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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유적지 보존과 이순신 후손의 빚 청산 ====
[[1930년]]초 [[이순신]] 가문의 개인적인 빚으로 [[이순신]] 사당의 위토가 [[일본인]] 투기꾼에게 넘어가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조선인 사회운동가 [[윤치호]]는 즉각 [[이순신]] 사당 위토 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선언한다. 윤치호가 [[이순신]] 후손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나서자 [[남궁 억]], [[한용운]], [[김성수 (1891년언론인)|김성수]], [[정인보]], [[김병로]], [[조만식]],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안재홍]], [[홍명희]], [[허헌]] 등이 즉각 동참을 선언했다.<ref>[http://article.joins.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3086123 현충사 -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옛집과 묘소, 활터]. 중앙일보. 2013년 3월 24일.</ref>
 
이순신 종손가의 살림이 점점 영세해지면서 돈을 빌려 쓰다가 1300원의 빚을 지게 됐고 그 이자까지 총 2100원에 이르게 됐다. [[1930년]] [[9월]] 채권자였던 [[동일은행]]은 여러 번 빚 갚을 것을 독촉하고 그 해 5월 말일까지 갚지 않으면 위토 60두락(斗落)을 경매에 처분하겠다고 나선 것<ref name="chung01">[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823240 현충사관리소, 충무공 위토서 모내기 행사] 대전일보 2009년 05월 31일자</ref>이다. 일본인 경매자가 가장 비싼 돈을 제기했고, [[이순신]] 유적지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그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정인보]], [[김성수 (1891년언론인)|김성수]], [[최남선]] 등에게 연락하여 이 일만큼은 막아야 된다고 호소하였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의해 국민에 알려지면서 [[1931년]] [[5월 26일]] [[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됐고<ref name="chung01"/> 윤치호는 충무공유적보존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2만 여명이 모금운동에 참여해 1만6021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윤치호 위원장을 포함해 [[남궁 억]], [[한용운]], [[정인보]] 등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충무공유적보존회는 성금으로 종손가의 채무 청산과 함께 현충사를 중건하고 위토를 추가 매입했다.<ref name="chung01"/> [[이순신]] 유적지와 현충사의 위토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유족의 빚을 대신 갚는 일을 주도한 혐의로 그는 [[불령선인]]의 거두로 지목되어 내사를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