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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기원전]] [[37년]]경 ~ [[668년]])는 [[한반도]]의 고대 왕조로, 한국 최초의 [[연호]]인 [[영락 (고구려)|영락]]을 사용한 나라이다. 국성은 [[횡성 고씨]](橫城 高氏)<ref name="test">[http://www.kwnews.co.kr/nview.asp?s=301&aid=204012800073 언중언 고구려 고씨] 강원일보 2004년 1월 29일 사설</ref>와 [[고마 씨]](高麗氏)다. 본래 [[원삼국시대]]의 국가중 하나였던 고구려는 기원전 4세기 쯤 [[삼국 시대]] 때 [[소수림왕]]이 [[전진 (오호십육국)|전진]]으로부터 [[율령]]과 [[태학]]을 수입하여 급속도로 강성해졌고, [[391년]] [[광개토왕]]이 [[연호]]를 반포하면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연호를 사용한 국가가 되었다. [[광개토왕]]의 지배기간 동안,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중부 일대, [[동북 3성|동북 지역]] 및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일대, [[만주]] 지역, 몽골 동부<ref name="다리강가">두산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65764&cid=40942&categoryId=34039, 몽골 다리강가],2009년.</ref><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99094</ref><ref>중국의 [[동북삼성]]과 [[내몽골]] 동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통틀어 [만주]]라고 한다.</ref>까지 지배하였으며, 후임 [[장수왕]]은 [[대성산성]], [[안학궁]], [[광개토대왕릉]], [[광개토대왕비]]과 같은 대규모의 토목공사들을 벌였으며,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운영해 한반도를 고구려 문화권으로 묶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행정능력도 발전하여 [[평양]]과 [[국내성]], [[재령군|한성]]등 중심도시가 발전해 고구려삼경을 이루고 군사력 역시 발전하여, [[고당전쟁]]에서는 15만 대군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후기에는 [[도교]]를 들여와 기존의 [[불교]]를 탄압하고 사찰을 쫒아내는등 종교적 탄압도 벌였다.
[[중원]]왕조들은 고구려를 예(濊)/맥(貊)/고리(槀離)/구리(句麗)/평양(平凉)/요동(遼東) 등으로 호칭하기도 했다.<ref name="country">[https://weekly.donga.com/List/3/all/11/1942579/1 “고구려와 고려가 아니라 고구리와 고리로 불러야 한다”] [[주간동아]] [[2020년]] [[1월 3일]]</ref> ▼
고구려는 강대국이었지만, [[6세기]]경 [[안원왕]]대에 이르러 왕의 친척과 외척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뒤이어 일어난 [[고수전쟁]]과 [[고당전쟁]]의 여파로 국력의 타격을 입게되었으며, [[7세기]]경 [[연개소문]]이 [[중국]]과 화평을 원하는 주화파의 수장 [[영류왕]]을 죽이고 [[연씨정권]]을 형성하여 [[연남생]], [[연남건]]으로 세습되는 독재정치를 26년간 이끌어오다가 이들 형제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668년]] [[당나라|당]](唐)의 [[이세적]]에게 항복하여 멸망하였으며, 고구려의 뒤는 [[대조영]]의 [[발해]]와 [[왕건]]의 [[고려]]가 이었다. 고구려는 약 705년간 유지되어 한반도 북부와 중부의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럽식 이름인 'Korea' 역시 고구려에서 유래되었다.
다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왕건]]이 개국한 [[고려]]를 비롯해 그외에 '고려' 국호를 계승한 여러 국가와 구별하기 위해 '고구려'(高句麗)로 통칭하고 있다.▼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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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중원]]왕조들은 고구려를 예(濊)/맥(貊)/고리(槀離)/구리(句麗)/평양(平凉)/요동(遼東) 등으로 호칭하기도 했다.<ref name="country">[https://weekly.donga.com/List/3/all/11/1942579/1 “고구려와 고려가 아니라 고구리와 고리로 불러야 한다”] [[주간동아]] [[2020년]] [[1월 3일]]</ref>
고구려(高句麗)의 한국어 독음이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라는 의견이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신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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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조선시대]]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나타난 [[한글]]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라 나타나고<ref>《삼강행실도》, [[1434년]]([[조선 세종|세종]] 16) 초간, [[조선 중종|중종]] 연간에 언해, [[경상남도|경남]] 유형문화재 제160호</ref> 《대동지지》에는 “(중국인이나 음운학 책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은 ‘려’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ref>“東人變呼音呂” ([[김정호]], 《대동지지》〈방여총지〉권4, 19세기)</ref>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도 麗는 ‘려’로 읽는다는 예외도 있는 등<ref>《한국한자어사전》 권4([[1996년]] [[11월 3일]]) 991쪽</ref><ref>두산동아(옛 동아출판사 포함)에서 펴낸 《동아백년옥편(탁상판)》(초판 7쇄, [[2003년]] [[1월 10일]]) 2264쪽</ref><ref>《동아 한한대사전》([[1982년]] [[10월 25일]]) 2181쪽</ref> 해당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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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장수왕 3년(414년), 69년(481년)에 각각 설치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고려태왕(高麗太王)''',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을 근거로 고구려에선 왕을 '[[태왕]]'이라고 칭했다는 의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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