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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여 ===
* [[부여 (성씨)|부여(扶餘)]]씨가씨<ref>[[대한민국]]의 [[의령 여씨]](宜寧 余氏)는 백제의 [[국성]](國姓)이었던 부여씨를 기원으로 두고 있는 성씨다.</ref>가 [[국성]](國姓)이었던 [[백제]](百濟)는 [[백제 성왕|성왕]](聖王) 시기에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南扶餘)'로 변경하기도 했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0946&content_id=rp070309460001&search_left_menu=5 문화콘텐츠닷컴]</ref> 이 국호와 국성, 건국 신화, 무덤 양식 등을 보면 백제는 부여 계승 의식이 강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 두막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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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제점법 ===
부여에서는 전쟁이 있을 때도 제천의식을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하고 소(牛)를 죽여 굽(蹄)이 벌어지면 흉(凶), 합치면 길(吉)한 것으로 생각했다.<ref>[[진수 (서진)|진수]](3세기),《[[:s:삼국지|삼국지]]》〈[[:s:삼국지/권30|권30 오환선비동이전]]〉 “有軍事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爲凶,合者爲吉。”(싸움(軍事)이 있을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소를 잡아 발굽을 보고 길흉(吉凶)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져 있으면 나쁜(凶) 것으로 여기고 발굽이 붙어 있으면 좋은(吉) 것으로 여긴다. )</ref> 이러한 우제점법의 점복(占卜)은 은(殷)의 갑골점법(甲骨占法)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여겨진다.
 
== 대외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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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 [http://www.historyfoundation.or.kr/?sub_num=78 부여] -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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