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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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가 죽은 후 청나라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아들인 가경제는 건륭제와 화신이 죽은 후 부정부패를 일소하려 노력하였으나 여전히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횡행하였고 그에 따라 청나라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빈번히 일어났다. [[1804년]](가경 9년) 백련교도의 난은 진정되었으나 [[1813년]](가경 18년) 백련교의 일파인 천교(天敎)도들이 난을 일으켰고, 천리교도들이 황궁인 자금성에까지 난입하는 [[계유지변]]이 일어나는 등 내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내란을 진압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 군비를 2억 냥 이상 지출하는 등 청나라의 재정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당시 내란, 재정 악화보다도 더 큰 문제는 외란으로 건륭제 때부터 시작된 청나라와 영국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는 후대에서도 지속되었다. 건륭제의 손자인 [[도광제]] 때에 영국 상인들은 건륭제가 정한 상업 정책을 무시하고 [[아편]]을 유통시켰으나 청나라 정부가 이를 금하고 아편을 폐기하자 함대를 이끌고 청나라로 쳐들어가 [[남경 조약]]을 맺고 [[향항]](홍콩)을 가져가는 등 청나라는 계속 열강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외란과 더불어 민란의 불씨는 점점 커져서 [[1851년]](함풍 원년) 청나라를 더욱 쇠약하게 만든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여 13년간이나 청나라 조정을 괴롭혔다. 당시 건륭제가 지나치게 원정을 한 이후로 쇠락해진 팔기군은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는데 공이 없었고 이러한 군대 세력의 약화는 지방에서 조직된 민병대 [[향용]]이 큰 세력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향용이 결정적으로 태평천국군을 멸망시키고 [[누르하치|태조]] 때부터 혁혁한 공을 세운 팔기군은 신식 무기의 등장과 향용의when 대두로I 더욱see 쇠락해져a 갔다.featured 또한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와 같이 한족의 문화를 흡수하는데 적극적이어서 그 문화를 발전시켰으나 만주족은 동화된 탓인지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잃기 시작하였다. 건륭제 이후 만주어를 사용하는 인구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청나라 멸망 때까지 계속 하락세를 보였다.article
 
한편으로는 건륭제 사후 많은 전설이 생겼는데 그 중 건륭제의 생모에 관한 설과 향비와의 사랑이야기가 많이 회자되는 전설이다. 정사인 《청사고》〈고종순황제실록〉에서 기록된 건륭제의 모친은 옹정제의 후궁 출신인 효성헌황후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건륭제는 옹정제와 효성헌황후의 아들이 아닌 강남 출신 한족 문인의 아들이며 옹정제가 본래 얻은 아이는 아들이 아닌 딸이었는데 마침 같은 날, 같은 시에 한족 문인의 아들이 태어나 서로 자신의 자식을 맞바꾸었고 이때 맞바뀐 옹정제의 아들이 된 남자 아이가 건륭제라는 것이다. 또한 건륭제가 남순을 떠난 목적은 바로 생모를 만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나<ref name="염숭년"/>, 대부분의 남순 때 효성헌황후가 건륭제를 따라 동행하였기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향비에 대한 전설은 본래 실존하던 위구르족 출신의 건륭제의 비 출신인 용비(容妃)가 모델로 실제로 오랫동안 살다가 자연사한 용비와 달리, 전설 속의 향비는 건륭제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으나 동침을 거부하고 절개를 지켰다. 건륭제가 사냥을 간 사이 황태후인 효성헌황후가 향비를 불러 자진을 권유하자 향비는 이에 자진하고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몸에선 아름다운 향기가 나왔다는 전설이다.<ref name="염숭년"/> 이 두 전설은 건륭제가 강남 순행, 그리고 십전무공 중 하나인 위구르 원정에 끼친 영향에서 비롯된 전설로 당시 민간에서의 건륭제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비판 ===
건륭제 자신은 초, 중기 40년간 조부 강희제와 부황 옹정제의 정책을 계승하고 개혁을 단행하며 문화를 부흥시켰으나 후기 20년 동안에는 화신을 지나치게 편애하고 자신의 딸을 화신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면서 화신의 세력을 너무 방관하였다. 또한 건륭제의 비호로 화신은 자신의 집에 엄청난 양의 돈을 저장하는 등 화신의 전횡을 방치하여 화신을 비롯한 여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내버려두는 실책을 범하였다. 즉위 당시 나쁜 정치 상황과 국고의 돈마저도 넉넉지 않던 강희제, 옹정제와는 달리 건륭제 때에는 국고의 돈이 풍족하였기에 불필요한 사치가 잦았다. 건륭제 역시 연회, 후원 건설 등에 막대한 비용을 쓰고 재위 기간 내내 원정을 단행하는 등 국고의 돈을 크게 낭비하여 청나라의 재정 상황은 악화되어갔다. 특히 자신의 정통성과 세를 과시하기 위해 여러 번의 전국 순행으로 다시 많은 돈을 낭비하기도 하였다.<ref name="Mote920">Mote, Frederick W. ''Imperial China 900 - 1800'', [[1999년]], 920쪽</ref> 또한 부황 옹정제가 전국의 관리들에게 잡은 엄격한 기풍을 이어가지 않고 그들에게 유화책을 씀으로서 관리들의 일체 행동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졌는데 이로 인해 부정부패가 만연해지고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기강이 크게 훼손되었다.<ref name="Mote919"/> 그리고 건륭제는 베트남, 네팔 등 정복한 영토에는 무단 통치를 단행하여 현지인들에게 분란의 싹을 틔웠으며 실제로 건륭제가 죽은 뒤, 베트남과 버마는 독립하였다.
 
건륭제의 또다른 실책으로는 외국에 대한 시각이었는데 영국의 특사 [[조지 매카트니]]는 동등한 입장에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건륭제는 영국이 먼 나라에서 조공을 하러 온 것이다 생각하며 영국 사절단이 올 때 전국에 “영국 오랑캐들이 항복하였다”라는 방문을 보냈다. 건륭제는 영국 사절들에게 시종일관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천자의 나라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말을 하여 영국 사절단을 당황하게 만들었다.<ref name="권삼윤"/>
 
=== 현대의 영향과 평가 ===
[[파일:Qianlong11.jpg|섬네일|시상을 떠올리는 건륭제]]
현대 이전만 해도 건륭제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던 풍류군주라고 평가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건륭제를 기점으로 청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주로 들며 건륭제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잘 내리지 않는 편이다. 특히 그의 오만함과 과도한 사치, 낭비를 비판하였고 이러한 재화 유출은 훗날 청나라가 열강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여서 멸망 때까지 강건성세의 번영은 다시 오지 않았다.<ref name="브리태니커"/> 건륭제를 유명하게 만든 민간의 설화는 후대에 들어서도 드라마·영화화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만든 드라마 시리즈 《[[황제의 딸]]》은 건륭 시대를 다룬 작품으로 건륭제가 황자 시절 강남에서 만난 여인과 하룻밤을 지낸 후 떠나자, 수십 년 뒤 그 딸이 나타나 아버지를 찾으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 밖에도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선 이러한 야사 외에도 건륭제 후반의 이야기, 즉 건륭제와 화신을 다루는 내용의 드라마도 많이 나오는 등 건륭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책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 있는데 《강희대제》, 《옹정황제》를 쓴 작가 [[얼웨허]](二月河)는 그 완결판인 《건륭황제》를 써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다시 한번 큰 히트를 쳤다. 이 소설을 토대로 [[2002년]] 중국중앙방송이 다시 《[[건륭왕조]]》(乾隆王朝)라는 드라마를 만들어 건륭제와 화신의 관계를 다루었으나 전작인 《강희왕조》, 《옹정왕조》보다 다소 부진하였다. 한편 야사를 토대로 쓴 책으로는 중국의 무협 작가 [[김용]]이 쓴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이 있다. 여기서 건륭제는 강남에서 태어난 한족 출신으로 풍류를 좋아하는 황제로 나왔으며 여러 번 드라마로도 제작되어서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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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
{{본문|건륭제의 가족}}
 
건륭제는 3명의 황후와 5명의 황귀비, 5명의 귀비 등을 두었고 슬하에 17남 10녀를 두었다.
 
=== 조부모와 부모 ===
* '''조부''': [[강희제|성조 강희인황제]](聖祖 康熙仁皇帝) 현엽(玄燁)
* '''조모''': [[효공인황후|효공인황후 오아씨]](孝恭仁皇后 烏雅氏)
** '''부친''': [[옹정제|세종 옹정헌황제]](世宗 雍正憲皇帝) 윤진(胤禛)
** '''모친''': [[효성헌황후|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
 
=== 황후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 100%;"
!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재위년도 !! 생몰년도 !! 국구(장인/장모) !! 별칭 !! 비고
|-align="center"
| 황후(皇后) || [[효현순황후]]<br>(孝賢純皇后) || 부찰 씨<br>(富察氏) || [[1735년]] ~ [[1748년]] || [[1712년]] ~ [[1748년]] || <small>일등승은장각공(一等承恩莊恪公)<br>부찰 이영보(富察 李榮保)<br>일품부인(一品夫人)<br>기오로 씨(覺羅氏) || <small>적복진(嫡福晉) ||
|-align="center"
| 황후(皇后) || || [[계황후|호이파나라 씨]]<br>(輝發那拉氏) || [[1750년]] ~ [[1766년]] || [[1718년]] ~ [[1766년]] || <small>일등공(一等公)<br>호이파나라 눌이포(富察 訥爾布)<br>일품부인(一品夫人)<br>낭가씨(郎佳氏) || <small>측복진(側福晉)<br>한비(嫻妃)<br>한황귀비(嫻皇貴妃)<br>계황후(繼皇后) || <small>폐후가 되지않고 서거하였으며,<br>실질적으로는 폐후 취급을 함.
|-align="center"
| 영황귀비<br>(令皇貴妃) || [[효의순황후]]<br>(孝儀純皇后) || 위가씨<br>(魏佳氏) || (추존) || [[1727년]] ~ [[1775년]] || <small>삼등승은공(三等承恩公)<br>위청태(魏淸泰)<br>일품부인(一品夫人)<br>양가씨(楊佳氏) || <small>위귀인(魏貴人)<br>영비(令妃)<br>영귀비(令貴妃)<br>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 || <small>가경제 즉위 후에 황후로 추존됨.
|}
 
=== 후궁 ===
==== 귀비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 100%;"
|-align="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