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놀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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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 ==
남사당놀이의 연원이나 형성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해동역사]]》에 따르면 유랑 민중놀이패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 자연발생한 민중놀이 집단이 처음에는 사당패라고 하여 여자들이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집단에서 출발하였으나, 조선말기 남자들만의 사당패가 생겨나 남사당패라고 하였다. 구성은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쇠·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 40∼50명으로 이루어졌다. 그 조직은 엄격하였고 모자란 인원은 가난한 농가의 아이나 고아ㆍ가출아 등으로 충당하였다. 현재까지 이들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진위, 충남 당진·회덕, 전남 강진·구례, 경남 진양·남해, 황해도 송화·은율 등지인데 놀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는 삐리들의 기예(技藝)를 가르쳤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 독립적인 존속이 어려워지게 되자 중매구와 걸립패와의[[걸립패]]와의 교습을 거치게 되고, 사당패·솟대장이패와의 교류도 갖게 되면서 오늘의 형태로 변모된 것이다.
 
== 성격 ==
남사당이라 함은 남자 사당(한량으로 예능자를 말함)들로 조직된 유랑예인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조선]] 사회에 있어서 가장 천대받아왔던 부류이며, 광대(廣大)·장인(匠人)·상인보다도 못한 집단이었다. 따라서 사회로부터 격리당해 왔으며, 가족도 거처할 지붕밑도 없이 전국을 유랑하였다. 또한 남사당은 모든 사회악의 온상처럼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도 쉴 사이 없이 황색기를 앞세우고 민중 속을 행군해 갔다. 이들의 놀이는 상민의 편에서 [[양반]] 세계에 대한 비판을 희화화(戱畵化)한 여섯 마당놀이이며, 놀이를 통해 상민들과 웃고 울었다.
 
남사당놀이는 권력 주변에서 기생했던 그 밖의 지역단위 연희와는 그 성향이 다르며, 오히려 조선사를 통하여 지역놀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러 면으로 횡포를 받아왔던 상민의 입장에서 상민과 부단히 영합해 가면서, 말없는 몸짓으로, 또는 꽹과리의 소리짓으로 상민들과 교감하고 공감하여 저항의 의지를 일깨워 나갔다. 길가에 돋아난 이름 없는 잡초들이 밟히면 밟힐수록 살아나듯이 남사당의 정신은 민중의 정신으로 살아 있으며, 풍물(농악), 버나(사발과 쳇바퀴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조선줄타기), 덧보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 인형극)의 여섯 마당의 남사당놀이 속에 흥건히 젖어 있는 것이다. 이 남사당놀이는 꼭두(대장)를 선두로 화극(기획)·뜬쇠(조장)·삐리(대원)·가열(수련생), 그 밖의 저승패(고문관) 등 50여 명의 인원이 형제처럼 동고동락하면서 민중의 애환과 서러움을 같이 나누었고 서구문명의 급격한 침식과 일제의 탄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립패]](乞粒牌)로 바뀌는 등 많은 탈바꿈이 있었다.
 
== 공연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