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멸 수용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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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스 독일의 절멸 수용소는, 같은 나치스의 수용소에서도 [[잣하우 강제 수용소]]나 [[벨겐 베르젠 강제 수용소]]와 같은 강제 수용소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후자는 여러가지 '국가의 적'(나치스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평가를 받은 사람)을 투옥해 강제 노동을 실시하게 하는 장소이며, 절멸 그 자체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대량학살의 초기의 단계에서는, 유태인도 주로 이러한 수용소에 보내지고 있었지만, 1942년 이후는 그 대부분이 절멸 수용소에 보내졌다.
 
절멸 수용소는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와도 구별된다. 강제 노동 수용소는, 포로를 포함한 여러가지 죄수에게 노동을 실시하게 하는 목적으로, 독일이 점령한 모든 나라에 만들어진 수용소이다. 많은 유태인이 이러한 수용소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게 되었지만, 이윽고 유태인 노동력은, 독일의 전력으로서 유용한가 아닌가와 관계없이, 절멸 수용소에 보내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나치스의 수용소(소련 이외의 병사를 위한 포로 수용소와 일부의 노동 수용소를 제외함)에서, [[처형]]이나 [[기아]], [[질병]], [[피로]]때문에 사망률은 매우 높은 것이 상이었다정상이었다. 그러나, 절멸 수용소만은 절멸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42년 9월 전반에는 이미, 어느 [[친위대 (나치스)|SS]]의 의사가, 독가스에 의한 살육을 목격해, '그들은 장난으로 아우슈비트를 절멸 수용소(''das Lager der Vernichtung'')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라고 일기에 썼다<ref>{{웹 인용 |url=http://www.holocaust-history.org/auschwitz/19420901-kremer/ |제목=Diary of Johann Paul Kremer |확인날짜=2014년 5월 29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514183659/http://www.holocaust-history.org/auschwitz/19420901-kremer/ |보존날짜=2008년 5월 14일 |url-status=dead }}</ref>고 여겨지지만, 이 의사가 누구인가는 불명하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부관의 한 명 [[디터 비스리트니]] ([[: en:Dieter Wisliceny| Dieter Wisliceny]]) 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증언대에 처했을 때, 절멸 수용소의 이름을 들도록 질문받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마이다네크]] ([[르브린 강제 수용소]]) 가 그것이라고 대답했다.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 [[잣하우 강제 수용소]], [[브헨바르트 강제 수용소]]는 어떻게 구별되는지 물으면, '아이히만의 부문에서 보면, 통상의 강제 수용소였다'라고 대답했다<ref>Overy, Richard. ''Interrogations'', p 356-7. Penguin 2002. {{ISBN|0-14-028454-0}}</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