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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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 ==
셸링의 아버지는 [[루터파]] 신학자였다. [[헤겔]]과 [[횔덜린]]과 함께 [[튀빙엔튀빙겐]]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재학중 철학에 전향하였다. 조숙했던 천재로 출발한 셸링은 [[피히테]]와 [[스피노자]]에 의하여 자극받아 초월론 철학에 관한 저작을 발표하고 그 후 [[라이프찌히]]에서 당시의 자연과학을 접하게 되어 자연철학으로 불리는 자연의 형이상학적 근거지움에 관한 저작을 정력적으로 발표하였다. 그 저작들 중 하나인 "세계의 영혼에 관하여"에서 [[괴테]]에게 인정받아 예나대학의 조교수로 초빙되었다.
 
== 생애 ==
피히테의 예나 대학 사직후 철학 정교수가 된 셸링은 "내 철학체계의 서술"에서 피히테가 가한 비판을 계기로 점차 피히테와 자기의 철학적 차이를 자각하고 양자는 완전히 결별하고 1802년의 대화편 "브루노" 등에서 공공연히 피히테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슐레겔의 아내였던 카롤리네의 연애사건 및 예나에서의 보수파와의 대립에 의하여 셸링은 예나로부터 퇴거하여 한때 뷔르쯔부르크대학에 적을 옮겼다. 그 후 1806년 뮌헨으로 이주하였다. 1807년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셸링의 동일철학이 비판되고 이것으로써 튀빙엔 이래의 두 사람의 우정은 끝나고 이후 헤겔은 셸링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논적의 일인이 되었다. 아내 카롤리네의 사후 직후에 출판된 "인간적 자유의 본질"(1809年)의 후 는 거의 공적인 저술활동으로부터 물러나 오로지 강의와 "세계의 세대들"을 시초로 하는 미간행 초고의 저술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