대한 수비대 보강이 절실하다고 국왕 [[마누엘 1세 드 포르투갈|마누엘 1세(재위 1495~1521)]]에게 보고하였다. 또한 그는 귀국시 엄청난 양의 향신료를[[향신료]]를 싣고 왔는데, [[후추]] 1700톤, 계피와[[계피]]와 [[정향]], 메이스, [[육두구]] 400톤 정도였다.<ref>윌리엄 번스타인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하우스 2019.4.10 p280</ref>
 
=== 귀국후 인도상황 ===
다가마가 귀국을 위해 인도를 출발하기전에 외숙부인 비센테 소드레(1465~1503)의 지휘를 받는 5척을 잔류시키며 인도 말라바르(Malabar) 해안 순찰을 강화하여 캘리컷으로부터[[캘리컷]]으로부터 칸나노르와[[칸나노르]]와 코친에[[코친]]에 대한 보호활동에 충실할것을 명하였다.<ref>The 1503 letter of Diogo Fernandes Correia (p. 211)</ref> 다가마가 인도를 떠나자 마자 캘리컷의[[캘리컷]]의 자모린이 코친에[[코친]]에 대해 육로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그러나 비센테 소드레는 이 첩보를 묵살한채 다가마의 명을 어기고<ref>Subrahmanyam, 1997: 229</ref> 함대를 홍해로 이동하여 이슬람 상선을 상대로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4월경 폭풍을 만나 침몰하는 배(에스메랄다 호)와 함께 죽고 말았다.<ref>Mearns, David (14 March 2016). [http://eprints.bournemouth.ac.uk/23370/13/Mearns_et_al-2016-International_Journal_of_Nautical_Archaeology-1.pdf "A Portuguese East Indiaman from the 1502–1503 Fleet of Vasco da Gama off Al Hallaniyah Island, Oman: an interim report" (PDF).] International Journal of Nautical Archaeology. 46 (2): 331–350. doi:[https://onlinelibrary.wiley.com/doi/full/10.1111/1095-9270.12175 10.1111/1095-9270.12175.].......2013년 탐사 작업을 통해 좌초된 지점에서 수천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전문가들과 과학적 실험을 통해 에스메랄다 호에서 나온 유물이라는 사실이 검증되었다. 두척이 침몰하여 아우 브레스 소르데도 사망하였는데 정박중인 쿠리아 무리아 섬 주민들이 폭풍이 몰려오니 안전한 항구로 선박을 옮기라는 조언을 무시한 결과였다.</ref> 1503년 4월, 캘리컷은 육상을 통해 코친을[[코친]]을 침공하였고 잔류했던 포르투갈인들은[[포르투갈인]]들은 비핀(Vypin) 섬으로 도피했으며, 코친이 처한 위기상황은 포르투갈 5차 원정대(사령관 알부케르크)가<ref>송동훈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2019.4.25 p222</ref> 8월에 인도에 도착하자<ref>Correia, p.372</ref> 캘리컷이 철수함으로 해결되었다.
 
== 제3차 항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