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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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교남동|평동]] [[경교장]]
|정당 = [[한국독립당]] (1930년, 상하이) <br />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 (1935년, 항저우)<br />통합 [[한국독립당]] (1940년, 충칭)
|본명 = 김창수
|본관 = [[구 안동 김씨|안동]]
|배우자 = [[최준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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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김구필체(AMJ).jpg|섬네일|100픽셀|독립운동가 김구의 필체]]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본관은 [[구 안동 김씨|구 안동]]이며, 본명은 창수이다. [[황해도]] [[해주시|해주]] 출신이다.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정치인이다.
 
대일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하다가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ref>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p.514</ref><ref>{{서적 인용|제목=청소년을 위한 백범일지|성=김구지음, 신경림 풀어씀|이름=|날짜=|판=|출판사=나남|쪽=245|장=}}</ref>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양반가의 후손<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8&aid=0000005224 백범 발자국 따라 걸으면 큰길 되지요]</ref>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으며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ref>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ref><ref>[http://www.kimkoo.or.kr/02diary/sub.asp?pagecode=m02s01t05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ref>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피난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ref>김삼웅《백범김구평전》시대의창,132쪽</ref>,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ref>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p.514</ref><ref>{{서적 인용|제목=청소년을 위한 백범일지|성=김구지음, 신경림 풀어씀|이름=|날짜=|판=|출판사=나남|쪽=245|장=}}</ref>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 김씨|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시|해주]] 출신이다.
[[1919년]] [[상해 임시 정부]]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 내무부위원, 내무부 경무국장 등을 지냈다. [[1921년]]~[[1922년]]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자유시 참변]]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이 극심했을 때 임정유지파의 입장에 있었다. [[1924년]] [[7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다. 이후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노동국 총판, 국무령, 내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등을 거쳤다. [[1931년]] [[만주 사변]] 직후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는 [[일본 제국]]의 표적이 되어 [[1940년]] [[5월]]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외무부장, 재무부장 등을 지냈다. [[1938년]] [[5월 7일]]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지만 구사일생 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고, [[1940년]] [[10월 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다.<ref name=":20" /><ref name=":3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45_0030_00010|제목=1.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및 위원 명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 name=":17" /><ref name=":21" /><ref name=":35" />
[[1919년]] 이후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화민국|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朴喜光)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대일 테러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이봉창 의거|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8·15 광복|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1891년)|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1945년]] [[8·15 광복|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9년]] [[5월 19일]]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합작이 태동하였으나,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격에 서거하였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ref>{{웹 인용|url=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1104100081|제목=吳世勳 - 《백범일지》 백범 김구 著|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월간조선|확인날짜=}}</ref>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nowiki/>'''구'<nowiki/>'''(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이동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 사후에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 생애 ==
===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계 (1876 ~ 1949) ====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基洞)<ref>대한민국의 이북5도 행정구역 기준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ref><ref>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37P</ref><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에 해당한다.</ref><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05212&cid=57633&categoryId=57654 조선향토대백과 오담리]</ref> 에서 [[구 안동 김씨|(구)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郭樂園, 당시 17세) 부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7대 독자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김방경|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김사형|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그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직할시|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시|해주]]로 피신해 왔다. 해주군 서쪽 80리에 있는 백운방 텃골, 팔봉산(八峰山) 양가봉(楊哥峰) 아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여 연명해왔다. 생계를 위해 군역전(軍役田)을 짓게 되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부터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되자 텃골 근방의 양반이던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 일족에게 대대로 천대를 받게 되었다.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두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ref>김구,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6) 22페이지</ref>'라 하였다. 그러나 김구의 7대조 할아버지인 김언함(金彦喊)의 부인이 진주강씨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상민이었던 가계는 김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 소년기의 창수로 하여금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광복 이후의 김구의 가계를 소개한 것은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는데, [[1947년]] [[도왜실기]]의 [[한국어]] 번역판의 서문을 쓴 [[이승만]]은 그가 명문의 후손 임을 강조했고, [[안재홍]](安在鴻)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백범김구선생약사(白凡金九先生略史)의 서두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술하였다.
 
김만묵(金萬默)의 둘째 아들로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장연군 목감방(牧甘坊) 문산촌(文山村) 출신 현풍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그가 태어나던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흉내낸 끝에 순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가 사망한 날이었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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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에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중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이 친척 대부가 서울에 다녀오던 길에 자녀 결혼식에 쓸 갓을 샀다가 양반에게 빼앗기고 강제로 찢김을 당했다. 이 일로 몹시 충격을 받은 소년 창암은 과거 시험에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동국통감|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ref name="weeklychosun">{{뉴스 인용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동국통감|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ref name=":2">{{웹 인용|url=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9/26/2006092677050.html|제목=[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김구 그는 누구인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주간조선}}</ref>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베]]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ref name="일지1">백범일지 상권 참조</ref>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ref name="김구249">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9쪽 참조.</ref> 한 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 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ref name="김구249"/>
|제목 =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 김구 그는 누구인가
|url = 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9/26/2006092677050.html
|출판사 =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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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0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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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날짜 = 201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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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베]]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ref name="일지1">백범일지 상권 참조</ref>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ref name="김구249">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9쪽 참조.</ref> 한 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 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ref name="김구249"/>
 
==== 청소년기 (1888 ~ 1892) ====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 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그는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ref name="기념사 1"/> 이때 목동 노릇도 했지만 그는 학업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이름있는 스승을 모실 수 없어,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인 정문재의 [[서당]]에 부탁하여 무료로 통학하면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1892년]]17세에는 정문재의 권고로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ref name="일지1"/> 소년 김구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김순영의 이름으로 응시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시험 중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 대신 과거를 보게 하거나 매관매직 하는 등의 시험부정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단념하게 서당 공부를 그만두었다되었다.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를 하였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과 동네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였다.<ref>[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붙인 제목 -->]</ref>
 
과거 시험 당시 [[매관 매직]]의 타락상, 즉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관리들의 비리를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ref name="일지1"/> 이후 [[병법|병서]]를 탐독하며 집안과 동리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도 하였다.<ref name="일지1"/>
 
=== 청년기 ===
==== 동학농민운동 참가 (1893 ~ 1895) ====
{{참고|천도교|동학 농민 운동}}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 (천도교)|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신도(信徒)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ref name="기념사 1"/> 입교한 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를 수백 명을 포덕하였으므로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상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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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경기도 파주
|ISBNid={{ISBN|89-7199-148-8}}
|쪽=50~51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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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채 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1896) ====
[[파일:Go neung-seon 01.jpg|섬네일|160px|right|스승 후조 [[고능선]]]]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안태훈]]은 그를 배려하여 [[1895년]] [[2월]] 그의 부모까지 모셔다가 산채에 함께 살게 했으며, 무례하게 대하는 측근들을 혼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을 처음 만났으나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태훈]]의 사랑에 들다 [[성리학]]자이자 [[화서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 후조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감화받았는데, 그로부터 [[공자|공]][[맹자|맹]]의 [[학문]],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적 가르침을 받고 춘추대의와 의리에 눈뜨게 되었다. [[고능선]]은 청년 김창수에게 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해주었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고능선]]은 [[화서학파]]로 [[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의 제자이자 의병장 [[유인석 (1842년)|유인석]]의 동문이었으며 노론 계열이었다.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하며 청나라로 갈 것을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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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을 떠나 평양 을밀대와 모란봉에서 휴식하다가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 고원, 정평, 함흥에 도착했다. 함흥에 도착해서 함경도의 교육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전된 것에 탄복하였다. 단천, 혜산진을 지나 백두산 참배는 위험하다 하여 중단하고 [[만주]] [[통화]](通化)로 갔다. 김이언을 만나기 전 청나라 장교를 만났는데, [[중국어]]를 모르던 그는 [[종이]]에 [[한자]]로 써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청일전쟁]] 당시 [[평양특별시|평양]]에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실패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계속 불구대천의 원수임을 알리자 청나라 장수는 자신은 금주(錦州) 출신으로 집안에 5백명의 가병이 있으며, 청나라로 동행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이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 정중히 사양하였다.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김이언의 부대가 강계성을 습격할 때는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성에 들어가 화약을 사 오는 일을 하였다. 화약을 사오던 길에 압록강에 얼음에 빠져 동사할 위기에 처했으나 동민들의 구조로 살아났다. 강계성 습격 시는 11월 압록강이 완전히 얼어붙을 때로 정하고 공략하기로 결정, 그와 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강계성 아래에 몸을 숨겼다가 [[신천군]]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스승 [[고능선]]의 장남 [[고원명]] 내외가 병으로 요절하였으므로, 고능선은 김창수를 손녀사위로 삼아 의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 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자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8쪽.</ref>
 
==== 치하포 사건과 투옥생활은신 생활 ====
===== 치하포 사건사건과 수감 생활 (1896 ~ 1897) =====
{{참고|을미사변}}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령|단발]] 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하순 [[평안북도]] [[안주군|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진남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빙산을 만나면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빙산을 의지하여 작은 빙산을 떠미는 방법으로 배를 빼낸 뒤 우여곡절 끝에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정박하였다.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군|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으며, 장연 출신이라면서도 서울말을 쓰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인으로 변복한 것을 수상히 여긴 그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단정하였다.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령|단발]] 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하순 [[평안북도]] [[안주군|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진남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빙산을 만나면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빙산을 의지하여 작은 빙산을 떠미는 방법으로 배를 빼낸 뒤 우여곡절 끝에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정박하였다.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군|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으며, 장연 출신이라면서도 서울말을 쓰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인으로 변복한 것을 수상히 여긴 그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단정하였다.
 
[[1896년]] [[3월 9일]]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중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고 발로 차는 등 폭행한 뒤 살해했다. 그의 이름은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다.<ref name="baik01">{{서적 인용
|저자=김구
|제목=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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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경기도 파주
|ISBNid={{ISBN|89-7199-148-8}}
|쪽=90~101쪽
}}</ref>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자 일본 육군 중위 신분으로써 [[조선]]에 밀파된 군사간첩이라고 기술하였으나,<ref name="baik01"/>,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김구
|제목=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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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경기도 파주 피카츄
|ISBNid={{ISBN|89-7199-148-8}}
|쪽=98쪽 각주59
}}</ref>. 한때 [[김완섭]]이 김구가 민간인을 살해했다 주장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EVEC 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주석 - 오마이뉴스] 2009년 1월 17일</ref>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이었다고 주장했다.<ref name="kyunghang01">경향신문 1997년 8월 13일자, 19면</ref>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관련 내용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 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출처|날짜=2019-06-19}}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쓰시마 섬(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ref name="sonseil01">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_contentA.asp?nNewsNumb=200811100050&ctcd=&cPage=1</ref>
}}</ref> 김구는 현장에서 살인 이유로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에 대한 복수'라고 밝히고, 식당 주인이자 동장(洞長)인 [[이화보]](李化甫)를 시켜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ref name="baik01" /> 쓰치다 조스케가 소지하고 있던 엽전 8백전 중 선주들에게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방장인 이화보를 시켜 동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김구는 현장에서 살인 이유로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식당 주인이자 동장(洞長)인 [[이화보]](李化甫)를 시켜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ref name="baik01"/> 쓰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엽전 8백전 중 선주들에게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방장인 이화보를 시켜 동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1896년]] 6월 말 해주부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ref name=":15">{{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8233|제목=치하포사건(鵄河浦事件)|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해주 감영에서 [[고문]]당하다가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은 그에게 일본인을 살해여부를 묻고, 이어 재물을 강탈할 목적이냐고 추궁하였다.
===== 사형 모면, 옥중 계몽운동, 탈옥 (1896~1898) =====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된 후, 경무관 [[김윤정 (1869년)|김윤정]]은 그에게 일본인을 살해여부를 묻고, 이어 재물을 강탈할 목적이냐고 추궁하였다. 사태가 큰 사안이라 본 경무관 [[김윤정 (1869년)|김윤정]]은 인천부윤 겸 감리사 [[이재정 (1846년)|이재정]](李在正)에게 보고하였고, [[이재정 (1846년)|이재정]]의이재정의 추국 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을 입는 것의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 추국하던 관리들은 부끄러워하여 이후로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하였다.
 
1896년 9월 10일 일본영사관 경부신곡청 참석하에 회동심리가 열렸고, 삼초(조서)가 작성되었다. 이 재판이 끝나고, 1896년 9월 12일 일본영사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대명률(大明律)의 인명모살인죄(人命謀殺人罪)’로 김구를 참형(斬刑)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하는 의견서를 인천항재판소판사 이재정에게 제출하였고, 다음날인 1896년 9월 13일 인천항재판소 판사이재정은 당시의 형사법인 '형률명례'의 절차(사형선고를 한 후 법부를 거쳐 임금에게 사형집행을 주청하는 절차)에 따라 법부에 조율재처(조율처판)를 건의하였다. 1896년 10월 2일 인천영사관의 압력을 받고 있던 이재정은 김창수에 대한 조속한 처리를 법부에 전보로 건의하였고, 법부에서는 임금에게 마땅히 상주하여 칙명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는 답전을 인천감리에게 보냈다. 이에 따라 1896년 10월 22일 법부는 김구를 포함한 11명에 대한 교형(絞刑)을 고종에게 건의(상주안건)하였으나 고종의 재가(사형집행명령)는 이뤄지지 않았고, 1896년 12월 31일 상주안건을 거쳐, 김구가 제외된 1897년 1월 22일 최종 상주안건이 재가되어 김구는 일시적이나마 사형집행을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법적 절차에 따라 사형을 면하게 되는 과정과 내막을 속속들이 알 수 없었던 김구는 자신이 체험했던 사실들을 바탕으로 사형을 면하게되는 과정을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았다. "대궐에 있던 승지 한 명이 살해동기가 '국모보수'라고 적힌 것을 보고 고종에게 보고했고, 고종은 일단 사형 집행을 정지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이 칙명은 인천감리서의 이재정 감리에게 전화로 신속히 전달되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만약 전화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 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라고 썼다.
1896년 9월 10일 일본영사관 경부신곡청 참석하에 회동심리가 열렸고, 삼초(조서)가 작성되었다.
이 재판이 끝나고,[[1896년]] [[9월 12일]] 일본영사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대명률(大明律)의 인명모살인죄(人命謀殺人罪)’로 김구를 참형(斬刑)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하는 의견서를 인천항재판소판사 이재정에게 제출하였고, 다음날인 1896년 9월 13일 인천항재판소 판사이재정은 당시의 형사법인 '형률명례'의 절차(사형선고를 한 후 법부를 거쳐 임금에게 사형집행을 주청하는 절차)에 따라 법부에 조율재처(조율처판)를 건의하였다.
1896년 10월 2일 인천영사관의 압력을 받고 있던 이재정은 김창수에 대한 조속한 처리를 법부에 전보로 건의하였고, 법부에서는 임금에게 마땅히 상주하여 칙명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는 답전을 인천감리에게 보냈다.<ref name=":15" />
이에 따라 1896년 [[10월 22일]] 법부는 김구를 포함한 11명에 대한 교형(絞刑)을 [[대한제국 고종|고종]]에게 건의(상주안건)하였으나 고종의 재가(사형집행명령)는 이뤄지지 않았고, 1896년 [[12월 31일]] 상주안건을 거쳐, 김구가 제외된 1897년 [[1월 22일]] 최종 상주안건이 재가되어 김구는 일시적이나마 사형집행을 면할 수 있었다.<ref name=":15" />
이러한 사법적 절차에 따라 사형을 면하게 되는 과정과 내막을 속속들이 알 수 없었던 김구는 자신이 체험했던 사실들을 바탕으로 사형을 면하게되는 과정을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았다.
"대궐에 있던 승지 한 명이 살해동기가 '국모보수'라고 적힌 것을 보고 [[대한제국 고종|고종]]에게 보고했고, 고종은 일단 사형 집행을 정지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이 칙명은 인천감리서의 이재정 감리에게 전화로 신속히 전달되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만약 전화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 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라고 썼다.
 
===== 개화와 죄수 교육 (1897 ~1899) =====
김구는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 감옥을 학교로 만들었다. [[1897년]] [[강화도|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은 그의 딱한 소식을 접하고, 동료 상인, 객주들과 함께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ref name="기념사 2">{{웹 인용|url=http://www.kimkoo.or.kr/sub/sub02_02.asp|제목=연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확인날짜=2020-09-07}}</ref> 뒤에 김구는 [[김주경]]의 동생 [[김진경]]을 찾아 그의 형 [[김주경]]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김구는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 감옥을 학교로 만들었다. [[1897년]] [[강화도|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은 그의 딱한 소식을 접하고, 동료 상인, 객주들과 함께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ref name="기념사 2">[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2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붙인 제목 -->]</ref> 뒤에 김구는 [[김주경]]의 동생 [[김진경]]을 찾아 그의 형 [[김주경]]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감옥에서 김구는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김창수가 재소자에게 옥에서 글을 가르치면서 감옥이 [[서당]]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일부는 김창수에게 밥을 얻어먹을 목적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글공부에 참여하였다.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면서, 재소자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한 대서(글을 대신 써줌)를 해주었고 또한 동료 재소자들로부터 민담과 노래를 배웠다. 이때 김구는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긴 간수의 소개로 서양의 책인 세계역사와 세계지리 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50~251쪽 참조.</ref> 그러나 중국서적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하였고, 향후에도 [[영어]]에 관해서는 문맹이었다 한다.<ref>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당대총서 15)》 (당대, 2008) 265페이지</ref>
 
===== 승려 활동 (1898 ~ 1899) =====
1898년 [[3월 19일]] 김구는 동료 죄수들과 탈옥을 감행하여 성공하였고, 그의 아버지가 대신해서 수감되었다가 1년 후인 1899년 3월 석방되었다.<ref name=":15" />
 
==== 승려생활 (1898~1899) ====
[[파일:Magoksa.JPG|섬네일|210px|left|[[공주시|공주]] [[마곡사]]]]
 
[[1898년]]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풀밭과 걸식, 민가에 숨어 생활하다가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1898년 [[가을]]께에 출가자인 [[공주시|공주]] 출신 이서방 이라는 남자를 따라 [[공주시|공주]] [[마곡사]]에 도착했다. 먼저 삭발한 [[공주시|공주]]의 이서방이 찾아와 [[마곡사]]에 식객으로 유숙하던 그를 찾아와 "하은당은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寶境)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후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이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하은당]]을 은사로 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출가 초기부터 불경을 외우는 일과 법당의 허드렛일 도중 실수로 스승인 하은당과 다른 선임 승려들에게 질타를 당하였다. 다른 승려들은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고령이라 이 분들이 작고하면 [[마곡사]] 법당의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인의 확고한 결심에 의한 출가도 아니며 [[승려]]의 길에 뜻이 없었던 백범은 산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승려]]들과의 마찰 등으로 후회하던 중 이듬해인 [[1899년]]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주지인 하은당은 뜻이 그러하다면 보내주겠다 하고 여비로 쓸 곡식을 주어 보내주었다. 이후 이곳저곳 방랑하며 동료 승려를 따라 평양부에 도착, [[1899년]] [[4월]] 동료 승려를 비밀리에 고향에 보냈다가 그를 따라온 부모와 상봉하였다. 식솔들을 이끌고 방랑중 [[5월]] [[평양시|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ref name="기념사 2"/> 그가 환속하자 실망한 동료 승려는 그를 떠났고, [[1899년]] [[가을]] [[황해도]] [[해주군|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성실하게 농업에 종사하면 혼처를 마련해주겠노라며<ref>백범일지 참조</ref> 농사일을 권유하였다.<ref name="기념사 2"/> 그러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고 얼마뒤 본향을 떠난다.
 
==== 애국계몽운동애국계몽운동과 (1900~1910)수감 생활 ====
===== 애국계몽운동 (1900 ~ 1910) =====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1년 뇌졸증으로 반신불수가되 투병중이던 아버지 사망.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예수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교회]]인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ref name="기념사 2" /> [[1903년]] [[황해도]] [[장연군|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백남훈]](白南薰)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김구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7>[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78b 김구 - Daum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1903년]] [[여름]]에는 [[농상공부]] 종상위원(種桑委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공립학교 교원직과 함께 그가 [[대한제국]]에서 맡은 유일한 관직이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 (1859년)|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 (서울)|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ref name=autogenerated7 />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ref name=autogenerated7 /> [[1906년]]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 종산리의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敎員)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자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摠監)으로 활동하였다.
1901년 뇌졸증으로 반신불수가되 투병중이던 아버지 김순영이 사망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군|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재령군|재령]] [[보강학교]](保強學交) 학교장에 초빙되어 학교장직을 겸임하였다.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ref name="weeklychosun" />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 수감 생활과 망명 준비 (1910 ~ 1919) =====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교회]]인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ref name="기념사 2" /> [[1903년]] [[황해도]] [[장연군|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백남훈]](白南薰)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김구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7">[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78b 김구 - Daum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1903년]] [[여름]]에는 [[농상공부]] 종상위원(種桑委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공립학교 교원직과 함께 그가 [[대한제국]]에서 맡은 유일한 관직이었다.
{{참고|신민회|안악 사건|105인 사건}}
 
[[1910년]] [[서울특별시|경성]]의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그는 [[신민회]] [[황해도]]지부의 대표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1910년 [[12월]] 그를 방문한 [[안정근]]을 만났다가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형문을 받았고, 재판에서 징역 15년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1911년]] 일제의 피체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김좌진]]과 조우하였다.<ref>[[백범일지]]</ref> 1912년에는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ref name="위클리조선">{{서적 인용
[[1904년]] 12월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ref name=":2" /> 장련 읍내로 이사한 김구 일가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저자=김구
 
|제목=백범일지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 (1859년)|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 (서울)|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ref name="autogenerated7" />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ref name="autogenerated7" />
|날짜=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출판사=돌베개
[[1905년]] [[11월]]부터 [[1907년]] [[2월]]까지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직을 맡았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code=seoul&id=20050829014001 한화(2)-동생 김호연 빙그레회장家] 서울신문 2005-08-29 14면</ref>
|출판위치=경기도 파주
 
|id={{ISBN|89-7199-148-8}}
[[1906년]]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 종산리의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敎員)이 되었다.
|쪽=267쪽}}</ref>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자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摠監)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군|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재령군|재령]] [[보강학교]](保強學交) 학교장에 초빙되어 학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안중근 의거]]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ref name=":16">{{웹 인용|url=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753|제목=김구(金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 수감생활과 망명준비 (1910~1919) ====
[[1910년]] [[서울특별시|경성]]의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그는 [[신민회]] [[황해도]]지부의 대표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망명 중이던 [[안명근]]은 한국에 입국하여 [[배경진 (1885년)|배경진]]·박만준(朴萬俊)·한순직(韓淳稷)과 함께 각 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시키려는 계획 하에 [[황해도 (일제 강점기)|황해도]]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비밀리에 모으던 중 [[조선총독부 경무국|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게 발각, [[1910년]] [[12월 27일]] 평양에서 재령헌병대원에 체포되어 관계자 전원이 구속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1_1910_12_99_0670|제목=이달 중에 黃海道 信川人 安明根이 裵敬鎭, 朴萬俊, 韓淳稷과 間島에 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시키려는 계획 하에 黃海道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비밀히 모금 중 누설되어 平壞에서 載寧憲兵隊員에 체포되어 관계자 전원이 구속되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를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이라 한다. [[일본 제국|일제]]는 안명근사건과 엮어서 [[황해도]] 일대의 김홍량(金鴻亮), [[김구]], 崔明植, 李承吉, 都寅權, 金庸濟 등 안악양산학교(安岳楊山學校) 관련자와 [[면학회]] 및 부호, 지식인층 160여명을 체포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1_1911_01_01_0020|제목=安明根事件(安岳事件)을 계기로 黃海道 일대의 애국지사를 체포구금한 朝鮮總督府 警務總監部는 다시 平安道 일대의 抗日指導者와 기독교 세력을 일소시키기 위하여 1910년 11월27일 鴨綠江鐵橋 준공식에 참석하는 寺內總督을 암살모의했다는 허위의 사건을 조작|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oh_019_0030_0040_0040|제목=한국사 19 근대 - 대한제국의 종말과 의병항쟁 > Ⅲ. 抗日民族運動 > 4. 新民會의 活動 > (4) 105人事件|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그래서 안명근사건을 '안악사건(安岳事件)'이라고도 한다.
 
[[1911년]] [[8월 30일]] 김구는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강도 및 강도미수죄'를 적용받아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1_1911_08_30_0510|제목=安岳事件의 주모자 安明根 이하 관련자 전원에 대한 판결에서 재판장은 「강도 및 강도미수」죄로 각각 다음과 같이 언도하였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1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김좌진]]과 조우하였다.
 
[[1912년]]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ref name="위클리조선">{{서적 인용|제목=백범일지|저자=김구|이름=|날짜=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판=|출판사=돌베개|쪽=267|장=|출판위치=경기도 파주|ISBN=89-7199-148-8}}</ref>
 
[[1914년]] 7월인천 감형되어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죄수번호는 55호였다.<ref name="dladl1">{{서적 인용
|저자=김구
|제목=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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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경기도 파주
|ISBNid={{ISBN|89-7199-148-8}}
|쪽=440쪽}}</ref> 이어 서대문 감옥에 수감 도중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8월에 특별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병으로 죽었는데, 출옥후 어머니 곽씨로부터 소식을 접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쪽=440쪽}}</ref><ref name=":16" />
 
[[1915년]] [[8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특별 가출옥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gb_1915_09_03_a09260_0090|제목=조선총독부 관보 제0926호 - 假出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병으로 죽었는데, 출옥후 어머니 곽씨로부터 소식을 접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6년]] 문화 궁궁농장 간검(看檢)에 취임했고, 셋째딸 은경(恩慶)이 태어났다.<ref name="기념사 2" />
 
[[1916년]] 문화 궁궁농장 간검(看檢)에 취임했고, 셋째딸 은경(恩慶)이 태어났다.<ref name="연보4">[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4 백범김구기념사업회]</ref>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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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경기도 파주
|ISBNid={{ISBN|89-7199-148-8}}
|쪽=440~441쪽}}</ref>
 
=== 독립운동 및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기활동 ===
====경무국장 시절임정 (1919~1921)수립 초기 ====
===== 임시의정원 의원과 경무국장 (1919) =====
[[파일:1919년 임시의정원.jpg|섬네일|250px|right|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파일: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jpg|섬네일|160px|left|경무국장 시절 카이저 콧수염으로 단장한 김구 (1920년)]]
{{참고|대한민국 임시의정원|상하이 임시정부}}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참여하였다.<ref>1918년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ref> [[1919년]]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ref name="위클리조선" />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 정부]]에 참여, [[1919년]] [[4월 22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 내무부위원에 임명되었다.<ref name=":32" />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참여하였다.<ref>1918년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ref>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ref name="위클리조선" />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4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8월 12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부]]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파일:1919년 임시의정원.jpg|섬네일|250px|right|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1919년]]에는 [[9월내무총장]]에는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자신의 소원을 말하며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자 [[안창호]]는 그에게 [[경찰청|경무국장]](警務局長)을 천거하였다. 자신의 학식이 낮음을 이유로 경무국장직에 대한 사의를 표하였으나 [[안창호]]는 거절하면 젊은 사람들 아래에서 일하기 싫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하므로 그는 [[안창호]]의 임명을 받아들인다.
 
1919년 [[9월 11일]] 경성과통합 연해주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각지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서김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정부|통일 임시 정부임정]]가 구성되자 김구는 [[내무부]] 경무국장에[[경찰청|경무국장]](警務局長)에 취임하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였고, [[일제]]의 밀정 검거 활동을 하였다. 경호부장으로 [[여순근]]을 임명하고 한인 청년들을 고용하여 경찰, 정보감찰 업무, 밀정색출 업무를 분담시켰으며 동시에 재판소가 없는 임시정부에서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행사하였다.[[파일:1920 김구 가족.jpg|섬네일|180px|left|부인 최준례(오른쪽)와 장남 [[김인 (1917년)|김인]](가운데)]][[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김구는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ref>《백범일지(쉽게 읽는)》 (김구, 도진순 옮김, 돌베개, 2005.11) 211~212쪽.</ref><ref>《대한민국의 기원》 (이정식, 일조각, 2006) 407쪽.</ref> 일본 영사관 경찰은 임정 요인 체포를 위해 경무국장인 그를 사살하려 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스파이 [[선우갑]]·강린우(康麟佑)가 왔으나 자발적으로 그에게 이실직고하자 추방하였다. 일본 영사관의 첩자로 독립운동가를 따라 [[상하이]]에 나타났던 17세 소년 김도순을 총살하였고, 이후 일본 영사관과 [[조선총독부]]의 납치, 암살기도에 시달렸다. [[황학선]](黃鶴善)은 병원을 차리고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은 뒤 한번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약물로 독살하려 했다. 김구는 황학선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김구는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ref>《백범일지(쉽게 읽는)》 (김구, 도진순 옮김, 돌베개, 2005.11) 211~212쪽.</ref><ref>《대한민국의 기원》 (이정식, 일조각, 2006) 407쪽.</ref> 일본 영사관 경찰은 임정 요인 체포를 위해 경무국장인 그를 사살하려 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스파이 선우갑(鮮于甲)·강린우(康麟佑)가 왔으나 자발적으로 그에게 이실직고하자 추방하였다. 일본 영사관의 첩자로 독립운동가를 따라 [[상하이]]에 나타났던 17세 소년 김도순을 총살하였고, 이후 일본 영사관과 조선총독부의 납치, 암살기도에 시달렸다. [[황학선]](黃鶴善)은 병원을 차리고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은 뒤 한번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약물로 독살하려 했다. 김구는 황학선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 (1917년)|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다.<ref name="기념사 2" />
 
===== 의정원 의원 재선과 내무총장 시절 (1920 ~ 1921) =====
[[파일: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21.jpg|250px|right|섬네일|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맨 아랫줄 왼쪽에서 세번째 앉은 이가 김구(밝은색 양복)]]
[[파일:1920 김구 가족.jpg|섬네일|180px|left|부인 최준례(오른쪽)와 장남 [[김인]](가운데 있는 이)]]
1920년 12월경,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인사들의 임시 대통령 현지 부임 요청에 따라 [[하와이주|하와이]]에서 [[상하이시|상하이]]로 밀입국하였다. 김구는 [[상해 임시 정부]]에서 이승만과 첫 대면을 하였다. 김구는 대통령 이승만이 참석한 행사의 경호를 담당했다.<ref>{{웹 인용|url=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3/2019040300028.html|제목=1920년 12월, 상하이로 건너간 이승만… 김구를 처음 만나다|언어=ko|확인날짜=2020-09-07}}</ref> '이승만과 김구'를 쓴 [[손세일]]은 "이승만은 경무국장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김구에 대해 신뢰감을 느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독립운동 기간 내내 지속됐다"고 했다.
{{참고|대한민국 임시정부|국민대표자대회}}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다.<ref name="연보1919">[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4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ref> [[1921년]] [[5월]] [[경찰청|경무국장]]직에서 물러났고<ref name="김용원1">{{웹 인용 |url=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1569&page=1&search_1=&search_2=%EA%B9%80%EC%9A%A9%EC%9B%90&search_3=&search_4=&search_5=%EC%B6%9C%EC%83%9D%EC%A7%80&search_6=%EB%82%B4%EC%9A%A9&orderByName=&orderBy=#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8-11-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410153429/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1569&page=1&search_1=&search_2=%EA%B9%80%EC%9A%A9%EC%9B%90&search_3=&search_4=&search_5=%EC%B6%9C%EC%83%9D%EC%A7%80&search_6=%EB%82%B4%EC%9A%A9&orderByName=&orderBy=# |보존날짜=2016-04-10 |url-status=dead }}</ref>, 후임은 [[김용원 (1892년)|김용원]]이 임명되었다.<ref name="김용원1"/> 경무국장에서 물러남에 따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만 활동하게 되었다.
 
[[파일: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21.jpg|250px|right|섬네일|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첫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앉은 이가 김구]]
[[1921년]] [[5월]] 경무국장직에서 물러났고, 후임은 [[김용원 (1892년)|김용원]]이 임명되었다.
1922년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건너왔고, 그해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재당선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재선출되었다.<ref name="연보1919"/> [[1922년]] [[7월]] [[신익희]], [[안창호]], [[이시영 (1868년)|이시영]](李始榮), [[여운형]], [[조소앙]], [[이유필]]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내무부|내무부 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차남 [[김신 (1922년)|김신]](金信)이 출생하였다. [[10월]] [[여운형]]·[[조동호]]·[[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한국노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ref name="연보1919"/> 국민대표자대회 소집의 주요 인물이기도 한 [[박은식]]을 규탄, 성토하였고 그의 아들 [[박시창]]이 찾아와 항의하자 구타하기도 했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를 새로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구조만 수정하자는 [[개조파]]의 논쟁장으로 변하자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킨다.<ref name="동아광장">{{뉴스 인용
==== 김립 피살 사건 (1922) ====
|제목 = ‘연석회의’ 주장이 못미더운 이유
1922년 [[2월 8일]]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 청원징계과 위원에 선출되었다.<ref name=":32" />
|url =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510240065
|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신우철
|쪽 =
|날짜 = 2005-10-24
|확인날짜 = }}</ref> [[1922년]] [[2월]]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에게서 받은 200만 루블 중 40만불을 지불받은 [[한형권]]과 [[김립 (1880년)|김립]]에 대한 사살령을 내린다. [[노면직]], [[오종균]] 등은 [[상하이]]에서 [[김립 (1880년)|김립]]을 사살하였다. 그는 [[백범일지]]에 김립이 [[광둥]] 여자를 사서 축첩하고 호화생활을 하였다고 하였으나 [[김립 (1880년)|김립]]이 호화생활을 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후일 [[박노자]]는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ref name="hangpk1">http://www.hani.co.kr/section-021109000/2007/04/021109000200704120655080.html</ref>"는 것이다. [[박노자]]에 의하면 김립의 암살 원인은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고 분석했다.<ref name="hangpk1"/>
1922년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건너왔다.
 
==== 국무총리 대리 시절 ====
[[1922년]] 김구는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에게서 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 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한형권]]과 [[김립 (1880년)|김립]]에 대한 사살령을 내렸다. 이에 1922년 2월 6일 [[노면직]], [[오종균]] 등은 [[상하이]]에서 [[김립 (1880년)|김립]] 등을 사살하였다.<ref name="동아광장">{{뉴스 인용|url=http://www.donga.com/fbin/output?n=200510240065|제목=‘연석회의’ 주장이 못미더운 이유|저자=신우철|날짜=2005-10-24|출판사=[[동아일보]]|쪽=|확인날짜=}}</ref><ref name=":1">{{웹 인용|url=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109000/2007/04/021109000200704120655080.html|제목=‘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겨레21|확인날짜=}}</ref> 김구는 《[[백범일지]]》에 김립이 [[광둥]] 여자를 사서 축첩하고 호화생활을 하였다고 하였으나 [[김립 (1880년)|김립]]이 호화생활을 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고, 김구가 무고하게 암살을 한 것인지는 현대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파일:Yi Dong-nyung.jpg|250px|오른쪽|섬네일|임정 요인들(뒷쪽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이석]], [[김구]], [[조성환]], [[송병조]], (앞줄)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1923년]] [[4월 9일]] [[내무부|내무총장]]에 재임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국무총리|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정은 개조론과 창조론이 계속 대립하였으나 그는 임정 고수파가 된다. 그러나 임정의 해체와 개조를 놓고 국민대표자 대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김구는 [[1923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또한 임정을 거부하는 세력에 대한 상하이 추방령을 선언한다.
[[1922년]] [[7월]] [[신익희]], [[안창호]], [[이시영 (1868년)|이시영]], [[여운형]], [[조소앙]], [[이유필]]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23년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자발적인 자율방범대인 교민단 의경대를 설치할 때, 의경대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하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사망하여 불란서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ref>[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3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붙인 제목 -->]</ref> [[최준례]]는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했으나, 수배중이라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최준례는 뒤에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임정에서는 다른 요인의 부인들과는 다르게 불평불만이나 파란 없이 남편 김구를 내조한 최준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최준례의 비석은 [[한글]][[학자]]인 [[김두봉]]이 직접 지어 주었다.
1922년 9월 21일 차남 [[김신 (1922년)|김신]]이 출생하였다.
 
1923년 그는 청년 오면직, 노종균 등을 파견하여 [[러시아]]의 [[레닌]]에게 지원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김립 (1880년)|김립]] 등을 추격, 제거하도록 지시하였다. [[1922년]] [[2월 11일]] [[오면직]], [[노종균]] 등 을 파견해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 (1880년)|김립]] 등을 사살했다.<ref name="동아광장" /><ref>{{뉴스 인용
1922년 [[10월]] [[여운형]]·[[조동호]]·[[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ref name="기념사 2" />
|제목 =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url = http://www.hani.co.kr/section-021109000/2007/04/021109000200704120655080.html
|출판사 = [[한겨레21]]
|저자 = 박노자
|쪽 =
|날짜 = 2007-04-12
|확인날짜 = }}</ref> 그러나 자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견해도 있다.
 
[[백범일지]]에는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되었으나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ref>[http://www.hani.co.kr/section-021109000/2007/04/021109000200704120655080.html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칼럼 : 한겨레21<!-- 봇이 따온 제목 -->]</ref>
==== 내무총장 시절 (1923~1924) ====
[[파일:Yi Dong-nyung.jpg|250px|오른쪽|섬네일|임정 요인들(뒷쪽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이석]], 김구, [[조성환]], [[송병조]], (앞줄)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1920년]]대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23년]] 이후 구미위원부 소속 [[허정]] 등은 구미위원부 통보를 통해 임정으로의 송금을 촉구했고 구미의 각 동포들은 각자의 여유에 따라서 10달러, 또는 20달러 등을 구미위원부로 보내주어 얼마 되지 않아 몇천 달러의 돈이 모였다.<ref name="ee76">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샘터사, 1979) 76</ref> [[허정]]은 이 돈을 즉시 당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재정부장 [[이시영 (1868년)|이시영]](李始榮)에게 보냈다. 허정은 그때는 [[미국]]에서 [[상하이]]로 쉽게 송금했다고 한다.<ref name="ee76"/> 이 돈을 받자 김구와 이시영은 곧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허정에게 보냈고<ref name="ee76"/>, 김구는 자신이 독특한 붓글씨로 쓴 친필 자서전 [[백범일지]](친필)를 [[허정]]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ref name="ee76"/> 미주 동포들이 후원금과 성금을 보내면 그는 친필로 쓴 붓글씨와 [[백범일지]]의 사본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1923년]] [[12월]] 상해 [[한인]]교민단에서 치안조직인 의경대(義警隊)를 설치하였고, 김구는 상해 한인의경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23년]] [[4월 9일]] [[내무부|내무총장]]에 선출되었다. 이 당시 임정은 개조론과 창조론이 계속 대립하는 가운데 그는 임정고수파(현상유지파)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임정의 해체와 개조를 놓고 [[국민대표회의]]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김구는 [[1923년]] [[6월 25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01919230625e0032&set_date=19230625&page_no=3|제목=국민대표회해산명령(國民代表會解散命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조선일보|확인날짜=}}</ref> 또한 임정을 거부하는 세력에 대한 상하이 추방령을 선언한다. [[국민대표회의|국민대표대회]] 소집의 주요 인물이기도 한 [[박은식]]을 규탄, 성토하였고 그의 아들 [[박시창]]이 찾아와 항의하자 구타하기도 했다.<ref name="동아광장" />
 
[[1924년]] [[4월 23일]] [[국무총리|국무총리 대리]]에서 면직되었고, [[6월]]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노동부|노동국]] 총판을 겸임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사임한 후, [[박은식]], [[이상룡 (1858년)|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에 실패하였다. [[8월 29일]]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어머니의 환갑 잔치를 못한 것을 죄스러워하던 김구는 이후 자신의 생일잔치는 하지 않았다 한다.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1925년]] [[11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활동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차남 김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ref name="연보4" />
1923년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자발적인 자율방범대인 교민단 의경대를 설치할 때, 의경대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하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사망하여 프랑스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47&aid=0002043150&sid1=001|제목=새해 첫날, 나는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은 분에게 갑니다|언어=ko|확인날짜=2020-09-07}}</ref> [[최준례]]는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했으나, 수배중이라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최준례는 뒤에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임정에서는 다른 요인의 부인들과는 다르게 불평불만이나 파란 없이 남편 김구를 내조한 최준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최준례의 비석은 [[한글]][[학자]]인 [[김두봉]]이 직접 지어 주었다.
 
[[1926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ref name="oh288">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8페이지</ref>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23년 무렵 국내외 임정 연락망인 [[연통제]]가 완전히 와해되면서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김구는 독립운동의 자금 중 상당부분을 미국의 [[이승만]], [[안창호]] 등과 미국 교민들의 성금에 의존하였다. [[1923년]]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 소속 [[허정]] 등은 구미위원부 통보를 통해 임정으로의 송금을 촉구했고 재미 동포들은 각자의 여유에 따라서 10달러, 또는 20달러 등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로 보내주어 얼마 되지 않아 몇천 달러의 기금이 모였다.<ref name="ee76">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샘터사, 1979) 76</ref> [[허정]]은 이 돈을 즉시 당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재정부장 [[이시영 (1868년)|이시영]]에게 보냈다. 허정은 그때는 [[미국]]에서 [[상하이]]로 쉽게 송금했다고 한다.<ref name="ee76" /> 이 돈을 받자 김구와 이시영은 곧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허정에게 보냈고, 김구는 자신이 독특한 붓글씨로 쓴 친필 자서전 [[백범일지]](친필)를 [[허정]]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ref name="ee76" /> 미주 동포들이 후원금과 성금을 보내면 그는 친필로 쓴 붓글씨와 [[백범일지]]의 사본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1926~1929) ====
[[1923년]] [[12월]] 상해 [[한인]]교민단에서 치안조직인 의경대(義警隊)를 설치하였고, 김구는 상해 한인의경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26년]] [[9월]] 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ref name="위클리조선" /> 임시정부도 정부인데 한미한 가계에서 태어난 자신이 수반이 되는 것은 정부의 위신을 격하시킬수 있을 것, [[이상룡]], [[안창호]], [[홍진|홍면희]]은 실력을 갖추었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입각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렇다할 배경이 없는 자신이 수상이 되면 다른 실력과 배경을 갖춘 독립운동가들이 더욱 호응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동녕]]과 임정 요인들의 거듭된 요구로 김구는 국무령직을 수락한다.
 
임시정부는 [[1926년]] [[12월 14일]] 김구를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국무령이 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치고 주석을 맡았다. [[1927년]] [[4월 10일]] 후계내각 발표로 국무령에서 총사퇴하고, 국무위원회의 초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임명되었다.<ref name="pp119">《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이연복 지음, 국학자료원, 2006) 119페이지</ref> 이어 각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다.<ref name="20후">[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5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따온 제목 -->]</ref> [[1930년]] [[1월]] [[상하이]] 불조계에서 [[이시영 (1868년)|이시영]](李始榮),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당무이사에 선출되었다. [[1927년]] [[9월]]에는 장남 김인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ref name="20후"/>
내무총장 도중 [[1924년]] [[4월 9일]]부터 [[4월 23일]]까지 [[국무총리|국무총리 대리]]를 잠시 겸임하였다. [[6월 2일]]부터 [[12월 17일]]까지는 노동국 총판을 겸임하였다.<ref name=":17" /><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01_0020_00330|제목=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第40號|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임정의 재정난 ====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된 후, [[박은식]], [[이상룡 (1858년)|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는 내각 구성에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파일:김구-이승만 1928년 서신.PNG|섬네일|right|200px|[[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
[[파일:Kim Gu 1930.jpg|섬네일|left|200px|1930년대 초의 김구]]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조계(프랑스 대사관 관할구역)와 영국 조계,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찰|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임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일부는 생계를 위해 다른 곳에 취직했다. 김구는 임시정부 운영 자금의 대부분을 재중국 한국인 교민단체와 교포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모금, 중국인 기업체에 근무하는 한인, 중국의 군인·공무원으로 취직한 한인, 시장 상인, 아편장사 등이 내는 돈에 의존했으며, 일부는 [[3인조 암살단]]등 비밀조직을 움직여 일본군의 군자금 탈취하여 조달하기도 하였다.<ref>[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20912.010110745450001 논픽션 龜尾史 .12 박희광, 온몸을 던져 구국의 꽃이 되다]</ref>
1925년 [[8월 29일]]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어머니의 환갑 잔치를 못한 것을 죄스러워하던 김구는 이후 자신의 생일잔치는 하지 않았다 한다. [[11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아들의 활동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차남 김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ref name="연보4">[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4 백범김구기념사업회]</ref>
 
자금을 걷을 인력이 부족해 김구 자신과 임정 직원들이 직접 성금과 자금을 걷으러 다녔다. 이재에 밝지 못했고 장사수완이 부족했던 김구는 사업이나 장사에 종사할 수도 없었다. '두상'(頭相), '수상'(首相)이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이후, 한인 교포들은 그에게 '두상','수상'이라 불렀다. 망명정부의 수반이라는 위치 역시 그를 장사나 공업, 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던 원인이 되었다.
==== 친일파 척결 및 일본영사관 폭파 미수 (1924) ====
[[1924년]]에는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 [[오동진]] 선생에게 만철연선(萬鐵沿線)의 친일파를 토벌 하라는 특명을 내려,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으로 3인조 암살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친일파인 보민회괴수(保民會魁首) [[최창규]](崔晶奎)의 가족을 백주(白晝)대낮에 토벌했다. 이 사건은 1924년 7월 26일자 독립신문에 크게 게재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여순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 [[이등박문]]의 [[수양녀]]이자 매국녀인 [[배정자]], [[일진회]] 회장 [[이용구]] 등을 암살 하라는 지령으로 암살을 시도하였다.
 
변변하지 못한 임정 청사의 월세도 대지 못해 김구는 늘 쩔쩔맸다. [[정화암]]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와중에도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고 임정의 충복인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다 한다. '그때 임정에는 삥천이라는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렇게 충성스러운 하인이 없었다.<ref name="hak399">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페이지</ref>'는 것이다. 이런 충복에게 몇 푼 안되는 월급을 몇년 동안 주지 못하였다. 삥천의 부인이 해산할 때 돈이 없어 밀린 월급의 일부만이라도 달라는 호소 조차 들어주지 못할 정도였다.<ref name="hak399"/>
[[1924년]] 7월에는 일본 주요관계자 및 요인제거를 목적으로 [[박희광]] 등이 봉천성 [[일본영사관]] 폭파를 시도했으나, 불발로 실패했다.<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9628&yy=2011 매일신문 2011년2월28일자 애국지사 박희광 항일 암살단 활약상, 독립신문서 보도]</ref> 이들은 같은날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당시 일본군 장성이 드나들던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하여, 거액 군자금을 탈취,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경찰과 총격전 끝에,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 [[김병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김구는 이외에도 친일파 척결작업과 부족한 자금조달을 위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활동을 배후에서 비밀리에 지휘 또는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 후, [[이승만]]은 미주지역의 성금을 독식했고 임정으로의 직접 송금도 가로막았다. 김구는 1928년 이후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자신도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요청을 거절하였으나, 자금의 일부를 임정으로 보내주었다.
==== 국무령 시절 (1926) ====
[[1926년]] [[5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ref name="oh288">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8페이지</ref>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32년 5월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임시정부의 김구 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임정에 흘러오는 자금에 활기를 띄었다. 1925년,26년 무렵 국내의 임정 연락망인 연통제가 완전히 와해되면서 김구는 독립운동의 자금 중 상당부분을 미국의 [[이승만]], [[안창호]] 등과 미국 교민들의 성금에 의존하였다. [[1929년]] [[8월]] 상해 [[한인]][[교민단]]장에 선출되었고<ref name="20후" />, [[1930년]] 다시 국무령에 선출되었다.<ref>http://www.kimgu.or.kr/menu_2/index.html</ref> 자금난과 독립운동가들의 이탈, 변절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키고 임정의 법통을 수호해 나갔다.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의 창당 작업에 참여하였다.
[[1926년]] [[9월]] 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임시 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ref name="위클리조선" /> 임시정부도 정부인데 한미한 가계에서 태어난 자신이 수반이 되는 것은 정부의 위신을 격하시킬수 있을 것, [[이상룡]], [[안창호]], [[홍진|홍면희]]은 실력을 갖추었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입각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렇다할 배경이 없는 자신이 수상이 되면 다른 실력과 배경을 갖춘 독립운동가들이 더욱 호응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동녕]]과 임정 요인들의 거듭된 요구로 [[1926년]] [[12월 10일]] 김구는 [[국무령]]직을 수락하였다.<ref name=":17" />
 
==== 항일의거와 군사단체 조직 노력 ====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곤란한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라고 하면서, 국무령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 어렵다고 판단, 개헌을 추진하였다. [[김갑]], 이규홍(李圭洪) 등을 중심으로 약헌기초위원회(約憲起草委員會)를 구성하였고, 이를 통해 개헌안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3차 개헌안이 마련되었고,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약헌(大韓民國臨時約憲)이라고 하였다. 이는 1927년 [[2월 15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을 통과하였고, [[1927년]] [[4월 11일]] 공포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국무령제가 폐지되고 국무위원제로 개편됐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01_$2exp|제목=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권 헌법 · 공보 해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24~1930) =====
{{참고|대한통의부|박희광|김광추|김병현}}
====== 친일파 제거와 일본영사관 폭파 미수 ======
[[1924년]]에는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오동진]] 선생에게 만철연선(萬鐵沿線)의 친일파를 토벌 하라는 특명을 내려, [[박희광]](朴喜光), [[김광추]](金光秋), [[김병현]]으로 3인조 암살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친일파인 보민회괴수(保民會魁首) 최창규(崔晶奎)의 가족을 백주(白晝)대낮에 토벌했다. 이 사건은 1924년 7월26일자 독립신문에 크게 게재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여순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鄭甲周),[[이등박문]]의 [[수양녀]]이자 매국녀인 [[배정자]](裵貞子), [[일진회]] 회장 [[이용구]]등을 암살 하라는 지령으로 암살을 시도하였다.
같은해 7월에는 일본 주요관계자 및 요인제거를 목적으로 [[박희광]](朴喜光)등이 봉천성 [[일본영사관]] 폭파를 시도했으나, 불발로 실패했다.<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9628&yy=2011 매일신문 2011년2월28일자 애국지사 박희광 항일 암살단 활약상, 독립신문서 보도]</ref> 이들은 같은날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당시 일본군 장성이 드나들던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하여, 거액 군자금을 탈취,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경찰과 총격전 끝에,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 [[김병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김구는 이외에도 친일파 척결작업과 부족한 자금조달을 위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활동을 배후에서 비밀리에 지휘 또는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 내무부장,일본 재무요인 겸 군무부장 시절암살 활동(19271930~1932) =====
[[파일:KimGu and YoonBongGil.JPG|180px|right|섬네일|[[1932년]] [[4월]] [[윤봉길]]과 함께]]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내무부장에 선출되었다.<ref name="pp119">《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이연복 지음, 국학자료원, 2006) 119페이지</ref><ref name=":17" /> 이어 각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다.<ref name="20후">[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5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따온 제목 -->]</ref> [[1927년]] [[9월]]에는 장남 [[김인 (1917년)|김인]]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ref name="기념사 2" />[[파일:Kim Gu 1930.jpg|섬네일|left|200px|1930년대 초의 김구]][[파일:김구-이승만 1928년 서신.PNG|섬네일|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서신.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 조계(프랑스 대사관 관할구역)와 영국 조계,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찰|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정]]을 떠나거나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일부는 생계를 위해 다른 곳에 취직했다. 김구는 임시 정부 운영 자금의 대부분을 재중국 한국인 교민단체와 교포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모금, 중국인 기업체에 근무하는 한인, 중국의 군인·공무원으로 취직한 한인, 시장 상인, 아편장사 등이 내는 돈에 의존했으며, 일부는 [[3인조 암살단]]등 비밀조직을 움직여 일본군의 군자금 탈취하여 조달하기도 하였다.<ref>[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20912.010110745450001 논픽션 龜尾史 .12 박희광, 온몸을 던져 구국의 꽃이 되다]</ref> 자금을 걷을 인력이 부족해 김구 자신과 임정 직원들이 직접 성금과 자금을 걷으러 다녔다. 이재에 밝지 못했고 장사수완이 부족했던 김구는 사업이나 장사에 종사할 수도 없었다.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이후, 한인 교포들은 그를 '두상(頭相)', '수상(首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망명정부의 수반이라는 위치 역시 그를 장사나 공업, 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던 원인이 되었다. 변변하지 못한 임정 청사의 월세도 대지 못해 김구는 늘 쩔쩔맸다. [[정화암]]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와중에도 임시 정부를 떠나지 않고 임정의 충복인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다 한다. '그때 임정에는 삥천이라는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렇게 충성스러운 하인이 없었다.<ref name="hak399">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페이지</ref>'는 것이다. 이런 충복에게 몇 푼 안되는 월급을 몇년 동안 주지 못하였다. 삥천의 부인이 해산할 때 돈이 없어 밀린 월급의 일부만이라도 달라는 호소조차 들어주지 못할 정도였다.<ref name="hak399" />
{{참고|한인애국단|이봉창|윤봉길|유상근|최흥식}}
====== 이봉창 의거와 이즈모호 폭파 미수 ======
[[1930년]] [[8월 4일]] [[국무총리|국무령]]에 임명되었고, [[1930년]] [[11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재무부|재무부장]](財務部長)에 선출되었다.<ref name="pp119"/> 이때 김구는 [[1927년]] 신약헌에 의한 국무 위원제의 국무위원회가 채택된 이후 그간 4년간의 정부 예산 집행의 결산서(決算書)를 무더기로 의정원 의장 앞으로 제출하였다.<ref>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독립운동사 제4권 : 임시정부사》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576페이지</ref>
 
[[1931년]]에는 일본 정부 및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1922년 만주에서 결성한 대한통의부 산하 암살 비밀조직<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7096&yy=2012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생가 복원 올해 넘기나?]</ref>
[[1928년]] [[10월 16일]] [[박용만 (1881년)|박용만]]이 [[텐진]]에서 [[의열단]] 단원 [[박인식]],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내의 언론과 방송 담화를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의열단]]의 경쟁세력인 임시정부의 김구가 나서서 이승만에게 박용만은 총독부에 매수된 밀정이라는 답신을 보냈으나 이승만은 그럴리 없다면서 비난 철회를 거부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42_0020_01890|제목=189. 金九가 李承晩에게 보낸 서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을 강화해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정부]] 내에 테러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ref>한인애국단 조직시기는 1928년설도 있다.</ref> 김구는 홍보를 통해 청년 단원을 모집하였고, [[1931년]] 말 [[일본어]]에 능한 [[이봉창]](李奉昌)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잘 구사하던 이봉창을 의심하였으나 같이 지내면서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ref>백범 김구의 전기영화인 아!백범에서도 이봉창이 찾아왔을 때 임정관계자들이 의심하는 내용이 나온다.</ref> [[이봉창]]이 왜 [[일본 천황|천황]]을 죽이지 못하느냐고 힐난하자, 김구는 자극을 받아 [[이봉창]]이 묵던 숙소로 찾아갔고, 이어 [[쇼와 천황|히로히토 천황]]이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일본]] [[도쿄]]에 파견하여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한편 [[2월 12일]]에는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 상하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신형 잠수정 이즈모 호({{lang|ja|出雲号}})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배 밑에 폭탄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머뭇거리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 윤봉길 의거 ======
[[1929년]] 5월 《[[백범일지]]》 상권을 탈고하였다.
[[2월]]에는 [[윤봉길]]이 입단하자 [[중화민국]] 정부 요인인 [[왕백수]], [[진과부]] 등과 중국군에 복무하던 [[김홍일 (1898년)|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 [[3월 3일]] [[윤봉길]]을 [[상하이]]로 파견, [[상하이]]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1차 상하이 사변|상해사변]]에서 [[중화민국]]이 패전하여 비행장 접근이 어려워 실패하였다. [[4월]]초,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제1차 상하이 사변|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파견하여 [[윤봉길#생애|훙커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를 지휘하였다.
 
윤봉길의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여러 명 부상을 입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의 계기가 된 이 의거 직후 김구는 [[상하이]]를 빠져나가지 못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 비서 [[엄항섭]], 김철과 함께 [[미국]]인 [[장로교|장로교회]]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2018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함)의 집에서 20여 일간 숨어 지내야 했다.<ref name=autogenerated8>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편집부 지음 | 김승일 번역 | 시대의창출판사 | 2006-04-22) 399</ref><ref>{{웹 인용|url=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bbs_view.asp?ID=266&ipp=10|제목=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 공훈내용|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4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의 [[만주사변]]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만주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키로 했다.<ref name="다롄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071292 <광복 60주년 특집> ③무명의 독립운동가들] 연합뉴스 2005-08-10일자</ref>
[[1929년]] [[8월]] 상해 한인교민단장에 선출되었다.<ref name="기념사 2" />
 
====== 조선 총독 암살 미수 ======
[[1930년]] [[1월 25일]] [[상하이]] 불조계에서 [[이시영 (1868년)|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 당무이사에 선출되었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2차 거사를 보내기 직전 김구는 [[유진식]]과 [[이덕주 (1908년)|이덕주]]를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조선]]에 보내 [[조선총독]] [[우카키 가즈시게]] 암살을 지시하였다.
 
김구는 이봉창의 동경의거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할 준비를 진행하는 한편으로 윤봉길의 의거를 준비하기에 앞서 두 명의 한인애국단원을 국내로 파견하였다.<ref name="kuisets">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27 : 의열투쟁 2》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253</ref> 국내로 파견된 대원은 이덕주와 유진식이며, 이들에게 김구가 내린 임무는 조선총독의 처단이었다.<ref name="kuisets"/>
[[1930년]] [[11월 18일]] 김구는 내무부장 임기를 마치고 재부무장 겸 군무부장에 선출되었다.<ref name=":17" /> 이때 김구는 [[1927년]] 신약헌에 의한 국무 위원제의 국무위원회가 채택된 이후 그간 4년간의 정부 예산 집행의 결산서(決算書)를 무더기로 의정원 의장 앞으로 제출하였다. 자금난과 독립운동가들의 이탈, 변절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키고 임정의 법통을 수호해 나갔다.<ref>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독립운동사 제4권 : 임시정부사》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576페이지</ref>
 
{{인용문|이덕주(李德柱), 유진식(兪鎭植)은 왜총독 암살을 명하여 선파(先派) 입국하고 유상근(柳相根), 최흥식(崔興植)은 만주에 본장번(本藏番) 등 암살을 명하여 상기 진행코자 할 즈음에}}
[[1931년]] [[11월 6일]]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ref name=":32" />
 
==== 한인애국단 지휘 (1931~1932) ====
=====[[이봉창 의거]]=====
[[1931년]] 10월 [[대한통의부]] 산하 암살 비밀조직을 강화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정부]] 내 항일무장투쟁단체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7096&yy=2012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생가 복원 올해 넘기나?]</ref> 김구는 홍보를 통해 청년단원을 모집하였고, [[1931년]] 말 [[일본어]]에 능한 [[이봉창]](李奉昌)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잘 구사하던 이봉창을 의심하였으나 같이 지내면서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ref>백범 김구의 전기영화인 아!백범에서도 이봉창이 찾아왔을 때 임정관계자들이 의심하는 내용이 나온다.</ref> [[이봉창]]이 왜 [[일본 천황|천황]]을 죽이지 못하느냐고 힐난하자, 김구는 자극을 받아 [[이봉창]]이 묵던 숙소로 찾아갔고, 이어 [[쇼와 천황|히로히토]]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일본]] [[도쿄]]에 파견, [[사쿠라다몬]]({{lang|ja|桜田門}})에서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 출운호(이즈모호) 폭파미수 =====
[[1932년]] [[2월 12일]]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 상하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출운호(出雲號, [[이즈모 (장갑순양함)|이즈모]]호)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배 밑에 폭탄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머뭇거리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훙커우 공원 사건|윤봉길 의거]]=====
[[파일:KimGu and YoonBongGil.JPG|180px|right|섬네일|[[1932년]] [[4월]] [[윤봉길]]과 함께]]
1932년 [[2월]] [[윤봉길]]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자 [[중화민국]] 정부 요인인 [[왕백수]], [[천궈푸]](진과부) 등과 중국군에 복무하던 [[김홍일 (1898년)|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 [[3월 3일]] [[윤봉길]]을 [[상하이]]로 파견,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중화민국]]이 패전하여 비행장 접근이 어려워져 포기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제1차 상하이 사변|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4월 24일 김구는 이덕주와 유진식 두 명의 한인애국단원에게 조선총독 [[우원일성]](宇垣一成)을 처단할 것을 명하고 국내로 파견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새벽 6시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아침식사를 같이 하였다. 자신의 손목시계를 영원한 이별의 기념으로 김구에게 건넨 윤봉길은 7시경 거사장소인 [[훙커우 공원]]으로 향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5_0040_00010|제목=1. 『한국의 광복을 위한 중국정부의 지원에 대한 회상』|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윤봉길의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여러 명 부상을 입었다. [[4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의 [[만주사변]]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만주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키로 했다.<ref name="다롄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071292 <광복 60주년 특집> ③무명의 독립운동가들] 연합뉴스 2005-08-10일자</ref>
 
{{인용문2|한인청년당원은 김구 일미가 계획한 흉폭행위실행의 역할을 감당하고 이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이나 그 간부 중 이미 이덕주라 칭하는 서리균(徐利均)과 유진식이라 칭하는 유진만(兪鎭萬)은 황해도에서, 주천현朱天懸이라 칭하는 유상근과 최흥식은 대련에서, 또 송진표(宋鎭杓)라 칭하는 장현근(張鉉瑾)과 김덕근(金德根)은 당관에 체포당했음으로...<br /><br />홍구공원폭탄사건의 하수인 윤봉길에 수교한 90불, 최흥식에게 지급한 580불전후 3회에 걸쳐, 유상근에 지급한 1,000불전후 2회, 이덕주에 지급한 120원, 유진만에 수교한 60불, 김긍호(金兢鎬)에 지급한 50불 합계 1,900불의 흉폭행위자금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는 직후 알 자료가 없어 명료하지 않으나 본년 3월 20일 불계에서 한인측 김구, 김철, 조소앙 등이 상의하고 중국측 광동파 호용청(胡用淸) 등과 더불어 중한민족항일대동맹(中韓民族抗日大同盟)을 조직한 사실에서 추찰하여 아마 우 동맹의 중국측 간부를 통해 혹은 광동파 내지 19로군 간부로부터 지출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ref>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27 : 의열투쟁 2》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255</ref>|[[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보고서}}
1932년 5월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임시정부의 김구 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김구의 세계적 명성은 치솟았고 임정에 흘러오는 자금에도 활기를 띄어 재정난이 해소되었다.
 
4월 24일과 28일 사이에 조선총독을 처단할 임무를 띄고 국내로 파견된 유진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ref>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27 : 의열투쟁 2》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254</ref> 이후 이덕주도 해주에서 체포됨으로써 조선총독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 조선총독 암살미수 =====
[[1932년]] [[4월]] 김구는 [[훙커우 공원 사건|윤봉길 의거]]를 보내기 직전 한인애국단 [[유진식]]과 [[이덕주 (1908년)|이덕주]]를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조선에 파견해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암살을 지시하였다.<ref name="ches1">신용하, 《백범 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312페이지</ref> 하지만 4월 24~28일 사이에 [[유진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ref>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27 : 의열투쟁 2》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254</ref> 이후 [[이덕주 (1908년)|이덕주]]도 해주에서 체포됨으로써 조선총독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 만주철도 폭파미수 ======
[[1932년]]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정부]]의 [[국방부|군무부장]](軍務部長)에 임명되었다. 5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滿鐵)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김구는 [[한인애국단|한인애국단원]] [[유상근]](柳相根), 최흥식을 [[3월]]말과 [[4월 27일]] 각각 [[만주]] [[다롄]]으로 파견하였다.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滿鐵)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구는 [[한인애국단|한인애국단원]] 유상근(柳相根), 최흥식을 [[1932년]] [[3월]] 말과 [[4월 27일]]에 각각 [[만주]] [[다롄]](대련)으로 파견하였다.<ref name="ches1" /> 유상근은 상해를 출발하기 2~3일 전인 [[4월 25일]] 임시정부 청사가 위치해 있는 보경리 4호 문 앞에서 [[훙커우 공원 사건|윤봉길 의거]]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의 수통형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 2개를 받았다. 2개의 폭탄 중 도시락 형태의 폭탄은 김구에게 돌려주고 수통형 형태의 폭탄 1개를 받아 자신의 거주지인 살파새로 188호 3층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 폭탄을 갖고 [[4월 27일]] 상해를 출발하여 [[5월 4일]] [[다롄시|다롄]]에 도착하였다.<ref name="hamnmanpa">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27 : 의열투쟁 2》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265</ref> 유상근보다 한 달 먼저 배편으로 상해를 출발하여 대련에 도착해 있던 최흥식은 북대산통(北大山通) 5호 한인어부조합 내 김정순(金正順)의 집에서 거주하며, [[다롄시|다롄]]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최흥식은 상해를 출발할 때 김구에게 먼저 대련의 상황을 확인하고 폭탄이나 권총을 사용하여 본장번(本庄繁) 일본 관동군사령관, 내전강재(內田康哉) 남만철도 총재, 산강만지조(山岡萬之助) 관동청장관 등을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받았다.<ref name="hamnmanpa" />
 
유상근은 상해를 출발하기 2~3일 전인 4월 25일 임시정부 청사가 위치해 있는 보경리 4호 문 앞에서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의거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의 수통형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 2개를 받았다. 2개의 폭탄 중 도시락 형태의 폭탄은 김구에게 돌려주고 수통형 형태의 폭탄 1개를 받아 자신의 거주지인 살파새로 188호 3층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 폭탄을 갖고 4월 27일 상해를 출발하여 5월 4일 대련에 도착하였다.<ref name="hamnmanpa">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27 : 의열투쟁 2》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265</ref>
[[1932년]] [[5월 26일]] 오후 7시 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 연맹]]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유상근]], [[최흥식]]은 [[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으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을 통해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과 정보원 최흥식, 폭탄 운반책인 이성원·이성발 등이 모두 체포됐다.<ref name="다롄1" />
유상근보다 한 달 먼저 배편으로 상해를 출발하여 대련에 도착해 있던 최흥식은 북대산통(北大山通) 5호 한인어부조합 내 김정순(金正順)의 집에서 거주하며, 대련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최흥식은 상해를 출발할 때 김구에게 먼저 대련의 상황을 확인하고 폭탄이나 권총을 사용하여 본장번(本庄繁) 일본 관동군사령관, 내전강재(內田康哉) 남만철도 총재, 산강만지조(山岡萬之助) 관동청장관 등을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받았다.<ref name="hamnmanpa"/>
 
[[5월 26일]] 오후 7시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유상근]], [[최흥식]]은 [[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으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을 통해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과 정보원 [[최흥식]], 폭탄 운반책인 이성원ㆍ이성발 등이 모두 체포됐다.<ref name="다롄1"/> [[이봉창]]의 동경 일본궁성 폭탄투척사건과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는 김구에게 생활비와 공작활동비를 제공해 주었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3페이지</ref>
==== 임시정부 이동시기 (1932~1940) ====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사건|윤봉길 의거]]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4년 상해시대를 마감하고 이동해야만 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는 [[항저우시|항저우]](항주)와 진강으로 이동하였다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선이 확대되자 장사-광주-유주-기강으로 옮겨 다녔다. 1940년 5월 중국의 전시수도인 [[충칭시|중경]]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는 8년에 가까운 이동시기를 거쳤다.<ref name=":11">{{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44_$1exp|제목=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4권 사진자료 해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상해수배, 탈출피신 및 장제스와 제휴생활 (1932~19341933) =====
[[파일:Chiang Kai-shek in 1912.jpg|섬네일|200px|right|[[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5월]] 상해 각 신문에 상해폭탄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하고 [[상하이]]에서 탈출했다. 그 뒤 임시정부, 상해에서 항주로 옮길 때 군무부장에 취임하였으나,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가흥·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장진구'(長震球, 張震球) 또는 '장진'(長震, 張震)으로 행세하며 숨어지냈다. 김구의 친할머니가 장씨(張氏)였기 때문에 성을 장씨로 바꾼 것이다. 가흥에서 김구는 주애보라는 처녀 뱃사공과 위장결혼하여 일경을 피해다녔는데, 김구는 주애보와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겼다고 회고하였다. 하련생의 소설 '선월'은 김구의 가흥에서의 도피생활을 소재로 삼았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사건|윤봉길 의거]]가 김구는 군무부장 [[김철 (1886년)|김철]]과 행동을 같이 하며 당지 교통대학 체육교사 중국국적의 한국인 [[선궈췐]](신국권)의 주선으로 일찍이 [[김철 (1886년)|김철]]의 면식이 있는 외국인기독교청년회 주사 미국인 [[조지 애시모어 피치]]의 비호를 받아 그가 아는 모목사의 사택에 잠복하였다.<ref name=":19">{{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0780|제목=78. 폭탄사건 후에 있어서의 金九 일파의 기타 동정 보고|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한편 김구는 이때 [[주애보]]와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 그녀에게 여비로 겨우 100위안을 준 일이다. 그녀는 근 5년 동안 나를 광저우 사람인 줄 알고 섬겨왔고 나를 보살핀 공로가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자 외에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soc&arcid=0920995363&cp=nv{{깨진 링크|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soc&arcid=0920995363&cp=nv }} <nowiki>[</nowiki>백범과 망명지의 세 여인<nowiki>]</nowiki> ③처녀 뱃사공 주아이빠오(朱愛寶) 국민일보 2008년 08월 13일자]</ref>'라고 하였다. 이후 김구의 후손들은 주애보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ref>[http://www.namdonews.com/?xmode=contents&uid=269836&section=%EA%B8%B0%ED%9A%8D <nowiki>[</nowiki>레저<nowiki>]</nowiki> 일제에 맞서 韓·中 애국지사들 사랑과 우정 꽃피웠다] 남도일보 2009년 10월 16일자</ref>
1932년 5월 10일경 김구는 상해 각 신문에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9_0020_01200|제목=120. 金九, 자신이 虹口公園 폭탄투척사건의 주모자임을 스스로 밝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후 [[일본 제국|일제]]에 의해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고 한다. 김구가 [[일본 제국|일제]]에게 수배되자 [[장제스]](장개석)는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천궈푸]](진과부)에게 김구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천궈푸]]는 상해의 피치 박사 집에 은신해 있던 김구를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시키고자 하였고, 그것을 조직부에서 일하고 있던 [[샤오정]](소쟁)에게 맡겼다. [[샤오정]]은 그가 잘 알고 지내던 [[추푸청]](저보성)에게 부탁하였다. [[추푸청]]은 [[중국 국민당]] 당원으로 [[저장성]](절강성) 주석을 역임한 바 있고 [[자싱시|자싱]](가흥)의 유지였다.<ref name=":18">{{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2_$1exp|제목=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2권 대중국 외교활동 해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옥관빈 암살(1933) =====
1932년 [[5월 14일]] 김구는 [[상하이시|상하이]]를 탈출해서 [[항저우시|항저우]]로 가서 쥐잉뤼서(聚英旅社)에 투숙하였다. 그리고 3일 후 [[자싱시|자싱]]으로 이동해 [[추푸청]]의 집에 피신하였다.<ref name=":19" /> 이후 [[장제스]]-[[천궈푸]]-[[샤오정]]-김구로 이어지는 연락통로가 마련되었다. 상호간의 연락은 주로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중국 국민당]]의 [[공패성]]이 남경과 [[자싱시|자싱]]을 오가며 연락을 담당하였고, 또 [[중국 국민당]]에 근무하고 있던 [[박찬익 (1884년)|박찬익]]도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천궈푸]]는 중요한 사항의 경우에는 [[장제스]]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맡았다.<ref name=":18" />
[[파일:옥관빈.JPG|썸네일|왼쪽|120px|[[옥관빈]]]]
옥관빈이 암살당한 사건.
 
백범일지에는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ref>김구,도진순, 《백범일지》,돌베개,2002</ref>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선 옥관빈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ref>《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ⅱ,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1,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2,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3,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4, 2009</ref>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20</ref>에는 옥관빈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ref>《친일인명사전 1》;《친일인명사전 2》;《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ref>
이후 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장진구'(長震球, 張震球) 또는 '장진'(長震, 張震)으로 행세하며 숨어지냈다. 김구의 친할머니가 장씨(張氏)였기 때문에 성을 장씨로 바꾼 것이다. [[자싱시|자싱]]에서 김구는 주아이바오(주애보)라는 처녀 뱃사공과 위장결혼하여 일경을 피해다녔는데, 김구는 주애보와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겼다고 회고하였다. 하련생의 소설 '선월'은 김구의 [[자싱시|자싱]]에서의 도피생활을 소재로 삼았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주애보와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 그녀에게 여비로 겨우 100위안을 준 일이다. 그녀는 근 5년 동안 나를 광저우 사람인 줄 알고 섬겨왔고 나를 보살핀 공로가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자 외에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이후 김구의 후손들은 주애보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5&aid=0000325879&sid1=001|제목=[백범 김구와 망명지 세 여인] (하)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혁명가를 사랑한 한족 여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국민일보}}</ref><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79&aid=0003213313&sid1=001|제목=백범과 네명의 여인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노컷뉴스}}</ref>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근거가 없다고 결론이 나왔다.
[[일본 제국|일제]]에 수배를 당하면서 [[1933년]] [[3월 22일]] 군무부장직에서 사임하였다.<ref name=":17" /> [[10월 3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에서 해임되었다.<ref name=":32" />
 
또한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이란 가설은 어디에도 확인이 되지않는다. 구글학술검색에 의하면 옥관빈이 논란이 되는 건 밀정여부로만 나오며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원인설은 확인되지 않는다.<ref>검색결과 2020년 10월 18</ref>
김구와 [[장제스]] 사이의 연락관계가 맺어지면서 [[1933년]] 5월 김구는 [[박찬익 (1884년)|박찬익]]을 통해 [[장제스]]와의 면담을 추진하였다. 이에 중국 측에서는 [[천궈푸]], 김구, [[장제스]]의 면담을 주선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8">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편집부 지음 | 김승일 번역 | 시대의창출판사 | 2006-04-22) 399</ref> 5월 [[장제스]]와 만났으며,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그에 비해 사학계 외부인인 언론인 겸 국회의원인 손세일은 옥관빈을 밀정이라 주장했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609100025</ref>
[[1934년]]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자싱시|자싱]]으로 온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다시 만났다.
 
===== 광복군 조직 노력 (1933~1937) =====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ref name="fff">[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5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5쪽].</ref> 의거와 피신 이후 [[한인애국단]]의 관리가 어렵게 되자 한인애국단은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한국특무대독립군으로 흡수, 개편되었다.
[[파일:광복군 성립식.JPG|썸네일|200px|left|[[광복군]] 성립전례식에 참석한 김구 (우측)]]
 
{{본문|한국 광복군}}
===== 김원봉과의 갈등 (1935~1937) =====
1930년대 중반부터 [[중화민국|중국 국민당]]은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의견의 대립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3년]] [[장쑤 성]] 자싱(가흥)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추격당하였다. 이때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 그러나 상하이 법대총장 [[추푸청|저보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자싱으로 옮겼다. [[1933년]] 5월 [[박찬익 (1884년)|박찬익]]을 통해 [[장제스|장개석]]과 면담을 추진하였는데 중국 측에서는 [[진과부]],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을 주선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8 /> 5월 장개석과 만났으며, 면담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강소성]]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다시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ref name="fff">[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5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5쪽].</ref> 의거와 피신 이후 한인애국단의 조직이 어렵게 되자 한인애국단은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한국특무대독립군으로 흡수, 개편된다.
[[1935년]] [[5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해체론이 나오자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정]] 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한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중화민국|중국 국민당]] 정권은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의견의 대립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5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해산론이 나오자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7월]] [[조소앙]]·[[김두봉]] 등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해체와 단일신당결성을 주장하여 [[한국독립당]]의 해체를 선언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6>이근호, 《한국사 사전》 (이근호 편 지음, 청아출판사, 2006) 517쪽</ref> [[10월]] 김구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정의정원|임시의정원]] 의원의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ref name="ha1">하련생, 《선월》 (하련생 지음, 강영매 번역, 범우사, 2007) 521페이지</ref> 김구는 남경중앙정부와의 관계와 명망으로 [[중국 국민당]]정부와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루어 같이 항일운동에 힘쓰도록 협의하였다.<ref name="ha1"/> [[11월]] [[이동녕]], [[이시영 (1868년)|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ref name="fff" /> 그리고 김구는 곧 [[한국국민당]]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유명무실화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에 대한 해산 주장이 일부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천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유지를 주장한 김구 등은 [[1936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를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4페이지</ref> [[8월 27일]]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썼다.
1935년 [[7월 5일]] [[조선혁명당]], [[의열단|조선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을 해소하고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을 결성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j_033_0010_00310|제목=31) 解消宣言(1935. 7. 5)|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로써 [[김원봉]]과 [[의열단]] 계열이 [[임시 정부]] 내 당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김원봉파가 매사에 전횡을 일삼고 [[한국독립당]]에서는 [[조소앙]] 한 명만 중앙위원으로 선출하는 등 냉대를 하자 [[노종균]]·[[조소앙]] 등은 1935년 [[9월 25일]] 민족주의적 주장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에서 탈퇴하고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3_0030_00010|제목=1) 韓國獨立黨 再建設宣言(1935. 9. 25)|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0월 5일 [[한국독립당]] 임시당무위원회는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의 공산주의 이론과 노선을 세세히 비판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3_0030_00020|제목=2) 告黨員同志(1935. 10. 5)|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재건된 [[한국독립당]]은 [[1936년]] [[7월 1일]] 정식 발족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3_0030_00040|제목=4) 재건 한국독립당 당원(1936. 7. 1)|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구는 종가부터 챙기는 것이 도리라며 [[안공근]]을 질타하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ref name="ggg" /> 그 뒤 [[안공근]]은 김구의 대가족에서 이탈하였다. [[1937년]] 김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구는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고, [[김원봉]]은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1페이지</ref><ref>사상휘보 제14호(1938.3)(조선총독부고등법원사상부, 1938) 219~222</ref>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0페이지</ref> 이후 김구는 한국독립당의 당의 무력조직인 한국독립당군의 조직을 준비하여,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보게 된다.
김구는 1935년 [[11월]] 하순 [[이동녕]], [[이시영 (1868년)|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고 김구는 이사장에 추대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5_0010_00010|제목=1) 한국국민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후 유명무실화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에 대한 해산 주장이 일부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천명하였다.
 
==== 안공근과 결별 ====
1935년 [[11월 2일]] 김구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 비상회의에서 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ref name=":17" /> 김구는 난징 국민정부와의 관계와 명망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와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루어 같이 항일운동에 힘쓰도록 협의하였다.<ref name="ha1">하련생, 《선월》 (하련생 지음, 강영매 번역, 범우사, 2007) 521페이지</ref>
안공근과 김구가 갈라선 이유에 대해 중일전쟁 이후 안공근이 자신의 큰형 [[안중근]]의 가족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ref name="oh300">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0페이지</ref> [[백범일지]]에 의하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을 모시고 [[난징]]으로 나왔다.<ref name="oh300"/> 당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안공근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ref name="oh288"/><ref>한시준, 《안공근의 생애와 독립운동》 138쪽</ref> 그런데 김구는 [[안중근]]의 부인과 가족들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분개하였다. 이를 두고 사학자 오영섭은 이로 보아 [[안공근]]의 김구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ref name="oh288"/> 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했다며 [[안공근]]을 질타하고 꾸중하였다. 이후 김구는 다시 [[안공근]]에게 상해로 들어가 그의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거듭 당부했으나,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을 데리고 나왔다.<ref name="oh288"/>
 
{{인용문2|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br /><br />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0~301페이지</ref><ref>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엮음) 361~362페이지</ref>|[[백범일지]] 중에서}}
1936년 [[8월 27일]]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썼다.
 
[[백범일지]]의 기록과는 달리 [[안공근]]은 '자기 식구만 [[충칭]]으로 이주하게 한 것'이 아니라 [[중일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에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을 자신의 가족들보다 먼저 피신<ref name="oh288"/>'시켰다.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ref name="oh288"/>
[[1936년]] [[10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를 유지하고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4페이지</ref>
 
오영섭에 의하면 '[[안공근]]이 김구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김구로부터 신망을 잃었으며 그로 인해 김구의 단체에 편입되기를 원치 않았다고 하는 위의 기록을 입증할 만한 다른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ref name="oh301">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1페이지</ref> 큰형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면 온갖 비난이 [[안공근]] 자신에게 쏟아질 것임을 누구보다 [[안공근]]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큰 형의 가족을 함께 피신시키지 못한 것은 이미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의 현지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ref name="oh301"/>'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명분과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김구는 그러한 상황을 고려치 않고 원칙론에 입각해서 [[안공근]]의 형수와 조카들을 데려오지 못한 일만을 일방적으로 꾸짖는 말을 '[[백범일지]]'에 남겼다.<ref name="oh301"/>
1936년 [[11월 10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ref name=":32" />
 
==== 중일 전쟁 중의 활동 (1937~1939) ====
1937년 2월 [[지청천|지청전]] 등이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을 탈퇴하여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였다.
[[파일:김구 (1938년) 총탄 수술 후.jpg|썸네일|총탄을 맞고 수술 후 회복한 '''김구''' (1938년)]]
 
중일 전쟁 발발 직후 김구는 [[이승만]], [[미주국민회]]와 연락을 취했다. [[1937년]] [[8월]] 김구의 애국단, [[이승만]]의 [[동지회]],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국민회]], 그리고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대표 [[지청천]]) 등의 공동명의로 중일전쟁에 대한 한국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했다.<ref name="연합">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2페이지</ref>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소앙]], [[지청천]]이 김구를 지지하며 그와 제휴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및 국민회와도 연대하게 되었다.<ref name="연합"/>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구는 종가부터 챙기는 것이 도리라며 [[안공근]]을 질타하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ref name="ggg">[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6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6쪽].</ref> 그 뒤 [[안공근]]은 김구의 대가족에서 이탈하였다.
 
[[1938년]] [[5월]]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다. [[현익철]](玄益哲)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유동렬]], [[지청천]] 등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ref name="페이지74">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4페이지</ref> 타고난 체력으로 그는 과다출혈을 하고도 오래 버틸 수 있었다.
[[1937년]] 김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구는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고, [[김원봉]]은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1페이지</ref><ref>사상휘보 제14호(1938.3)(조선총독부고등법원사상부, 1938) 219~222</ref>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0페이지</ref>
 
총격 직후 [[백범일지]]에 의하면 네시간 이상 방치되었다가 김구는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시켰다. 병원에 가서 치료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움직임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그의 글씨체는 떨려서 구부러진 글씨를 썼는데 이를 일명 총알체라 한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를 지목하였다.<ref name="페이지74"/> [[1938년]]이후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으나 [[민족혁명당]] 대부분은 [[192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에 대한 창조론, 개조론, 임정고수론 논쟁 당시 개조파와 창조파에 참가하거나 기울었던 인사들이므로 유명무실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공공연히 취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 소수인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가 [[3.1운동]]의 결정체이며 민족의 대표기관이므로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5페이지</ref> 한편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임정의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는 청년층의 비난도 받게 되었다.
===== 중일 전쟁 발발 직후 (1937) =====
[[1937년]] 7월 [[중일 전쟁]] 발발을 계기로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이 김구의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과 제휴를 원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및 [[대한인국민회]]와도 연대하게 되어 반김원봉 세력이 갖추어졌다.<ref name="연합">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2페이지</ref>
 
[[1939년]] 4월 모친 [[곽낙원]]여사가 [[인후증]](咽喉症)과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82세로 사망하였다. 아들이 [[일본군]] 타살사건으로 체포된 뒤에도 아들을 신뢰하였고, 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에도 늘 정신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곽낙원]]은 사망하며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반드시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뒤 [[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1939년]]말 [[충칭]]에서 김구는 각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반대한다<ref name="pp75">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5페이지</ref>'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민족혁명당]]에서는 각 단체들의 연합단체 구성에는 찬동하지만 기왕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는 찬동할 수 없다<ref name="pp75"/> 고 하여 대동단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9년]] [[김규식]], [[이상정]] 등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재선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koreastory.co.kr/daegustory/human/leesangjung.htm#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0-12-28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301222055/http://www.koreastory.co.kr/daegustory/human/leesangjung.htm# |보존날짜=2007-03-01 |url-status=dead }}</ref>
[[1937년]] [[8월 7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대한인단합회, 대한부인구제회, [[대한인동지회]], [[한인애국단]],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등이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을 결성하고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명의로 [[중일 전쟁]]에 대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44_0090_00130|제목=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1937. 8. 7)|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5_0010_00230|제목=23)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선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임시정부 주석 재임 시 ====
1937년 8월 말 김구는 [[안경근]], [[엄항섭]] 등을 따라 상하이에 잠입, 중국 측의 군정 각 방면을 두루 방문하였다. 특히 프랑스 공부국 정치차장 러시아인 엠랴노프와 장시간 회견하였으며, 3일 간 머무른 뒤 [[엄항섭]]을 동반하고 [[난징시|난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김구는 시국이 시국인 만큼 김원봉파와의 싸움을 접고 중한합작 하는 방책을 연구하게 되었다.<ref name=":27">{{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5_0010_00290|제목=29) 한국국민당(김구파)|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4) =====
[[파일:Daihan Minguok Limshi Zhengfu.jpg|210px|right|섬네일|[[충칭]] 임시정부 청사.]]
{{참고|한국 광복군}}
 
[[1940년]] [[3월]]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병사하자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석]](主席)에 선출되었다. 그해 승인거부되었던 [[구미외교위원부]]를 다시 승인하고 [[이승만]]을 구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다. [[9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되었고, 그해 9월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하였다. 한국독립당군(1939.1)을 확대 개편하여 한국광복군(1940.9)을 창설하였다.
1937년 [[9월 9일]] [[전장시|전장]](진강)에 잠입 대기 중이던 김구는 무정부주의자 [[유자명]]을 [[정화암]]에게 보내어 "서로 과거 일체를 잊고 주의, 주장을 초월하여 이 기회에 악수하자. 나는 이번에 자금도 생겼고 기계(권총, 기타 흉기의 뜻)도 입수했다. 김원봉 일당 약간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광복운동자는 전부 의사소통을 보았다. 이번 기회에 옛날처럼 사이좋게 일을 하고 싶다. 속히 협의하고 싶으니 와 달라"는 친필 편지를 보내어 대동단결을 종용하였다.<ref name=":27" />
 
그러나 [[중화민국]] 국가 주석 [[장제스]]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 광복군]]은 [[중화민국]]군의 예하대로서 그 통수권은 [[중화민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었다. [[4월]] [[치장 시|치장]](朞江)에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통합)[[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김구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6 />
1937년 [[9월 29일]]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손자 [[김인 (1917년)|김인]]을 데리고 몰래 상하이에 와서 프랑스조계 패륵로(貝勒路) 신천상리(新天祥里) 20호 [[안공근]]의 집에 피난하였다.
 
[[파일:Kwangbeokkun 194002.jpg|썸네일|180px|left|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1884년)|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1868년)|이시영]], [[차이석]]<br />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오른쪽 [[김붕준]]<br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1937년 [[10월 30일]] 상해 南市 지역의 함락이 목전에 다가오자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 한국국민당청년단, [[조선혁명당]] 등의 당원들은 [[일본군]]을 피해 가족과 함께 속속 오지로 향해 피신하기 시작했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안공근]]을 따라 자동차를 타고 [[난징시|난징]]으로 달아났다.<ref name=":27" />
 
[[1940년]] [[9월]] 김구는 [[중화민국]] 정부에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생활비 이상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미국에서 활동할 의향을 밝히고 [[중화민국|중국]]정부에 여행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ref name="pp75"/> [[중화민국|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자 김구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중화민국|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6페이지</ref>[[1940년]] [[9월]] [[워싱턴 D.C.|워싱턴]]의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ref name="pp75"/> 이후 [[구미위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 등 재미인사들과 연락하여 [[미국]] [[국방성]]과 접촉,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10월]] 반파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연안에서 개최된 동방각민족 반파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대회의 명예주석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ref>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강만길 저, 서해문집, 2008) 279, 330</ref>
1938년 2월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를 [[후난성]](호남성) [[창사시|창사]](장사)로 옮겼다.
 
[[1940년]] [[민족혁명당]] 인사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41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루스벨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해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ref name="ggg">[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6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6쪽].</ref> [[1942년]] [[2월]]에는 [[김성숙 (1898년)|김성숙]], [[김원봉]], [[장건상]] 등 [[좌파]]{{모호}}들이 임시 의정원에 참여하였다. [[5월]]에는 [[김원봉]]을 군무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당시 임정 내부 좌·우파의 갈등은 1943년 민혁당측이 한독당의 김구(金九)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민혁당의 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入閣)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도 발견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s://search.i815.or.kr/Indeman/Indeman.jsp?tid=ma&c1=%EC%9A%B4%EB%8F%99%EA%B3%84%EC%97%B4# |제목=::: 독립기념관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10-10-0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127214802/https://search.i815.or.kr/Indeman/Indeman.jsp?tid=ma&c1=%EC%9A%B4%EB%8F%99%EA%B3%84%EC%97%B4# |보존날짜=2012-01-27 |url-status=dead }}</ref> [[미국]]에 체류중인 [[이승만]]은 김구에게 항의하며,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 남목청 사건과 구사일생 (1938) =====
[[파일:김구 (1938년) 총탄 수술 후.jpg|썸네일|총탄을 맞고 수술 후 회복한 '''김구''' (1938년)]]
 
===== 주석 재선 (1944~1945) =====
[[1938년]] [[5월 7일]] [[후난성]](호남성) [[창사시|창사]](장사) [[남목청]]에서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통합을 논의하는 회의장에 [[조선혁명당]]의 [[이운한]]이 돌입하여 권총을 발사하여 김구·[[현익철]]·[[유동열]]이 중상, [[지청천|이청천]]이 경상을 입었다. [[현익철]]은 입원 즉시 사망하였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ref name="페이지74">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4페이지</ref> 타고난 체력으로 그는 과다출혈을 하고도 오래 버틸 수 있었다. 《[[백범일지|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는 총격 직후 4시간 이상 방치되었다가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되었다. 병원에서 치료 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움직임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그의 글씨체는 떨려서 구부러진 글씨를 썼는데 이를 일명 총알체라 한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를 지목하였다.<ref name="페이지74" />
[[파일:Kimgu&Donobun 01.jpg|섬네일|190픽셀|right|[[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번과 면담한 김구]]
 
[[1943년]] [[7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민혁당]]과의 갈등으로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다시 주석에 복직하였다.<ref name="ggg" /> [[1944년]] [[4월]]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되어 취임하였다. [[8월]] [[중화민국]]으로부터 [[한국 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았다. [[8월]] [[한국 광복군]] 통수부를 설치하고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겸 광복군 통수부 주석으로 [[광복군]]의 통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이요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그는 광복군 통수부의 주석도 겸하여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 당·정·군의 삼위일체의 지도체제를 확입하고 광복군을 이끌며 그 확대, 발전을 도모하였다.<ref>백범학술원,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1집 2003년》 (백범학술원, 2003) 195페이지</ref> [[9월]] 그는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 소식을 들은 [[중국 국민당]] [[천궈푸]]는 매우 마음 아파해하면서 [[샤오정]]에게 "당신도 이 일로 고생을 했으니 우리로서는 협조를 끊고 그 방도를 모색하여 남에게 넘기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국민당]] 내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담당자가 [[천궈푸]]에서 [[주자화]](주가화)로 바뀌었다.<ref name=":18" />
 
그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 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그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한국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1939년]] 4월 모친 [[곽낙원]] 여사가 [[인후증]](咽喉症)과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82세로 사망하였다. 아들이 [[일본군]] 타살사건으로 체포된 뒤에도 아들을 신뢰하였고, 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에도 늘 정신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곽낙원]]은 사망하며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반드시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절|광복]] 후 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1945년]]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합중국|미]][[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같은해 초, 장남 [[김인 (1917년)|김인]](金仁)이 폐질환으로 [[중화민국|중국]] [[쓰촨 성]]에서 병사하였다.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8월 15일]] [[섬서성]]에서 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로부터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 김원봉과의 좌우합작 노력 (1939) =====
[[1939년]] 5월 10일 김구와 [[김원봉]]은 공동명의로 '동지동포 제군들에게 보내는 공개신'이라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기존의 모든 조직을 해체하고 우파세력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좌파세력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통합된 단일당을 수립하자고 제안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5_0010_00390|제목=39) 同志同胞들에게 보내는 公開信(1939. 5. 10)|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귀국 직전 ====
1939년 8월 기강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과 [[조선민족전선연맹]]에 속한 7개 정당·단체 대표대회가 개최되어 단일당 결성을 논의하였다.<ref name=":11" /> 그러나 이때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에서는 '각 단체들의 연합단체 구성에는 찬동하지만 기왕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는 찬동할 수 없다'고 하여 대동단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ref name="pp75">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5페이지</ref>
[[파일:Rhee&Kim&Hadge.jpg|섬네일|180px|right|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파일:Rhee, Kim Gu and Hodge.jpg|섬네일|180px|left|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8월 18일]] 김구는 중경 임시정부로 귀환하였다.<ref>[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6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따온 제목 -->]</ref>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ref name="위클리조선" />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환국을 추진했으나 [[미군정]]은 정부자격의 귀국을 반대,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은 개인 자격의 환국을 주장하였다. [[11월]]초 [[중국 국민당|국민당]]의 송별식에 초대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송별연에도 참석하였다.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환국 제1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중화민국|중국]]을 출국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민족혁명당]]계 [[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족혁명당]]의 당수였던 [[김규식 (1881년)|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1939년 [[10월 23일]] 외무부장 임기가 종료되고 재무부장에 선출되었다.<ref name=":17" /><ref name=":21">{{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45_0030_00030|제목=3. 부서별 직원 명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귀국 무렵 김구 일행은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개인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ref name="브커1">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53~254쪽</ref> 김구는 [[11월 3일]]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 [[상하이]] 비행장에서 중국 국민당 인사들의 환송을 받고 출발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이동녕]] 주석이 병사하자 임시 의정원은 내무부장 [[홍진]]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주석으로 승계시켰다.<ref name=":20">{{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01_0020_00560|제목=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號外(1940. 3. 14)|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광복 이후 ===
1940년 [[5월 9일]] [[치장 시|치장]](朞江)에서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이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여당으로서 [[한국독립당]]을 통합 창당하였고, 김구는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4_0010_00060|제목=6) 韓國獨立黨 創立 宣言(1940. 5. 9)|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4_0010_00080|제목=8) 한국독립당 간부명단(1940. 5)|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 ====
===== 귀국 직후 =====
[[파일:상행 임정요인들.JPG|썸네일|240px|right|상해 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파일:1945년 12월 3일 임정요인들.jpg|섬네일|220픽셀|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파일:John reed hodge.jpg|섬네일|left|160픽셀|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김구는 이후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11월 3일]] 오후 비행기편으로 [[김포]]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임시 숙소는 [[조선호텔]]로 정했고 지주 [[최창학]] 자신의 별장인 [[죽첨장]]을 그에게 기증했다. 이후 지주 [[최창학]]이 기부한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나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 라고<ref>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역, 일월서각, 1986) 237페이지</ref> 선언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1940~1945) ====
[[파일:Daihan Minguok Limshi Zhengfu.jpg|210px|right|섬네일|[[충칭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충칭 임시 정부 청사]]]]
 
[[11월 4일]] [[장제스]](蔣介石) 중국 총통은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전별식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중국국민당|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吳鐵城)에게 명하여 미화 20만 달러(현시가 20억여 원)의 금액을 김구에게 전달했다.<ref name="화무1">[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202011821381&code=210100 <nowiki>[</nowiki>다시쓰는 한반도100년<nowiki>]</nowiki> (25)정치자금으로 본 해방정국-돈줄막힌 김구 화교무역으로 활로 모색-] 경향신문 2002년 2월 1일자</ref> 수십년간 대일항전의 동지로 지내온 김구에 대한 최후의, 가장 파격적인 지원이었다.<ref name="화무1"/> [[장제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김구에게 20만달러라는 거액을 쥐어준 데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 향후 일종의 ‘보은’을 다짐받는 의미가 들어있었다.<ref name="화무1"/>
===== 한국 광복군 결성 =====
[[파일:광복군 성립식.JPG|썸네일|200px|left|[[광복군]] 성립전례식에 참석한 김구 (우측)]]1940년 5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의 전시수도인 [[충칭시|중경]]에 정착하였다.<ref name=":11" />
 
그러나 김구는 이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실패했다.<ref name="화무1"/> 당시 김구·[[김규식]] 등은 임정 대표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다. 해방과 함께 정권을 인수한 [[미군정]]이 또다른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f name="화무1"/> 그러나 [[미군정]]은 [[여운형]], [[박헌영]]과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내각]]의 견제를 위해 임시정부가 정부 의 명칭을 쓰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미군정]]은 김구의 개인경호원과 광복군에게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ref name="브커1"/> 하였으나 [[장제스]]가 준 돈 20만 달러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귀국하자 [[윤치호]](尹致昊)는 그와 만나자는 연락을 취했지만 그는 [[친일파]]의 거두로 지탄받고 있었다. [[윤치호]]의 영향력과 [[일제 강점기]] 당시 그로부터 받은 지원금 등 [[윤치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김구는 거절하는 대신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하였다.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국가 주석 [[장제스]]는 [[한국 광복군|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 광복군|광복군]]은 [[중화민국]]군의 예하대로서 그 통수권은 [[중화민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었다. 김구는 [[중화민국]] 정부에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생활비 이상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미국에서 활동할 의향을 밝히고 [[중화민국|중국]]정부에 여행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ref name="pp75" /> [[중화민국|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자 김구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중화민국|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6페이지</ref>
 
===== 정치 자금 조달 =====
1940년 [[10월 9일]]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ref name=":17" />
[[1945년]] [[11월 5일]] 아침 김구 일행이 [[서울]]에 입경한 그 다음날,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낭산 [[김준연]]을 대동하고 백범의 숙소로 마련된 서울 [[서대문]]의 [[경교장]](京橋莊)으로 예방해 불굴의 노애국자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고, 같은 날 낮 이번에는 [[국민대표준비회]]의 대표 자격으로 [[장택상]]을 대동하고 예방해 후원회 기금을 전달했다.<ref name="gopyung179">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민족민주주의 언론인․정치가의 생애》(김학준, 동아일보사, 1990) 179페이지</ref> 얼마 뒤에 임정 요인들은 그 후원금 가운데 깨끗하지 못한 돈이 들어있다 하여 [[국민대표준비회]] 사무실로 들고와 처리 문제를 논란했다.<ref name="gopyung179"/> 대화는 자연히 거칠어지면서 주먹과 흥분의 수라장이 벌어졌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고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참다못해 “[[정부]]가 받는 세금 속에는 양민의 돈도 들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는 것이요. 이런 큰일에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줄아오”라고 설득함으로써 겨우 수습하기도 했다.<ref name="gopyung179"/>
 
[[11월]] 중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20만 달러의 자금을 보내준다고 연락하였다.<ref name="화무1"/>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김구는 [[중화민국]]의 정치자금을 수용하였다. [[중화민국|중국]]과 경쟁하기를 원치 않았던 미군은 중국측이 제공한 정치자금을 허용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돈과 함께 보내준 3명의 무전사와 [[무전기]]에 대해서도 무전사를 추방하고 무전기는 압수했다. 다급해진 김구는 [[뉴욕]]의 주미 중국대사관을 통해 [[서울]]로 송금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결국 돈은 [[중국은행]]에 보관된다.<ref name="화무1"/>
[[파일:Kwangbeokkun 194002.jpg|썸네일|180px|left|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1884년)|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1868년)|이시영]], [[차이석]]<br />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오른쪽 [[김붕준]]<br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11월]] [[한민당]] 인사들이 찾아왔고, [[최창학]]·[[방응모]] 등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귀국 직후 [[이광수 (1892년)|이광수]]가 한동안 그를 방문하지 않자 대노하여 [[이광수 (1892년)|이광수]]를 찾았다. 김구의 불호령을 듣고 [[경교장]]에 불려간 뒤 [[이광수 (1892년)|이광수]]는 종종 [[경교장]]을 찾았으며 [[1947년]] 이후 김구의 7촌 조가 김흥두와 함께 [[백범 일지]] 한글판 번역작업에 동참한다.<ref>순한문체였던 백범일지 원본은 일반 국민들이 읽을 수 없었고, 김흥두, [[이광수 (1892년)|이광수]] 등이 한글 번안작업을 하였다.</ref>
===== 구미위원부(주미외교위원부) 부활 =====
[[1940년|1941년]] [[6월 4일]] [[워싱턴 D.C.|워싱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ref name="pp75" />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주미위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 등 재미인사들과 연락하여 [[미국 국방부|미국 국방성]]과 접촉, 광복 직전에는 미군 [[전략사무국]](OSS)과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 국내 정치 활동 준비기간 중 =====
[[1941년]] [[6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루스벨트]]에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파일:Syngman Rhee and Kim Gu 1945-December-1.jpg|섬네일|right|180px|임정요인 환영식에 이승만과 김구 (1945.12.01)]]
[[파일:임시정부환국194511.jpg|섬네일|160픽셀|left|[[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끝에 앉은 이가 김구)]]
 
45년 [[11월 23일]] 김구는 바쁜 와중에도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휘호를 작성하여 헌정하였다.<ref name="조선복간축사1">[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08/2010020801741.html <nowiki>[</nowiki>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nowiki>]</nowiki> 해방공간 지도자들, 이념 떠나 '복간 축하' 메시지] 조선일보 2010.02.08일자</ref> 복간축하 휘호의 내용은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으로 '뜻이 있으면 끝내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ref name="조선복간축사1"/> [[11월 24일]] 내외신 [[방송]]과의 기자 회견을 하였다. 여기서 김구는 '내가 이박사보다 더 나은 수단을 갖고 왔다고 생각해서는 잘못이오. 다만 근 30년 동안 해외에 있다가 돌아온 터이므로, 현 정세에 어둡고 정세를 모르고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소.<ref>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도서출판 샘터사, 1979) 120페이지</ref>'라고 답변하였다.
===== 김원봉의 광복군 합류와 재갈등 =====
194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10월]] 반파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연안에서 개최된 동방각민족 반파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대회의 명예주석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ref>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강만길 저, 서해문집, 2008) 279, 330</ref>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였다.
 
[[1945년]] [[12월 1일]] [[이승만]]으로부터 초대받았다. 김구와 [[김규식 (1881년)|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6</ref>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1_12_09_0010|제목=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진 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4>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ref>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1868년)|이시영]], [[김규식 (1881년)|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열고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4 />
[[한국 광복군|광복군]] 확대 개편 과정에서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 인사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했다.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흡수하여 규모가 확대, 개편되었다.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는 순국선열추념대회를 조직, 주관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3>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ref> 순국선열추념대회 총재로 선출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3 /> [[12월 25일]] [[돈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던 길에, 전속 주치의 [[류진동]]을 대동하고 [[돈암장]] 산기슭 판자촌을 찾아 세민을 위문하였다. [[12월]]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ref name="ggg" />
[[1942년]] [[11월 18일]] [[장건상]]이 학무부장에, [[1944년]] [[4월 24일]] [[김성숙 (1898년)|김성숙]], [[김원봉]]이 군무부장에 당선되었다.<ref name=":17">{{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45_0030_00020|제목=2. 각료 · 국무원 · 국무위원 명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그 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에는 [[공산주의]]계, [[민족주의]]계,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계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1942년 3월 1일 무정부주의계 내부 갈등으로 [[나월환]] 암살 사건이 있었다.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이 [[한국독립당|한독당]]의 김구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의 [[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도 발견되었다.(출처 필요)<ref>{{웹 인용|url=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1906100027|제목=김원봉 독립운동의 실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월간조선|확인날짜=}}</ref> [[미국]]에 체류중인 [[이승만]]은 김구에게 항의하며,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 반탁 결의와 송진우와의 공방전 =====
[[1943년]] [[7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과의 갈등으로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다시 주석에 복직하였다.<ref name="ggg" />
{{참고|송진우 피살 사건}}
{{참고|송진우}}
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구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김규식 (1881년)|김규식]]은 신탁통치 결의문을 입수해 검토한 뒤,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이어 [[안재홍]], [[여운형]] 역시 반탁에서 이탈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강력히 관철하려 하였다. [[12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주최로 [[경교장]]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회의에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고, [[남로당]]([[조선공산당]]의 오류로 생각된다.) 사람들까지 다 나왔다. 다들 아주 격해 있었다.<ref name="bantak1">[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3/11/27/200311270500024/200311270500024_1.html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①)‘찬탁론자’ 의심받던 이승만, 세력구축 위해 돌연 반탁운동 나서 ]</ref>
 
[[파일:Songjinwoo-1945.jpg|섬네일|right|140px|송진우]]
===== 임시 정부 주석 재선 =====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에 치인 [[1944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는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했다. [[1944년]] [[4월 24일]]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출되었다.
 
이때 석상에서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다. [[강원룡]]에 의하면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다.<ref name="bantak1"/> 한다.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절규하였다.<ref>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년 중판) 43페이지</ref> 김구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규정하였다.
1944년 [[8월]] [[중화민국]]으로부터 [[한국 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았다. 그 즉시 [[한국 광복군]] 통수부를 설치하고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 겸 광복군 통수부 주석 겸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당·정·군의 삼위일체의 지도체제를 확입하고 광복군을 이끌며 그 확대, 발전을 도모하였다.<ref>백범학술원, 《백범과 민족운동연구 제1집 2003년》 (백범학술원, 2003) 195페이지</ref> [[9월]] 그는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만은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했다.<ref name="bantak1"/>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조선공산당|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김구와 맞섰다.<ref name="찬탁1">나영균,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황소자리, 2004) 224페이지</ref>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중경 임시정부]]의 통치권 주장을 [[미 군정]]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ref>역사문제연구소, 《한국현대사의 라이벌》(역사비평사, 2006) 82페이지</ref>
그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 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그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한국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12월 29일]] 저녁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전기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하였다.<ref name="브루스커밍스1">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6피이지</ref><ref name="고하1">고하 송진우 선생전 69</ref>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여전히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고 보았다.<ref name="브루스커밍스1"/><ref name="고하1"/>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이러한 주장이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김구의 추종자들은 [[1945년]] [[12월 30일]], 그를 자택에서 저격, 사살했다.<ref name="찬탁1"/>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의 면담은 [[12월 30일]] 새벽 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ref name="커밍스1">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7페이지</ref>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중의 한 사람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고, [[브루스 커밍스]]는 [[한현우]]의 배후를 김구라고 보았다.<ref name="커밍스1"/>
[[1945년]] [[3월 29일]] 장남 [[김인 (1917년)|김인]]이 폐질환으로 [[중화민국|중국]] [[쓰촨성]]에서 병사하였다.
 
[[조병옥]]도 김구를 암살 배후로 지목한다. 훗날, 국립경찰의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미국]]인들과의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술에 취해 말하기를,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우파]] 내에서의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ref>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8) 77페이지</ref>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는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ref>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8) 78페이지</ref>
[[1945년]]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합중국|미]][[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4_0010_00360|제목=36) 한국독립당 간부명단(1945. 7)|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하였다.
 
===== 반탁운동 개시와 총파업 =====
1945년 [[8월 15일]] [[산시성 (섬서성)|산시성]](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와 저녁만찬 중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존 하지|하지]]에게 보냈다. [[12월 30일]] [[하지]]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김구의 성명서를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에게 송신하였으며, 미국이 이것을 모스크바 협정에 언급된 3개국에 전달해줄 것을 강조하였다.<ref>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역, 일월서각, 1986) 287페이지</ref>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신탁통치반대위원회는 반탁시위를 주관하였고, [[12월 31일]] 오전 그는 국자(國子)를 발표한다. 그 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내무부|내무부장]] [[신익희]]의 포고령이 떨어지자 미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이 파업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1946년]] [[1월 1일]] 김구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호출되었다. [[이시영 (1868년)|이시영]], [[신익희]], [[조소앙]], [[엄항섭]] 등 다른 임정요인도 함께 [[미군정|군정청]]으로 불려갔다.
=== 광복 이후 ===
 
이때 김구는 하지로부터 명령을 거역하면 죽이겠다는 경고를 들었고, 김구는 [[존 하지|하지]]의 융단에 올라 이자리에서 죽겠다고 대들었다 한다. [[송남헌]]은 그가 [[존 하지|하지]]로부터 추방시키겠다고 위협당하였다고 증언했다.<ref>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선인, 2001) 31페이지</ref> 불려갔다 온 김구는 파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고<ref>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편집부 지음, 역사비평사, 2007) 166~170페이지</ref> [[엄항섭]] 대독을 통해 군정청 [[한국]]인 직원의 복귀를 촉구했다.
==== 귀국 직전 (1945) ====
[[파일:Kimgu&Donobun 01.jpg|섬네일|190픽셀|right|[[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번과 면담한 김구]]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암살 사건이 전해지자 하지 사령관은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다시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ref name="songam1">백범어록(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게, 2007.11)의 67페이지</ref> [[1946년]] [[1월 2일]] 갑자기 [[조선공산당]]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의 지지로 돌변했다.<ref>대한민국의 기원(이정식, 일조각, 2006) 142페이지</ref>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가 좌익세력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김구는 조공의 표변을 들며 '[[조선공산당]]은 반민족적 집단이고 신 사대주의자'라고 낙인찍고 맹비난을 퍼부었다.<ref>대한민국의 기원(이정식, 일조각, 2006) 143페이지</ref> 김구는 [[김성수 (1894년)|김성수]], [[조소앙]]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우파 내에서도 신탁통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부수립이 우선이라고 본 [[김규식 (1881년)|김규식]], [[안재홍]]은 반탁의 입장을 철회한다.
1945년 [[8월 18일]] 김구는 [[중경 임시 정부]]로 귀환하였다.<ref>[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6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따온 제목 -->]</ref>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3_0010|제목=김구, 임정의 당면정책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는 성명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환국을 추진했으나 [[미군정]]은 정부자격의 귀국을 반대,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은 개인 자격의 환국을 주장하였다.[[파일:Rhee&Kim&Hadge.jpg|섬네일|180px|right|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파일:Rhee, Kim Gu and Hodge.jpg|섬네일|180px|left|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1945년 [[11월 4일]] [[장제스]] 중국 총통은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전별식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중국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吳鐵城)에게 명하여 미화 20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280만 달러 또는 30억원)의 금액을 김구에게 전달했다.<ref name="화무1">[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202011821381&code=210100 <nowiki>[다시쓰는 한반도100년] (25)정치자금으로 본 해방정국-돈줄막힌 김구 화교무역으로 활로 모색-</nowiki>] 경향신문 2002년 2월 1일자</ref> 장 주석은 "비록 우리 정부가 가난하긴 하지만 어찌 한국에 후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말했다. [[중국 국민당]] 역시 당시 항일 운동과 공산당과의 내전 등을 치르느라 재정적으로 어려웠지만, 장 주석은 김 주석이 돈 문제로 고생하지 않게 자금을 주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구는 이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실패했다.<ref name="화무1" /> [[중화민국|중국]]과 경쟁하기를 원치 않았던 미군은 중국측이 제공한 정치자금을 허용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돈과 함께 보내준 3명의 무전사와 [[무전기]]에 대해서도 무전사를 추방하고 무전기는 압수했다. 다급해진 김구는 [[뉴욕]]의 주미중국대사관을 통해 [[서울]]로 송금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결국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이를 국고에 보관했다가 1947년 6월 한국에 전달했다.<ref name="화무1" /><ref name=":8">{{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10670191|제목=[3ㆍ1운동.임정 百주년](38) 장제스의 임정 지원, '선의'뿐일까?|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확인날짜=}}</ref> 전문가들은 장 주석이 김 주석에게 준 전별금의 의미를 우정, 공동운명체, 해양세력과의 완충지대 활용 등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ref name=":8" />
 
=== 하지의 임정요인 추방 사태 ===
[[장제스]]와의 회담에서 김구는 "안중근 자식이 일본에 항복하여 상하이에서 여러 가지 불법행위를 하며 아편을 매매하므로 실로 유감이다. 직접 명령을 내려 안준생을 구금해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1945년 11월 귀국길에 김구는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리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안준생]] 암살 부탁은 중국 관원으로부터 거절당했다.<ref name="rlarflq408">{{서적 인용|제목=백범일지|저자=김구|이름=|날짜=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판=|출판사=돌베개|쪽=408|장=|출판위치=경기도 파주|ISBN=89-7199-148-8}}</ref>
임정 주최의 반탁 운동이 극치에 달한 [[1945년]] [[12월 31일]] 하오 하지 중장은 [[조병옥]]에게 연락관을 보내 사령관실에서 요담할 것을 요청해 왔으므로 즉시 하지를 만나러 갔다. 하지 중장은 말하기를 군정을 접수하려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즉시 처치해야 되겠다고 말하면서 그날 저녁 임정 요인 처치에 대한 방송을 하겠다고 조병옥에게 원고 전문을 보여주었다.<ref name="chose157">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57페이지</ref>
 
{{인용문2|원래 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33명은 한국에 입국할 때 [[미군정]]의 법과 질서유지에 복종하겠다는 맹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빙자하여 미군정을 접수하고 미군들을 축출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획책과 군정 접수운동의 여파로써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오늘밤 0시를 기하여 인천 소재 전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겠다.<ref name="chose158">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58페이지</ref>|원고 내용}}
1945년 [[11월 23일]] [[상하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환국 제1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중화민국|중국]]을 출국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는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계 [[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족혁명당|민혁당]]의 당수였던 [[김규식 (1881년)|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무렵 김구 일행은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개인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ref name="브커1">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53~254쪽</ref>
 
하지는 김구에 대한 물리적인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조병옥]]은 즉시 이 원고를 다 읽고 난 뒤 경악하면서 하지중장에게 말하기를 임정 요인들은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나는 [[3.1 운동]] 이래 자유독립의 혁혁한 경력을 가진 분으로 민족의 자유전치운동의 봉화를 든 민족운동의 투사이므로 이 애국자들의 국외추방은 [[미군정]]에 협조하는 한국인의 민심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동시에 미군정은 한국에 있어서 실패로 끝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니 그런 조치는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ref name="chose158"/>
==== 귀국 직후 ====
[[파일:임시정부환국194511.jpg|섬네일|160픽셀|left|[[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끝에 앉은 이가 김구)]][[파일:상행 임정요인들.JPG|썸네일|240px|right|상해 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1945년]] [[11월 23일]] 오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환국 제1진이 귀국하였다. 김구는 [[죽첨정]] 숙사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승만]]과 회견한 다음 기자회견을 하였다. 여기서 김구는 "나는 조선이 남북의 2점령지대로 분열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연합국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지는 않겠으나 장차에는 승인을 요구할는지도 모르겠다", "조선내의 정당수를 감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내의 정당은 하나로서는 아니되고 유력한 정당 몇이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을 위하여 민주주의정체가 좋다고 믿는다" 등 앞으로의 정치 방향에 대해 언질을 주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1_23_0030|제목=김구 기자회견|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임시 숙소는 [[조선호텔]]이었고, 이후 지주 [[최창학]]이 기부한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나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ref>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역, 일월서각, 1986) 237페이지</ref>
 
하지 중장은 조병옥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러면 방송을 중지하겠다고 하였다. 조병옥은 즉석에서 김구와 하지의 면담을 약속받았다. 조병옥은 하지 중장에게 "나에게 김구 주석과 협상할 전권을 맡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 중장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ref name="chose158"/> [[12월 31일]] 저녁 [[조병옥]]은 [[서대문]]에 있는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의 숙소를 방문하게 되었다.<ref name="chose158"/> [[조병옥]]은 김구와 여러 시간 면담하였다. 조병옥은 김구에게 진언하기를
1945년 [[11월 23일]] 김구는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휘호를 작성하여 헌정하였다. 복간축하 휘호의 내용은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으로 '뜻이 있으면 끝내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ref name="조선복간축사1">[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08/2010020801741.html <nowiki>[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 해방공간 지도자들, 이념 떠나 '복간 축하' 메시지</nowiki>] 조선일보 2010.02.08일자</ref> 김구가 귀국하자 [[윤치호]]는 그와 만나자는 연락을 취했지만 그는 [[친일파]]의 거두로 지탄받고 있었다. [[윤치호]]의 영향력과 [[일제 강점기]] 당시 그로부터 받은 지원금 등 [[윤치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김구는 거절하는 대신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인용문2|주석께서 입국하실 때에 [[독립군]] 한 명도 대동하지 못하고 정치자금도 한 푼도 없이 미군정에 협력하겠다고 맹약한 이상 현재의 임정이 계획하고 있는 미군정 접수 운동은 포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북한]]은 [[공산주의]] 치하에 붉은 물이 들어가고 그에 따라 한반도는 전역에 걸쳐 공산주의 철제에 휩쓸려 갈지도 모르는 이 역사적 단계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미군정]]의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는 도저히 자유독립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오니 주석께서는 그 점 신중히 심사숙고하시어 한번 하지 장군과 만나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해 보심이 어떻습니까?<ref name="chose158"/>}}
1945년 11월 25일 오후 2시 20분 [[서울 돈암장|돈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고 저녁까지 당면문제에 관하여 요담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1_25_0020|제목=김구, 이승만 방문 당면문제 요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조병옥]]의 말에 김구는 하지 중장을 만나 보겠다고 수락, 그의 진언을 들어주었다.
1945년 11월 28일 [[경교장|죽첨정]] 임시정부요인 숙소에서 열린 정례기자회견에서 김구과 김규식은 [[조선인민공화국]] 입각설을 부인하였다. 김규식은 "나는 인민공화국 내각조직에 관하여 하등의 의사 교환도 없었고 내가 각원으로 된 것은 비법적이다. 그런 고로 나는 이 내각에 입각할 것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고, 김구는 "나도 동감이다"라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1_28_0040|제목=김구와 김규식, 인공 입각설 부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6) ====
[[11월]] [[한민당]] 인사들이 찾아왔고, [[최창학]]·[[방응모]] 등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귀국 직후 [[이광수 (1892년)|이광수]]가 한동안 그를 방문하지 않자 대노하여 [[이광수 (1892년)|이광수]]를 찾았다. 김구의 불호령을 듣고 [[경교장]]에 불려간 뒤 [[이광수 (1892년)|이광수]]는 종종 [[경교장]]을 찾았으며 [[1947년]] 이후 김구의 7촌 조카 김흥두와 함께 《[[백범일지]]》 한글판 번역작업에 동참한다.<ref>순한문체였던 백범일지 원본은 일반 국민들이 읽을 수 없었고, 김흥두, [[이광수 (1892년)|이광수]] 등이 한글 번안작업을 하였다.</ref>[[파일:Syngman Rhee and Kim Gu 1945-December-1.jpg|섬네일|right|180px|임정요인 환영식에 이승만과 김구 (1945.12.01)]][[파일:1945년 12월 3일 임정요인들.jpg|섬네일|220픽셀|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1945년 12월 1일 [[조소앙]], [[홍진]]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환국 제2진이 전라도 군산비행장에 도착 후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날 오후 1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봉영회(臨時政府奉迎會)에 참석했다. [[윤보선]]의 사회로 시작되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이 이어진 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 조선국민학교생도를 선두로 기행렬에 옮기어 행렬은 오후 2시 20분경 안국정 네거리에 이르러 조선생명보험회사 2층에서 축하를 받는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1868년)|이시영]], [[김규식 (1881년)|김규식]], [[류동렬]] 등 앞에서 "대한임시정부 만세, 김구 만세, 이승만 만세"를 부르고 경성역 앞에 이르러 해산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4">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01_0100|제목=임시정부及연합군환영회본부임정환국봉영회 거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파일:1946년 제1차 미소공위.JPG|섬네일|270px|right|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파일:Kim Gu and Ahter001.jpg|섬네일|260px|left|한국 방문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1946년]])<br />앞줄 가운데가 김구, 앞줄 오른쪽이 피치 박사 부부, 앞줄 왼쪽은 [[조완구]], [[프란체스카 도너]] 순, 뒷줄 왼쪽 첫 번째는 [[엄항섭]],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
 
[[1946년]] [[1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 (1881년)|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찾아와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찬탁1" /> [[1월]] [[이승만]]이 [[미국]]에 갈 때,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민족 외교'를 위해 '외교사절 후원회'를 조직했다.<ref name="Lee238">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238페이지</ref>
1945년 12월 19일 오전 11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정개선환영대회에 참석하였다. 15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11시 정각이 가까워오자 김구 이하 임정요인 일동의 입장에 뒤 이어서 각 정당대표 및 기타 인사의 입장이 있었고 장엄한 취주악에 맞추어 일동 총기립으로 환영대회가 개막되었다. 36년간 잊었던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일동의 애국가 제창, [[이화여전]]의 환영가 제창, [[홍명희]]의 환영사, 러취 군정장관의 축사 후 김구의 답사와 [[이승만]]의 답사가 있었고, 만세삼창으로 환영회는 폐회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19_0070|제목=임정개선환영대회, 서울운동장에서 개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승만 박사 외교사절 후원회'의 부위원장은 [[조소앙]]이 맡았고, 김구와 [[배은희]] 등은 반탁총동원위원회나 비상국민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거뒀다.<ref name="Lee238"/> 그리고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국내 책임자로 적극적으로 도미 외교를 지지하였다.<ref name="Lee238"/>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는 순국선열추념대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김구가 총재로 선출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3">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ref> [[12월 24일]] [[한국소년군]] 총본부 총재에 추대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21</ref> [[12월 25일]] [[돈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던 길에, 전속 주치의 [[류진동]]을 대동하고 [[돈암장]] 산기슭 판자촌을 찾아 세민을 위문하였다.
 
[[파일:신탁통치 반대 집회 01.PNG|섬네일|200px|right|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5년 [[12월 27일]] 김구는 '삼천만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하였다. '''"완전히 독립자주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합시다."'''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합시다"'''라며 그 방안으로 [[보통선거|보선제]] 실시, 부와 생산의 점진적 국유화, 의무교육 도입을 주장하였다. '''"친일분자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여야겠습니다."''' '''"세계적 대가정을 건립합시다"'''라며 우방과의 교류를 환영하면서도 '''"그러나 이것이 절대로 우방 단독적이나 공동적으로 우리를 통치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한인은 마땅히 한인의 정부가 통치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강고한 국방군을 건립합시다"'''라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7_0040|제목=김구, ‘삼천만동포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방송|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직후 (1945~1946) ====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3상회의) 결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협의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리자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측은 오후 4시 긴급 국무위원회의를 열고 각 정당, 종교단체, 언론기관 대표들을 초청하여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한 끝에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구성을 결의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8_0080|제목=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설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김구는 처음부터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강력히 관철하였다. [[김규식 (1881년)|김규식]]은 찬탁 또는 반탁의 일방적인 입장을 보류하고 양진영과 교류하며 좌우합작운동을 준비하였다. [[안재홍]], [[여운형]]은 반탁에서 이탈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는 이승만과 김구를 정치적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조병옥]]에 의하면 '한편 미군정은 비밀리에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거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3일 이래 좌익 우익 합작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역량이 [[박헌영]]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을 받았으며 또 이승만은 완강한 정치인이라고 해서 한국 정치계에서 제거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ref name="cho174">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74페이지</ref> 김구 주석은 극렬한 반탁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신망을 얻지 못하였다.<ref name="cho174"/>'는 것이다. 이에 이승만과 김구는 정국반전을 꾀한다.
===== [[송진우 피살 사건]]과 한국민주당과의 갈등 =====
[[파일:Songjinwoo-1945.jpg|섬네일|right|140px|송진우]][[12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주최로 [[경교장]]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회의에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고, [[조선공산당]] 사람들까지 다 나왔다. 다들 아주 격해 있었다.<ref name="bantak1">[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3/11/27/200311270500024/200311270500024_1.html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①)‘찬탁론자’ 의심받던 이승만, 세력구축 위해 돌연 반탁운동 나서]</ref> 이때 석상에서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다. [[강원룡]]에 의하면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다"고 한다.<ref name="bantak1" />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절규하였다.<ref>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년 중판) 43페이지</ref> 반면 [[송진우 (1890년)|송진우]]는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조선공산당|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김구와 맞섰다.<ref name="찬탁1">나영균,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황소자리, 2004) 224페이지</ref> [[송진우 (1890년)|송진우]]는 김구의 [[충칭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중경 임시 정부]]의 통치권 주장을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ref>역사문제연구소, 《한국현대사의 라이벌》(역사비평사, 2006) 82페이지</ref>
 
====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0분경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송진우 피살 사건]]이 발생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30_0180|제목=한민당수석총무 宋鎭禹 피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 사건이 전해지자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ref name="songam1">백범어록(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게, 2007.11)의 67페이지</ref> 사건 전날의 정황상 [[한국민주당]] 측도 김구를 배후로 의심하였고, 그래서 사건의 진실과 무관하게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측과 [[한국민주당|민주당]] 측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김구는 [[김규식 (1881년)|김규식]], [[이승만]],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ref name="비상362">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362페이지</ref> [[2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199510100350 인촌 김성수/김학준 정치학박사·현 동아일보회장(해방공간의 주역:9) - 동아일보]{{깨진 링크|url=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199510100350 }}</ref>
 
[[1946년]] [[2월 12일]]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국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ref name="비상362"/>
[[1946년]] [[4월 9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을 체포하였다. 이날 경찰은 [[한현우]]가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돕고 있던 자인데 그의 지휘하에 유근배, 김의현이 권총을 발사하여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암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ref name=":13">{{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09_0010|제목=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 체포|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날 경찰 취조결과 발표에 따르면 [[한현우]]는 1941년 12월에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졸업하고, 1943년 5월경 동경에서 국수주의자 일인 [[나카노 세이고]](中野正剛)와 [[고이치 호즈미]](穗積五一)을 숭배하여 이와 5년간 직간접으로 교양을 받고, [[고이치 호즈미]]의 지지로 재일조선인 유학생 5천 명으로 조선독립연맹(朝鮮獨立聯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지하운동을 한 자인데, 당시 일본경비청의 탄압이 심하므로 [[고이치 호즈미]]의 지도로 [[한현우]]은 일본국체연구소(日本國體硏究所)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본황실중심주의를 표방하다가 1944년 3월에 비밀이 탄로되어 인심교란죄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4년을 받은 후 1945년 2월 25일경 강원도 춘천 [[한현우]]의 처가집에서 수양하다가 1945년 8월 17일 상경하여 시내 종로 2정목 마포 노량진 신당정 등으로 전전하였다. [[한현우]] 등은 1945년 11월 초부터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매국노로 규정하고 암살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12월 말 신탁문제가 일어나 격분하여 12월 30일 오전 6시 10분경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먼저 암살한 것이었다.<ref name=":14">{{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09_0020|제목=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들의 취조결과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어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ref.daum.net/item/3990128# |제목=서울 상동교회의 고 전덕기 목사 추도회 - Daum 전문자료<!--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09-12-01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21201819/http://ref.daum.net/item/3990128# |보존날짜=2011-11-21 |url-status=dead }}</ref> [[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한 [[김창숙]]은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ref name="비상362"/>
[[1946년]] [[9월 3일]] [[한현우]]에게 일본제 권총을 내어준 한현우의 지도자 [[전백]](全栢)에 관한 공판이 있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09_03_0070|제목=宋鎭禹암살범 韓賢宇의 지도자 全栢의 공판|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7년]] [[2월 14일]] 한현우는 최종언도공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2_14_0060|제목=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등 4명에 대한 최종언도공판 개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9월 5일]] 한현우는 옥중 인터뷰에서 "송진우씨 암살사건에 관해서는 범행 당시나 지금이나 별로 심경의 변화가 없습니다"라고 했고 자신이 "대한임정 지지자"라고도 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9_05_0090|제목=宋鎭禹 암살범 韓賢宇, 朝鮮精版社사건 朴洛鍾 옥중 인터뷰|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50년]] 한현우는 마포형무소 복역 중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북한군]]에 의하여 석방되었다가 [[서울 수복 전투|9·28 서울 수복]] 당시 자수하지 않고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22_1951_08_21_0030|제목=한현우, 안두희의 근황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논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60년]]대에 이르러 신원이 확인되었는데, 한홍건(韓弘健)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일본 여성과 결혼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3684964&sid1=001|제목="朴대통령이 古下암살전과 말소해 줬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ref>
 
[[민주의원]] 지도부 구성은 김구와 [[이승만]]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은 배제되었다.<ref>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5</ref> [[2월 14일]]부터 [[2월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ref name="강준만2.14">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4쪽.</ref> 반탁운동을 수단으로 해서 국민의회로 하여금 과도정부를 수립케 하려는 것이었다.<ref name="강준만2.14"/>
===== 미군정과의 갈등 =====
[[파일:John reed hodge.jpg|섬네일|left|160픽셀|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김구는 이후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김구는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존 하지]]에게 보냈다. [[하지]]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김구의 성명서를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에게 송신하였으며, 미국이 이것을 모스크바 협정에 언급된 3개국에 전달해줄 것을 강조하였다.<ref>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역, 일월서각, 1986) 287페이지</ref> [[12월 31일]] 오전 그는 국자(國子)를 발표한다. 그 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내무부|내무부장]] [[신익희]]의 포고령이 떨어지자 미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이 파업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원래 김구는 [[이승만]]이 빠른 시일내에 미국으로부터 정부수립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하에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하였다.<ref name="강준만2.14"/><ref>역사비평사, 《역사비평》 제30호(1995년 가을) (역사비평사, 1995) 319~320, 328쪽</ref>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고 말았다.<ref name="강준만 2.15">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5쪽.</ref> 신문에서는 아이들 장난으로 조소하였고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ref name="강준만 2.15"/> [[3월 5일]]과 [[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이시영 (1868년)|이시영]], [[조완구]], [[유림 (1894년)|유림]], [[조소앙]]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고 굴복, 계획은 불발로 끝나게 됐다.<ref name="강준만2.14" />
임정 주최의 반탁 운동이 극치에 달한 [[1945년]] [[12월 31일]] 하오 하지 중장은 [[조병옥]]에게 연락관을 보내 사령관실에서 요담할 것을 요청해 왔으므로 즉시 [[하지]]를 만나러 갔다. [[하지]]는 '군정을 접수하려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즉시 처치해야 되겠다'고 말하면서 그날 저녁 임정 요인 처치에 대한 방송을 하겠다고 조병옥에게 원고 전문을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원래 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33명은 한국에 입국할 때 [[미군정]]의 법과 질서유지에 복종하겠다는 맹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빙자하여 미군정을 접수하고 미군들을 축출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획책과 군정 접수운동의 여파로써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오늘밤 0시를 기하여 인천 소재 전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겠다."<ref name="chose157">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57페이지</ref>
 
[[1946년]] [[3월 5일]] 문봉제(文鳳濟) 등 월남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가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평남동지회가 조직되고, 다시 평남동지회는 평남북 조직을 합친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었다.<ref name="역사4">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1999) 209페이지</ref> 결성대회에는 북한 지역 연고자(이윤영, 김병연, 강기덕)는 물론 김구도 참석했다.<ref name="역사4"/> 그해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 등이 [[한독당]]으로 통합되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ref>[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7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붙인 제목 -->]</ref>
[[조병옥]]은 이 원고를 다 읽고 난 뒤 경악하면서 하지중장에게 말하기를 임정 요인들은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나는 [[3.1 운동]] 이래 자유독립의 혁혁한 경력을 가진 분으로 민족의 자유전치운동의 봉화를 든 민족운동의 투사이므로 이 애국자들의 국외추방은 [[미군정]]에 협조하는 한국인의 민심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동시에 미군정은 한국에 있어서 실패로 끝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니 그런 조치는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ref name="chose158" /> [[하지]] 중장은 조병옥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러면 방송을 중지하겠다고 하였다. [[조병옥]]은 즉석에서 김구와 [[하지]]의 면담을 약속받았다. 조병옥은 하지 중장에게 "나에게 김구 주석과 협상할 전권을 맡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 중장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ref name="chose158" />
 
==== 정치 활동 ====
[[12월 31일]] 저녁 [[조병옥]]은 [[서대문]]에 있는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의 숙소를 방문하게 되었다.<ref name="chose158" /> [[조병옥]]은 김구와 여러 시간 면담하였다. 조병옥은 김구에게 진언하기를 "주석께서 입국하실 때에 [[독립군]] 한 명도 대동하지 못하고 정치자금도 한 푼도 없이 미군정에 협력하겠다고 맹약한 이상 현재의 임정이 계획하고 있는 미군정 접수 운동은 포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북한]]은 [[공산주의]] 치하에 붉은 물이 들어가고 그에 따라 한반도는 전역에 걸쳐 공산주의 철제에 휩쓸려 갈지도 모르는 이 역사적 단계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미군정]]의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는 도저히 자유독립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오니 주석께서는 그 점 신중히 심사숙고하시어 한번 하지 장군과 만나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해 보심이 어떻습니까?" [[조병옥]]의 말에 김구는 하지 중장을 만나 보겠다고 수락, 그의 진언을 들어주었다.
===== 미소공위 반대 운동 (1946) =====
[[파일:Seoul-Deoksugung-10.jpg|섬네일|250px|left|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참조|미소공동위원회}}
[[1946년]] [[1월 1일]] 김구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호출되었다. [[이시영 (1868년)|이시영]], [[신익희]], [[조소앙]], [[엄항섭]] 등 다른 임정요인도 함께 [[미군정|군정청]]으로 불려갔다. 이때 김구는 [[존 하지|하지]]로부터 명령을 거역하면 죽이겠다는 경고를 들었고, 김구는 [[존 하지|하지]]의 융단에 올라 이자리에서 죽겠다고 대들었다 한다. [[송남헌]]은 그가 [[존 하지|하지]]로부터 추방시키겠다고 위협당하였다고 증언했다.<ref>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선인, 2001) 31페이지</ref> 불려갔다 온 김구는 파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고<ref>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편집부 지음, 역사비평사, 2007) 166~170페이지</ref> [[엄항섭]] 대독을 통해 군정청 [[한국]]인 직원의 복귀를 촉구했다.
[[3월 20일]]에 열린 미, 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 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ref>《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편집부 지음, 역사비평사, 2007) 168페이지</ref>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ref name="논쟁169">《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편집부 지음, 역사비평사, 2007) 169페이지</ref>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않았다. [[존 하지|하지]]와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 (1881년)|김규식]]은 김구가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려 하지 않자 그것에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문제에 언질을 준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했다.<ref name="논쟁169"/>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ref name="논쟁169"/> 46년 [[3월 22일]] 우파정당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국민당과 통합을 선언하였으며, 이때 김구는 [[이승만]]에게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초당적인 국민운동'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35쪽.</ref><ref>역사비평 제32호 (1996년 봄) (역사비평사, 1996) 267쪽</ref>
===== 공산진영과의 갈등 =====
그런데 1946년 1월 2일을 기점으로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공화국]] 등 극좌익~좌익은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 즉 신탁통치찬성(찬탁)으로 일제히 돌변했는데 이로 인해 좌우익의 분열이 노골화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2_0110|제목=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2_0080|제목=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민족진영은 외세를 적이라고 봤고 공산진영은 동족을 적이라고 봤다. 미군정은 좌익의 돌변에 소련의 의사가 작용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가 좌익세력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김구는 조공의 표변을 들며 '[[조선공산당]]은 반민족적 집단이고 신사대주의자'라고 낙인찍고 맹비난을 퍼부었다.<ref>대한민국의 기원(이정식, 일조각, 2006) 143페이지</ref>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ref name=autogenerated9>{{웹 인용 |url=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8/25/2006082577002.html |제목=위클리조선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확인날짜=2010-01-0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21193815/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8/25/2006082577002.html |보존날짜=2011-11-21 |url-status=dead }}</ref>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 (1890년)|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9 />
김구는 [[김성수 (1894년)|김성수]], [[조소앙]]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우파 내에서도 신탁통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부수립이 우선이라고 본 [[김규식 (1881년)|김규식]], [[안재홍]]은 반탁의 입장을 철회한다.
 
[[파일:3의사 유해 환국.JPG|섬네일|오른쪽|[[1946년]] [[5월 25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 [[서울역]]에서 (오른쪽 두 번째가 김구)]]
===== 비상국민회의 및 민주의원 결성 =====
[[미소공동위원회|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운동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ref>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29페이지</ref>
[[파일:Kim Gu and Ahter001.jpg|섬네일|260px|left|한국 방문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1946년]])<br />앞줄 가운데가 김구, 앞줄 오른쪽이 피치 박사 부부, 앞줄 왼쪽은 [[조완구]], [[프란체스카 도너]] 순, 뒷줄 왼쪽 첫 번째는 [[엄항섭]],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파일:RheeSyngman 1945's.jpg|섬네일|180px|left|[[이승만]]. 1920년 상하이에서 김구와 첫 대면 후 호형호제하며 정치적으로 협력하였다.]][[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예비회담이 개최되자 각 정당과 사회단체는 서둘러 반탁진영과 찬탁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미소공위 반대 및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 (1881년)|김규식]]은 미소공위 찬성 및 참가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찾아와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미소공위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반면 [[장덕수]]는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찬탁1" />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1881년)|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ref>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3</ref> [[6월]]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단독정부론을 말할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상공회의소]] [[강익하]]가 찾아와 김구에게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그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55쪽.</ref>
반탁진영은 1946년 1월 20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개최하여 전국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소집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20_0030|제목=비상정치회의주비회 개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월 21일 [[비상정치회의주비회]]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합류시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개칭하고 김구·[[이승만]]을 공동회장으로 추대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21_0050|제목=비상정치회의주비회, 독촉을 합류시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개칭|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측 혁신계인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의 김원봉·성주식(成周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등 3명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가 중립을 지키지 않고 반탁에 가담해 우익 편향화하고 있다'면서 [[비상국민회의주비회]] 탈퇴성명을 하였으며,<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23_0100|제목=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비상국민회의주비회 탈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장건상]]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와의 결별을 고하였다. 또한 공산진영 산하단체도 모두 참가를 거부해왔으므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는 우익진영만의 집결체가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5166|제목=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1월 30일 [[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이 상임위원회는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김구·[[이승만]]에게 위임하였다. 2월 1일 [[비상국민회의]]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2_01_0160|제목=비상국민회의 개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2월 13일 김구·[[이승만]]은 28인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2_13_0090|제목=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최고정무위원을 전형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 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발표하였다.<ref name="강준만67">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57쪽.</ref>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 땅에 발 못 붙이게 하자"고 역설하면서, "최고사령부라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ref name="강준만67"/>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개편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에, 김구·[[김규식]]이 부의장에 추대되었다. 이날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정인보, 조소앙은 결석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2_14_0020|제목=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결성|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또한 이날 찬탁진영의 [[조선인민당]]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탈퇴성명을 발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2_14_0050|제목=인민당, 민주의원 탈퇴성명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ref>김정원, 한국분단사 (동녘, 1985) 86</ref> [[이승만]]의 연설에 이어 김구는 이 대회에서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외쳤다.<ref name="강준만67"/><ref>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492쪽</ref><ref>한국근현대사연구회 편, 《한국근현대사연구 1996년 제5집》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96) 212쪽</ref>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김구는 부총재에 선출됐다.<ref name="강준만67"/> 이승만은 국민운동의 총본부 조직으로 민족통일총본부(민총)의 설치를 발표하였고, 이후 본격적인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민총의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ref name="강준만67"/>
 
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존 하지|하지]] 중장, [[이승만]]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ref>[http://kiib.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2016# ▒ 경인일보 창간 50주년 '도약! 2010' ▒<!--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kiib.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2016 }}</ref>[[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찬탁진영은 1월 19일부터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을 추진하였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19_0140|제목=조선인민당외 29개단체, 민족통전문제 토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2_15_0030|제목=민전 결성대회 개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우익 편향화'를 운운하며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비상국민회의]]를 탈퇴했던 이들은 고스란히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참여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2_15_0040|제목=민전 집행부 선거, 집행위원 선거|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ref name="역문1">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ref>
1946년 [[2월 8일]]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통 분모 하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통합 결성하였다.
 
===== 임정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폭탄투척 =====
1946년 [[3월 1일]] 기미독립기념회와 3·1기념회가 주관한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였다.
[[1946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와 [[염동진]]의 [[백의사]]는 [[3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평양역]] 앞에서 '3.1 운동 27주년 기념식'을 열었는데, [[백의사]] 청년단원들은 [[김일성]]에 대한 폭탄을 던졌다. 집회가 진행되는 도중 연단을 향해 [[수류탄]]이 던져졌는데, 집회의 경비를 담당한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가 [[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다가 그의 손에서 폭발한 것이다.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ref name="강준만230">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30</ref><ref name="기원과">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박명림, 나남, 1996) 157~158</ref><ref>북한 50년사: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김학준, 동아출판사, 1995) 110</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삼일절]]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남한에서 올라간 열여덟 살 소년 [[김형집]]이었다.<ref name="강준만230"/><ref name="기원과157">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박명림, 나남, 1996) 157</ref><ref name="북한107">북한 50년사: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김학준, 동아출판사, 1995) 107</ref>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과 [[김책]]의 집에도 습격·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양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량욱]]의 아들과 딸을 죽게 만들었다.<ref name="강준만230"/><ref name="기원과157"/><ref name="북한107" /> 청년단원 중 한명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무임승차권<ref>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임정 신임장</ref> 을 분실했고<ref name="강준만230"/><ref name="북한107"/><ref>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박명림, 나남, 1996) 158</ref> 이는 [[북한]]측에 의해 입수되었다.
1946년 [[3월 5일]] 문봉제(文鳳濟) 등 [[월남]]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가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평남동지회가 조직되고, 다시 평남동지회는 평남북 조직을 합친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었다. 결성대회에는 북한 지역 연고자(이윤영, 김병연, 강기덕)는 물론 김구도 참석했다.<ref name="역사4">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1999) 209페이지</ref>
 
이 테러가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격렬히 비난하였다.<ref name="비난231">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31</ref>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과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의 [[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지만. 이 테러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ref name="비난231"/> 이런 연유로 당시 북한의 출판물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ref name="kuu0531">김삼웅, 《백범평전》 (시대의 창, 2004) 531페이지</ref>
==== 김일성 암살미수 ====
[[1946년]] 2월 초 [[임시 정부]]는 [[신익희]]를 본부장으로 하는 정치공작대 중앙본부를 조직, 산하 지하 단체인 [[백의사]]의 지원을 받아 이북의 [[김일성]]·[[강량욱]]·최용건·김책 등 [[북조선인민위원회|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지도자 암살을 준비했다. 김정의·[[김형집]](김성만)·최기성·이성렬·백시영·이희두 등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결사대'는 [[신익희]]의 낙산장(駱山莊)에서 정보수집 요령과 지하활동 방법에 대한 훈련을 받은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파견되었다.<ref name=":28">{{웹 인용|url=https://news.joins.com/article/2691718|제목=김일성 암살 미수사건: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3)|웹사이트=|출판사=중앙일보}}</ref><ref name=":31">{{웹 인용|url=https://news.joins.com/article/2692495|제목=임정정치공작대 3명 밀입북(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44)|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중앙일보|확인날짜=}}</ref>
 
[[1946년]] [[11월]]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ref name="sunbb">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한국민족운동과 민족문제》(국학자료원, 1999) 466페이지</ref>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ref name="sunbb"/>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과 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ref name="sunbb"/>
[[1946년]] [[3월 1일]] [[북조선인민위원회|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평양역]] 광장에서 [[3·1절]] 27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원래는 연단의 좌측에서 김형집이 김일성 연설 시작과 동시에 수류탄 투척, 연단의 중앙에서 김정의가 저격 지휘 및 저격순간 촬영, 연단의 우측에서 최기성이 수류탄 불발에 대비해 일제기관총(모제르1호)으로 김일성을 저격하기로 계획했지만, 김정의에게 미행이 붙어 차질이 생겼고 당황한 [[김형집]]은 [[김일성]]의 연설이 끝나자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의 한 발 앞에 떨어졌고 그는 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고 했지만 그의 손에서 폭발하였다.<ref name=":28" /><ref name=":31" />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ref name="기원과">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박명림, 나남, 1996) 157~158</ref><ref>북한 50년사: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김학준, 동아출판사, 1995) 110</ref><ref name="북한107">북한 50년사: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김학준, 동아출판사, 1995) 107</ref> 김일성 암살에 실패하자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과 [[김책]]의 집에 습격·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량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량욱]]의 부재로 아들과 딸 등 그의 가족만 죽게 만들었다.<ref name="기원과157">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박명림, 나남, 1996) 157</ref><ref name="북한107" /> 청년단원 중 한명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무임승차권(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임정 신임장)을 분실했고 이는 [[북한]]측에 의해 입수되었다.<ref name="북한107" /><ref>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박명림, 나남, 1996) 158</ref> 이 테러가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과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의 [[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지만 이 테러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당시 북한의 출판물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ref name="kuu0531">김삼웅, 《백범평전》 (시대의 창, 2004) 531페이지</ref>
 
===== 이승만과의 경쟁 =====
[[1946년]] [[4월 6일]]자 소련군정문서에 의하면 소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김일성]]을 암살미수의 배후로 보았다. 그 때문에 이승만과 김구는 좌익에게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 받았다. "(라) 보고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 전에 북조선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교부한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만식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소련군정문서, 남조선 정세 보고서 1946년 4월 16일자, '13. 구두 정보 보고')
[[파일:RheeSyngman 1945's.jpg|섬네일|180px|left|[[이승만]], 해방 직후 정치적으로 경쟁하던 중, 장덕수 암살 사건을 계기로 결별한다.]]
 
김구는 평소 [[이승만]]에게 '''우남 형님''', '''우남장'''(雩南丈) 이라며 존대했다. 그러나 [[반공주의]][[우익]] 진영의 주도권을 놓고 그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미국]]의 한인 교포 노동자들과, 청년층 지식인들이 정치자금과 후원금을 송금한 [[이승만]]과 비교할 때 그에게는 정치자금이 부족했다. 정치자금이 부족했던 그는 화교 무역으로 정치자금 마련<ref name="화무1"/> 을 모색한다.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1946) ====
[[파일:Seoul-Deoksugung-10.jpg|섬네일|250px|left|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파일:1946년 제1차 미소공위.JPG|섬네일|270px|right|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1946년 [[3월 20일]]에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은 미국의 예상대로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을 과도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련측은 “북한 주민도 모스크바 협정문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 (1890년)|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8/25/2006082577002.html|제목=[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주간조선}}</ref>
 
[[이승만]]은 [[장제스]]가 김구에게 지원하려던 거금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는 정치자금에 관한 한 일찌감치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미군정의 후원아래 친일 경제인들이 조직한 대한경제보국회가 [[1946년]] 초 2천만원의 정치자금을 모았는데 이중 1천만원이 이승만에게 전달될 정도였다. 이즈음 20만달러의 반입을 포기한 김구는 이승만에게 이 돈을 주기로 약속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시절 [[이승만]]과 재미교포 사회에서 받은 지원에 대한 보답 성격이었다.<ref name="화무1"/> 이때부터 돈을 손에 넣기 위한 이승만의 집요한 노력이 시작된다. 그는 1946년 2월 장제스 총통에게 전보를 보낸다. “20만달러를 미국 안전신탁공사(American Security and Trust Company)에 예치시킨 뒤 워싱턴의 임병직 대령(이승만의 심복)에게 지불해달라”는 것이었다. 전보를 접수한 국민당 우티에청 사무장은 잠시 난감했지만 곧바로 장제스에게 “이 돈은 이승만이 아닌 김구가 수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제출한다.<ref name="화무1"/>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민족주의진영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1946년]] [[3월 22일]] [[국민당 (1945년)|국민당]]과의 통합을 선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3_22_0030|제목=한국독립당과 국민당 합동선언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4월 7일에는 [[한국독립당|한독당]], [[국민당 (1945년)|국민당]], [[한국민주당|한민당]], [[신한민족당]] 등 4당 합동교섭위원 합당 협의를 하였는데, [[한국민주당|한민당]]측이 '중앙위원수와 인선배치가 명확치 않아 당을 헌납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통합에 난항을 겪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07_0040|제목=한독·국민·한민·신한민족당 등 4당 합동교섭위원 합당 협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에 김구는 4월 9일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국독립당|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당에 얽매이지 않은 거국적이고 초당적인 국민운동의 필요'하다며 거부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09_0040|제목=김구·이승만이 회합하고 정당 불참 결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4월 18일 [[한국독립당|한독당]]으로의 통합에 [[국민당 (1945년)|국민당]], [[신한민족당]]만이 참여하였고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이탈하였다. 김구는 [[한국독립당|한독당]] 위원장에 추대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18_0130|제목=한독·국민·신한민족당 합동,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파일:방응모.JPG|섬네일|180px|right|[[방응모]], [[조선일보]]의 사주였던 [[방응모]]는 귀국 이후 그의 정치적, 경제적 후견인이었다.]]
이후 [[미소공동위원회]]는 난항을 거듭하다가, 4월 18일 과도정부 수립에 참여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 즉 '공동성명 제5호(제5호 코뮤니케)'가 발표되었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18_0070|제목=미소공위 공동성명 제5호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어서 4월 27일 [[존 하지]]가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하더라도 반탁의견 발표를 보장하겠다는 특별성명을 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27_0080|제목=하지, 공위가 요청한 정당 및 사회단체의 선언서명에 관해 특별 담화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에 5월 2일 [[비상국민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한국독립당]], [[한국민주당]] 등 25개의 우익 정당과 사회단체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되 탁치를 전제로 한 일체 문제는 절대 배격한다"고 발표하며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5_02_0060|제목=비상국민회의 및 휘하 단체, 공위 제 5호성명에 서명 합작결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ref> 그러나 [[소련]]은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했어도 신탁 통치 반대를 포기하지 않는 한 협의할 용의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 5월 6일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3&aid=0009744033&sid1=001|제목=[광복 75주년] ⑩두 차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분단의 길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뉴시스}}</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5_09_0080|제목=하지, 미소공위무기휴회에 관해 특별성명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승만]]은 [[1946년]] [[2월]] 전보를 시작으로 47년 말까지 4~5차례에 걸쳐 장제스에게 이 자금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한다. 미군정과의 관계악화로 46년 말 도미했던 그는 이듬해 [[4월]]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일부러 상하이·난징을 거쳐서 돌아온다. 이때 [[장제스]]와 처음 대면한 그는 20만달러 이야기를 꺼내지만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한다.<ref name="화무1"/> 이때 [[장제스]]는 서울의 김구에게 전화했고, 김구는 [[이승만]]이 귀국길에 상하이에 들렀음을 접하고 자금 일부를 국내로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파일:신탁통치 반대 집회 01.PNG|섬네일|200px|right|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그로부터 두달 뒤인 47년 [[6월]] 김구는 주한 중국영사관에 부탁해서 10만달러를 임시정부 주화(중)대사관의 운영자금으로 지원토록 한다.<ref name="화무1"/> 국내정치에서 이승만과 긴장관계가 조성된 만큼 돈을 자기몫으로 챙긴 것이다.<ref name="화무1"/> 그러나 [[이승만]]은 이 돈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해 8월 프란체스카와 함께 주한 중국영사관을 찾아가 나머지 10만달러를 달라고 사정하지만 실패한다. 이 일 직후 10만달러는 김구의 아들 김신이 들여와 [[경교장]] 생활비와 ‘[[백범일지]]’ 출간비용 등에 충당했다.<ref name="화무1"/> 정치자금이 부족했던 김구는 일단 [[한민당]]이 보낸 자금과 경방에서 보낸 7백만 달러를 받아들인다. [[조선일보]]의 [[방응모]]와도 연대하여 경제적 후견인으로 삼는다.
[[미소공동위원회|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운동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ref>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29페이지</ref>
 
[[방응모]]는 곧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과 재정부장을 지냈다. [[방응모]]는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ref name=autogenerated3 />,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3 />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ref>,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 등으로 참여하였다.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46년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 유해봉환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방응모]]는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에 서자 그와 결별하기 전까지 그가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거나 지원하였다.
[[파일:3의사 유해 환국.JPG|섬네일|오른쪽|1946년 6월 16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 [[서울역]]에서 (오른쪽 두 번째가 김구)]][[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 발언]]을 할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상공회의소]] [[강익하]]가 찾아와 김구에게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그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55쪽.</ref>
 
[[1945년]] 말 그는 1천 5백만~2천만 원의 '애국금'을 기부받았다.<ref name="우이연1">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2005) 606페이지</ref> [[정병준]]에 의하면 '김구가 받은 1천 5백만~2천만 원의 '애국금' 중 상당액이 이승만에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ref name="우이연1"/>'고 한다. 정치 자금의 부족은 그의 활동에 제약을 가져왔다.
1946년 [[5월 15일]] 윤봉길 등 7의사의 유해가 일본에서 부산항에 도착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5_15_0110|제목=윤봉길 등 7의사의 유해가 일본에서 돌아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김구는 [[6월 15일]] 낮 12시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 추도회에 참석하였다. [[6월 16일]] 오후 5시 40분 3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서울역장 안내로 일단 귀빈실에서 잠시 휴계한 다음 소년군을 선두로 [[조계사|태고사]]에 안치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16_0100|제목=윤봉길·이봉창·백정기 추도회 거행, 유해는 서울 태고사에 안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16_0110|제목=윤봉길·이봉창·백정기 추도회, 김구 등 담화와 安慰式 거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화교 무역 시도와 실패 ======
1946년 [[6월 11일]] [[정동교회]]에서 개최된[[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국대회 2일차에 강연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11_0080|제목=독촉국민회, 전국대회 2일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독립의 첩경은 오직 통일에 있다고 강연을 하였다. "어떠한 정당에서는 독립도 되기전 토지와 물건을 균배하라는 등 떠들고 있으나 지금 우리 것을 우리가 갖지 못하고 외국인 의 손에다 두고 있는데 어떻게 균배하겠는가? 먼저 우리는 나라를 찾은 후에 모양과 색채는 그때 결정하자!" "무슨 주의니 무슨 사상이니 하고 주석(柱石) 하나라도 파괴하는 사람은 역적도배이니 이러한 도배는 적어도 내 가정, 내 동네(洞里), 내 직장에서는 한 사람도 없도록 하여야 한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11_0150|제목=이승만, 독촉국민회 전국대회에서 강연|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김구는 다른 편으로는 [[중국]] [[화교]]무역을 통한 정치자금 조달을 계획한다. 20만 달러의 '해프닝' 이후에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중국국민당]] 사이에는 모종의 계획이 추진됐다. [[1947년]] 말 임시정부 주화(주[[중국]])대표단에서 국민당과 김구의 연락을 맡고 있던 [[민필호|민석린]]은 ‘중한동제실업공사 조직요강 초안’을 작성, [[중국 국민당|국민당 사무장]] [[오철성|우티에청]]을 통해 [[장제스]]에게 올린다.<ref name="화무1"/>
 
{{인용문|중국 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각 당의 경제기초 건설을 위해 중한동제실업공사(中韓同濟實業公司)를 조직한다. 업무범위는 무역·운수·어업·부동산·공장·은행·농장 등으로 정한다. 자금은 우선 1백억원을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이 절반씩 출자하고 장래 업무발전 상황에 맞춰 증자한다.}}
1946년 [[6월 29일]], 새로운 민족통일기관의 설치구상과 단독정부 수립 준비 및 지지기반 확보를 위하여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였다.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ref>{{웹 인용|url=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0275|제목=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해방 이후 가장 비중이 컸던 대일무역을 비롯해 대외교역이 거의 끊어진 상태에서 유일한 것이 타이완·홍콩·마카오 등지와 이뤄졌던 화교무역이었다. “타이완산 소금이 한국에 수입됐는데 반응이 좋았고 빈 배로 돌아가기 아까워서 인삼을 실어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같은 한·중간 경제활동을 관장함으로써 양당의 정치자금으로 쓰고자 했던 것이다.<ref name="화무1"/>
19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존 하지|하지]] 중장, [[이승만]]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ref>[http://kiib.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2016# ▒ 경인일보 창간 50주년 '도약! 2010' ▒<!--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kiib.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2016 }}</ref>[[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6년 8월 26일 조병옥, 장택상, 김성수, 장덕수, 이승만, 김구를 암살하기 위해 북한에서 특파한 요인암살대원 이종섭(李鍾燮), 최한(崔翰), 이원희(李元熙), 김천호(金天虎) 등 8명이 검거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08_26_0040|제목=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특파된 남조선 요인암살대원 8명 검거|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ref name="역문1">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ref>
 
민석린과 우티에청 간에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고 갔다. 국내에서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운 김구나 장기간의 대일전과 국공내전으로 자금이 소진된 장제스, 양측의 이해가 맞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임시 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결고리였던 우티에청은 바람직한 내용으로 판단하고 장제스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만다.<ref name="화무1"/> [[1948년]]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결정적 국면에 다다른 시기였다. 남북한이 각자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김구의 입지는 좁아졌고 결국 [[이승만]]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한다. [[중국 국민당]] 역시 [[국공 내전]]이 심화되면서 [[베이징]]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내주는 등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ref name="화무1"/> 결국 [[중화민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중국 공산당]]에게 뺏기게 되었고, 이로써 화교무역을 통한 김구의 정치자금 조달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1946년 [[11월 23일]] 김구는 [[서울신문]] 1주년 축사에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그 중 친일청산에 관한 발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친일분자 숙청은 마땅하지만 그 죄상을 □衝하지 않고 그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용서할만한 자도 기어이 매장하라고 한다. 왜적 이상으로 나쁜 친일분자는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고, 죄가 비교적 가벼운 무리도 자숙하는 태도를 보이건만, 소위 황국의 성전을 위해 글장이나 쓰고 연설쯤 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면서 도리어 날뛰는 무리를 대할 때에는 구역질이 나지 아니 할 수 없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1_23_0030|제목=김구와 허헌, 정치적 포부 피력|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사실상 [[한국민주당]]을 지목하여 비난한 것이었다.
 
===== 반탁독립투쟁위원회임정법통과 활동임시정부의 재편성 (1947) =====
[[파일:김구와 윤봉길 가족.JPG|섬네일|left|[[8.15 광복]]이듬해인 1946년 백범 김구와 윤봉길의 가족. 왼쪽부터 김구,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파일:손기정,서윤복,김구,남승룡.JPG|섬네일|left|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이후 [[경교장]]에서 기념사진. 왼쪽부터 [[손기정]], [[서윤복]], 본인, [[남승룡]]]]
 
[[1947년]] [[1월]]초 [[이승만]]의 도미 외교 목적의 출국시 김포 비행장에 나가 환송하였다.
[[1947년|1946년]] [[1월|12월]] [[이승만]]이 도미 외교에 나섰을 때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민족 외교'를 위해 11월 26일 '외교사절 후원회'를 조직했다.<ref name="Lee238">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238페이지</ref> '이승만 박사 외교사절 후원회'의 부위원장은 [[조소앙]]이 맡았고, 김구와 [[배은희]] 등은 반탁총동원위원회나 비상국민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거뒀다.<ref /> 그리고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국내 책임자로 적극적으로 도미 외교를 지지하였다.<ref /> 12월 2일 이승만 출국시 김포 비행장에 나가 환송하였다.
 
[[1947년]] [[1월]] [[이승만]]이 [[미국]]을 떠나기 전에 우익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되 김구가 체포되어 투옥될 정도로 격렬하게 하도록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ref name="강준만 2.13">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3쪽.</ref> 그러나 계획은 미군정 첩보망에 걸렸고 이승만은 [[1월 16일]] [[미국]] [[워싱턴 D.C.|워싱턴]]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내 김구에게 과격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ref name="강준만 2.13"/> [[존 하지]] 중장으로부터도 다시 경고를 받았다. 결국 김구는 학생들에게 과격시위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1947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움직임에 따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다시 가열되기 시작했다. 1월 14일 미군정은 [[경향신문]]을 통해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연맹|전국학생총연맹]](전국학련) 주도 하에 반탁데모가 이루어질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le_001_1180|제목=이승만관계서한자료집 1(1944-1948)(대한민국사자료집) > 국내 정치 상황|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한편 1월 16일 서울로부터 '[[반탁전국학생연맹|전국학련]] 산하의 학생들이 1월 18일 반탁데모를 전개시키고자 계획하고 있다'는 전보를 받은 이승만은 "조선에는 여하한 데모도 전개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행동이 외국배척운동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답장을 보냈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1_16_0070|제목=이승만,반탁데모를 경고하는 전문을 민주의원에 송달|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월 18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에도 시위를 자제하라고 전보를 보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1_18_0040|제목=재미중인 이승만이 민주의원에 보낸 전문 공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에 [[반탁전국학생연맹|전국학련]]은 매국노소탕대회, 반탁의 재계몽운동, 학생운동사 보고대회, 반탁웅변대회 등 기존 계획<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1_18_0060|제목=전국학생총연맹,탁치반대투쟁사발표대회에서 회색분자소탕 등 결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을 전면 수정하고, 1월 18일 오후 2시 [[종로동 (서울)|경운동]] 천도교강당에서 '반탁학생투쟁사 발표대회'만을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김구 등도 참석하였다. [[이철승]]의 '반탁이냐 죽음이냐', 최성의 '이북학생투쟁사', [[송원영 (1928년)|송원영]]의 '·18 반탁학생의 투쟁사' 등의 발표가 있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1_18_0070|제목=전국학생총연맹,탁치절대반대와 자주독립완수 등의 성명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7년]] [[1월 18일]] [[김성수 (1891년)|김성수]], [[조소앙]], [[이철승]]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서울특별시|경성]]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구는 [[김성수 (1891년)|김성수]]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ref>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11</ref>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 등에도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이는 대부분 일회성이었다.<ref>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ref>
 
원래 우익진영은 김구의 주도로 [[1947년]] [[1월 18일]] 김구의 주도로 우익진영은 [[전국반탁학련]] 반탁궐기 1주년을 기념, 대대적인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소요를 일으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이승만]]의 만류와 주한미군 사령관 [[존 하지|하지]]의 경고로 김구는 [[반탁]]시위를 보류하였다.<ref name="강준만 2.13"/>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는 [[천도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축소되었고,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ref name="강준만 2.13"/>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회]]가 [[김규식 (1881년)|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한다고 결의하자,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투쟁위원회]]에서는 [[좌우합작위원회|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공격했다.<ref name="역비1">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사, 2006) 171페이지</ref>,
1947년 1월 21일 김구, [[조소앙]], [[김준연]] 등 9명이 협의하여 각 사회단체가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함께 역량을 집중하기 위한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설치키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결성은 24일 [[경교장]]에서 42개 단체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최고 고문으로 [[이승만]], 위원장으로 김구, 부위원장으로 조성환, [[조소앙]],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를 추대하였다.<ref name=":5">{{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3503|제목=반탁독립투쟁위원회(反託獨立鬪爭委員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2020-09-11}}</ref>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회]]가 [[김규식 (1881년)|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한다고 결의하자,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투쟁위원회|반탁독립투쟁위원회]]에서는 [[좌우합작운동|좌우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공격했다.<ref name="역비1">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사, 2006) 171페이지</ref>
 
47년 [[2월 14일]]~[[2월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만약 [[이승만]]이 조속히 [[미국]]측으로부터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로 하여 [[이승만]]의 도미를 찬성하였기 때문에 이젠 자기 길을 걷겠다고 나선 셈이었다.<ref name="강준만2.14"/> 김구는 임정 계열과 함께 [[이승만]]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3.1절]] 전후로 [[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의 3.1절을 전후하여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은 기밀이 누설되어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조차 '아이들 장난'으로 조롱하였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했다.<ref name="강준만 2.15"/> 미군정은 김구와 [[이시영 (1868년)|이시영]], [[조완구]], [[유림 (1894년)|유림]], [[조소앙]] 등을 호출하였고, 군정의 호출을 받고 3월 5일 임정 요인들을 데리고 주한미군사령관실을 방문하였다. 군정청은 그들을 잡아넣겠다고 협박했고 이들은 이에 굴복하여 정부수립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정해구]]는 김구의 이같은 시도에는 '이승만 부재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의한 김구의 의도도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국민회의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하려던 김구의 이같은 시도는 미군정의 적극적인 대처와 여타 세력의 지원부족으로 제대로 성공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ref name="강준만 2.15"/> 한편 김구의 반탁노선에 반발한 [[한독당]] 내의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 등 구 [[조선국민당|국민당]] 세력은 반탁노선에 반기를 들고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한독당을 이탈하기도 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0쪽.</ref>
1947년 2월 14일 하오 1시반 서울 천도교대강당에서 김구와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 및 방청객 2천여 명이 참석한 '반탁독립궐기대회'가 열렸다. 반탁독립궐기대회는 '과도적 독립정부'를 서울에 수립할 것과 아울러 '신탁통치 내용의 여하와 기간의 장단을 불문하고 결사반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ref name=":5" /><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2_14_0050|제목=반탁독립투쟁위원회 주최 반탁독립궐기대회 개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7년]] [[3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보선할 때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부주석으로 추대되었다.<ref name="이데">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pp 360</ref> 김규식.장건상.김붕준(金朋濬) 등 중도파 국무위원은 보선에서 배제되었다.<ref name="이데"/> 그리고 [[1947년]] [[9월 5일]]의 국무위원 보선에서 재선되었다.<ref>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pp 360~361</ref>
김구, 조완구, 조경한 등은 한독당 내 국내파가 정치이념의 차이 등의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한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고<ref name="yunbi5292">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6) 529</ref>, 김구는 1947년 2월 26일 3.1절까지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이 거부될 때에는 한독당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초강경자세로 나왔다.<ref name="yunbi5292" />
 
===== 미군정반탁, 접수임정 법통 운동 (1947) =====
[[파일:Kim Gu (1947).jpg|섬네일|right|150px|김구 (1947년)]]
한편 이승만이 미국에 나가 있는 동안 국내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지지세력은 임정 법통을 계승하는 단체를 수립하고 미군정을 접수하기 위한 운동을 빠르게 추진하였다.
 
[[4월 21일]] [[이승만]]이 귀국하는 날, [[김포]]에 마중을 나가 단정론 연설만은 그만두도록 충고하였다.<ref>정경모,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51페이지</ref> 단정론 연설이 자칫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승만]]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연설을 취소하였다.
[[1947년]] [[2월 17일]] [[민족통일총본부]]·[[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비상국민회의]]를 통합하고 [[비상국민회의]]를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로 개칭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2_17_0090|제목=비상국민회의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 개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3월 1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는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법통을 승인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를 봉대한다고 결의하였다. [[3월 3일]]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는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 [[장건상]], [[김붕준]], [[차리석]], [[김원봉]], [[김성숙 (1898년)|김성숙]], [[성주식]] 대신에 [[오세창]], [[김창숙]], [[박열]], [[지청천|이청천]], [[조만식]], 이을규(李乙圭) 등 6인을 국무위원에 보선하였다.<ref name=":35">{{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3_03_0040|제목=국민의회,임정주석에 이승만,부주석에 김구를 추대하고 국무위원을 보선|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김구는 [[이승만]]과 반탁 투쟁을 전개했다.<ref name="논쟁169" />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여러 단체간 이견이 존재하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ref name="강준만 32">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2쪽</ref><ref>정해구, 《분단과 이승만:1945~1948》〈역사비평〉제32호 (1996년봄) 276쪽.</ref> 서울 시위를 주도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는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ref name=autogenerated2>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2~33쪽</ref>
[[1947년]] [[3월 5일]] 미군정의 요청에 의해 김구, [[조소앙]], [[이시영 (1868년)|이시영]], [[유림 (1894년)|유림]]은 덕수궁에서 브라운 소장과 2시간 요담하였다. "(金九) 정권을 대한임정에게 이양해 주지 않겠는가? (브少將) 할 수 없다." '''"(金九) 우리가 국내에 들어와 보니 입국 이래 조선국민이 임정을 절대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국무성에서 내세운 두 가지 조건은 해소된 것으로 보며 따라서 임정을 승인해 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브少將) 사실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의 미국 견해와 현재의 정세와는 다르니 승인해 줄 수 없다."''' 등의 대화가 오갔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3_05_0050|제목=김구 등,브라운소장과 임정승인에 관해 의견 교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은 다시금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김구는 6.23 반탁데모를 격려하였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대통령|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트루먼]]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김구는 '트루먼이 전 세계 자유애호 인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김구는 친필로 6.23 반탁데모에 장군 [[남이]]가 지은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라는 시를 선사하여 격려하였다.<ref name="강준만 34">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4쪽</ref><ref>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 김구 시대의 정치사》(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154쪽에서 재인용</ref> 그러나 그러나 김구와 [[이승만]]의 격려와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9월 17일]] [[미군정]]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고 밝혔다. '미소공위를 통해 한반도에 민주적 독립국가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소련]]은 반발하였고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1쪽</ref>
[[1947년]] [[4월 21일]] 비행기편으로 [[경기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김구는 김포공항에 나와 그를 친히 마중하였다.<ref>정경모,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51페이지</ref>
 
[[1947년]] [[7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강연회에 김구, [[김규식]]은 연사로 참여하였다. 김구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다. 다음 연사인 김규식이 장내에 소개되었다. 장내의 열띤 청중들은 [[김규식]]의 예정된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마침내 한 청년이 나와서 김규식과 같은 유물론자의 연설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두가 귀를 막자고 제안했다. 청중들은 이 문제를 표결에 붙여버렸다.<ref>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6) 200페이지</ref>
[[1947년]] [[4월 27일]] [[동대문운동장|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귀국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공산주의와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우리는 총선거법안을 빨리 만들어 남한과도정부를 수립하고 UN을 참가시켜 소련을 설득한 후 통일을 이뤄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단념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할 것'이라고 요구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4_27_0020|제목=이승만귀국환영대회가 거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승만]]이 임정법통론을 보류한데다가 4월 29일에는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 주석 취임까지 거부하자 급기야 5월 2일 [[경교장]]에서 이승만, 김구, 조소앙, 조완구, 이청천, 김창숙 등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 국무위원들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 지방대표 여러 명이 모여 회담을 하였는데, 이승만의 임정봉대가 필요할 시기가 올 때까지 보류하자는 의견과 임정 일부요인의 임정봉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좁혀지지 못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5_02_0020|제목=국민의회내 임정계와 이승만계,임정봉대론으로 의견 양립|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김규식의 연설을 듣지 말자는 주장은 바로 가결시켰고, 이어 [[김규식]]은 조용히 퇴장해버렸다.<ref>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6) 201페이지</ref> 김구는 이를 보고 말리지도 않았다.
[[1947년]] [[5월 9일]] 이승만은 "대한임정법통관계는 지금 문제삼지 말고 아직 잠복상태로 계속하였다가 정식국회와 정식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법통을 정당히 전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5_09_0050|제목=이승만,과도정부수립과 임정봉대문제에 관해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우익 진영 단결 노력 =====
====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 ====
[[파일:0 DankookU 0.JPG|200px|[[단국대학교|단국대학]] 설립시 격려차 방문 [[1948년]] [[1월 18일]] [[낙원동 (서울)|낙원동]]<br />앞줄:김구 [[장형 (1889년)|장형]], 뒷줄:[[장도빈]], [[엄항섭]], [[양주동 (1903년)|양주동]], [[김정실]], 박정숙|left|섬네일]][[1947년]] [[3월 20일]] 김구는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한국 광복군|광복군]]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하였다.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 (1889년)|장형]]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이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파일:Syngman Rhee and Kim Gu in 1947.jpg|섬네일|right|160px|[[덕수궁]]에서 [[이승만]]과 함께 ([[1947년]])]]
강사는 [[조소앙]]·[[조완구]]·[[신익희]]·[[지청천]]·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양주동 (1903년)|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엄항섭]]·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정인보]]·황기성(黃基成)·[[이인]]·[[김활란]]·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반탁운동, 임정 법통 운동과 함께 김구는 우익진영 단결, 통일을 추진했다. 그는 우선 반공, 우익진영 정당 통합을 추진했고, 다수의 우익인사들은 그의 단결 노력에 동조했다. [[안재홍]]은 광복 직후 [[조선국민당]]을 창당하고, [[권동진]]은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여 각각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나, 김구의 우익진영 단결운동에 동조하여 한국독립당에 통합을 시도한다. 그러나 미소공위 참가 여부를 놓고 꾸준히 충돌하다가 국민당계는 탈당하게 된다. 미소공위에 긍정적 의사를 보였던 신한민족당 계열 역시 축출당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된 후 재정난 등의 문제로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산했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3_1949_08_23_0050|제목=金九가 소장으로 있었던 建國實踐員養成所를 해산하기로 결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건물(원효사)은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930095|제목=백범 김구가 세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아시나요?|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경향신문|확인날짜=}}</ref>
 
김구, 조완구, 조경한 등은 한독당 내 국내파가 정치이념의 차이 등의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한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고<ref name="yunbi529">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6) 529</ref>, 김구는 47년 2월 26일 3.1절까지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이 거부될 때에는 한독당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초강경자세로 나왔다.<ref name="yunbi529"/>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
[[파일:Kim Gu (1947).jpg|섬네일|right|150px|김구 (1947년)]]
 
한민당에서도 김구의 우익진영 단결 노력에 반응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 (1891년)|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ref name="아아아앙">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6쪽.</ref> 이는 장덕수에 대한 김구의 감정이 악화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를 놓고 우익진영이 분열되었다. 6월 10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은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진영의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10_0120|제목=한민당,공위참가에 대해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에 이승만은 "공위 참가할 사람은 5호 성명에 서명(찬탁)하기로 되었는 즉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중략) (5호 성명에)서명해서 (신탁통치를)지지하기로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이니... (후략)"라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비판하였다.<ref>정해구, 《분단과 이승만:1945~1948》〈역사비평〉제32호 (1996년봄) 275쪽.</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09_0080|제목=이승만,공위에 대해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6월 22일 [[한국독립당]]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3당으로 분립하였다. [[한국독립당]]이 미소공위에 불참한다고 하자, 이에 반발한 [[안재홍]]·박용희 등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을, 권태석 등 민주파는 [[민주한독당]]을 각각 결성하여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에 참가하기로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22_0050|제목=한독당, 공위 참가여부문제로 3당으로 분립|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렇게 우익진영은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한국민주당|한민당]] 중심, 이승만·김구 중심, [[유림 (1894년)|유림]] 중심의 3파로 분립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18_0090|제목=우익진영 공위참·불참을 계기로 3파로 분립|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ref name="서중석57">서중석,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06) 57쪽</ref>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ref name="강준만 65">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5쪽.</ref> 그러나 1주일 후인 [[11월 30일]]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ref name="sa86">교보문고, 《사람과 책 2007년 8월호》 (교보문고, 2007) 86페이지</ref> 김구는 [[11월 30일]] [[이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성명을 번복하여 발표하였다.<ref name="강준만 65" /> 성명서 발표후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ref name="강준만 65" /><ref>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역사비평사, 1991) 545쪽</ref><ref>도진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158쪽.</ref> [[1947년]] [[12월 1일]]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ref>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60페이지</ref>
[[1947년]] [[6월 23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주관 하에 전국 각지에서 반탁시위가 벌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많게는 수만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 반탁시위를 하였다. 종로 군정청 앞에서는 마라톤 선수 [[서윤복]] 귀국환영회가 끝나자마자 [[반탁전국학생연맹|전국학련]] 학생들의 주도로 반탁시위가 있었다(1만명).<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23_0010|제목=각지에서 반탁 데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25_0110|제목=전국학생총연맹중앙총본부 반탁에 관한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 외에 경무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오류동(200명), 평택(150명), 춘천 단양대(1만명), 대전(2천명), 김제 석수각(300명), 전주(3천명), 이리(익산)(3천명), 고창중학교정(3천명), 군산(5천명), 임실(400명), 진주(1천명), 광주(2만명) 등에서 반탁시위가 이루어졌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23_0020|제목=각지에서 반탁데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25_0010|제목=25일 현재 보고된 각 관구별 반탁상황|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비폭력 무저항'을 표방한 반탁시위는 대체로 평온하게 이루어졌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25_0020|제목=경무부장 조병옥,반탁시위로 인한 치안상태에 관해 담화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김구가 반탁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우익단체를 통합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고, 이승만측과의 계속 갈등, 대립한 이유는 중경임시정부의 현실화에 그 목적이 있었다.<ref name="yunbi529"/>
[[파일:Syngman Rhee and Kim Gu in 1947.jpg|섬네일|right|160px|[[덕수궁]]에서 [[이승만]]과 함께 ([[1947년]])]]
 
==== 이승만, 한민당과의 합작 실패 ====
[[1947년]] [[7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강연회에 김구, [[김규식]]은 연사로 참여하였다. 김구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다. 다음 연사인 김규식이 장내에 소개되었다. 장내의 열띤 청중들은 [[김규식]]의 예정된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마침내 한 청년이 나와서 김규식과 같은 유물론자의 연설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두가 귀를 막자고 제안했다. 청중들은 이 문제를 표결에 붙여버렸다. 김규식의 연설을 듣지 말자는 주장은 바로 가결시켰고, 이어 [[김규식]]은 조용히 퇴장해버렸다. 김구는 이를 보고 말리지 않았다.<ref>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6) 200페이지</ref><ref>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6) 201페이지</ref>
[[파일:Jangdeoksu 1945.jpg|섬네일|right|200px|[[장덕수]]. 재령 보강학교 당시 그의 제자이기도 했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자택에서 피살되자 김구는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15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현직 경찰이던 [[박광옥]](朴光玉)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배희범 등 5명이 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1947년]] [[9월 5일]]의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 부주석에 재선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09_05_0030|제목=국민의회, 부서 결정 사항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ref name="아아아앙"/>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국독립당|한독당]] 당원이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자 [[장택상]]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ref name="changback">장택상,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창랑장택상 기념사업회, 1993) 73페이지</ref>'는 것이다.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ref name="changback"/>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고 밝혔다. '미소공위를 통해 한반도에 민주적 독립국가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소련]]은 반발하였고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1쪽</ref>
 
[[미군정]]청 [[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 (1891년)|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ref name="아아아앙"/><ref>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3~124쪽.</ref><ref name="강준만 67">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7쪽.</ref>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ref name="아아아앙"/>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강준만 67"/><ref>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6쪽.</ref>
==== 정치 자금 조달 노력 ====
김구는 환국 초기 [[조선일보]]의 [[방응모]]와 연대하였다. [[방응모]]는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의 위원으로 활동했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3_0040|제목=순국선열추념대회, 서울운동장에서 거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 name="autogenerated3" />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임됐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30_0100|제목=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선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ref> [[1946년]] 2월 8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에 선임됐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2_08_0060|제목=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발족|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으로 결정되었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29_0100|제목=이승만, 민족통일총본부 설치 발표 민족통일선언과 본부임원 결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08_24_0150|제목=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개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7년 1월 26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재무부장에 선정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1_26_0010|제목=반탁독립투쟁위원회, 제1회중앙집행위원회에서 부서결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방응모]]는 1948년 1월 이후 김구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노선에서 이탈하여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 노선으로 가자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는 1948년 2월 3일 '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758419480203m1012&set_date=19480203&page_no=1|제목=김구선생의견(金九先生意見)에대(對)한 우리의취(取)할바태도(態度)|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조선일보|확인날짜=}}</ref> [[방응모]]가 [[한국독립당]] 재정부장을 맡았었다는 데에는 그렇다 또는 아니다 하는 이견이 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02626|제목='방응모 한독당 재정부장' 보도는<조선>의 전형적인 역사 날조 사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오마이뉴스|확인날짜=}}</ref>
 
=====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 =====
김구는 중국 [[화교]] 무역으로 정치자금 마련을 모색하였다. 해방 이후 가장 비중이 컸던 대일무역을 비롯해 대외교역이 거의 끊어진 상태에서 유일한 것이 타이완·홍콩·마카오 등지와 이뤄졌던 화교무역이었다. “타이완산 소금이 한국에 수입됐는데 반응이 좋았고 빈 배로 돌아가기 아까워서 인삼을 실어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같은 한·중간 경제활동을 관장함으로써 양당의 정치자금으로 쓰고자 했다.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중국 국민당]] 사이에는 모종의 계획이 추진됐다. [[1947년]] 말 임시정부 주화(주[[중국]])대표단에서 국민당과 김구의 연락을 맡고 있던 [[민필호|민석린]]은 ‘중한동제실업공사 조직요강 초안’을 작성, [[중국 국민당]] 사무장 [[오철성|우티에청]]을 통해 [[장제스]]에게 올린다. "중국 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각 당의 경제기초 건설을 위해 중한동제실업공사(中韓同濟實業公司)를 조직한다. 업무범위는 무역·운수·어업·부동산·공장·은행·농장 등으로 정한다. 자금은 우선 1백억원을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이 절반씩 출자하고 장래 업무발전 상황에 맞춰 증자한다." [[민필호|민석린]]과 우티에청 간에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고 갔다. 국내에서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운 김구나 장기간의 대일전과 국공내전으로 자금이 소진된 장제스, 양측의 이해가 맞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임시 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결고리였던 우티에청은 바람직한 내용으로 판단하고 장제스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국공 내전]]이 심화되면서 [[중화민국]]이 대부분의 영토를 [[중국 공산당]]에게 뺏기게 되었고, 이로써 화교무역을 통한 김구의 정치자금 조달 역시 실패로 끝났다.<ref name="화무1" />
[[파일:0 DankookU 0.JPG|200px|[[단국대학교|단국대학]] 설립시 격려차 방문 [[1948년]] [[1월 18일]] [[낙원동 (서울)|낙원동]]<br />앞줄:김구 [[장형 (1889년)|장형]], 뒷줄:[[장도빈]], [[엄항섭]], [[양주동 (1903년)|양주동]], [[김정실]], 박정숙|left|섬네일]][[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는 1947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金九)가 귀국한 뒤 국가 건설에 따른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 생애 후반 ===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 출판사에서 백범일지를 활자화한 책을 처음 펴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9733197&sid1=001|제목=백범일지 출간 70주년…관련 도서 380여권 한자리에|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ref>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 장덕수 피살 사건과 한국민주당과의 결별 ====
[[파일:Jangdeoksu 1945.jpg|섬네일|right|200px|[[장덕수]]. 재령 보강학교 당시 김구의 제자이기도 했다.]][[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장덕수]]가 자택인 [[청설장]](聽雪莊)을 방문한 [[박광옥]], [[배희범]](裵熙範)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입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02_0070|제목=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피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했고, 이 필요에 의하여 1947년 3월 이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1947년]] [[12월 4일]]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 경찰은 [[박광옥]], [[배희범]]을 체포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04_0050|제목=장덕수살해범 朴光玉 일당 체포|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 (1889년)|장형]](張炯)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1947년]] [[12월 23일]]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는 [[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애국자들이 검거되고 있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23_0030|제목=국민의회, 장덕수피살사건과 관련 애국자의 검거에 대해 유감표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1948년]] [[1월 16일]] 수도청장 [[장택상]]은 장덕수 살해 혐의로 [[한국독립당|한독당]] 중앙위원 [[김석황]]을 체포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1_16_0090|제목=장택상, 장덕수살해 관련혐의로 한독당중앙위원 김석황 체포|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金正實)·[[양주동 (1903년)|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엄항섭]](嚴恒燮)·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다. [[배희범]]은 연대상과 2년생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다. [[김석황]]은 [[한국독립당|한독당]] 중앙위원이자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 정무위원 겸 동원부장이자 대한보국의용단(대한독립의용단) 단장이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저격된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이 발생하였다. 건국실천원양성소의 본부였던 원효사는 김구가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고 건물은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ref>{{저널 인용
[[1948년]] [[1월 21일]] [[한국민주당]]은 [[임정수립대책협의회]]를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 사실상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측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1_21_0180|제목=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930095
|제목=백범 김구가 세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아시나요?
|출판사 =경향신문
|날짜=2019.03.22}}</ref><ref name="김구와장형"/><ref>「建實(건실)」解散(해산), 1949.08.25, 경향신문2면 사회 기사(뉴스), 建國實踐員(건국실천원) 養成所解散(양성소해산), 1949.08.25, 동아일보2면 사회 기사(뉴스) 참조</ref><ref>建國實踐員養成所(건국실천원양성소) 弘益大財團(홍익대재단)서 經營(경영), 1949.09.25, 경향신문2면 사회 기사(뉴스) 참조</ref>{{참고|건국실천원양성소|설명=김구의 [[건국실천원양성소]]에 대해서는}}
 
=== 생애 후반 ===
[[1948년]] [[2월 26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은 [[김석황]], 조상항(趙尙恒), 신일준(辛一俊), 손정수(孫禎洙), 김중목(金重穆), 최중하(崔重夏), [[박광옥]], [[배희범]] 등이 장덕수 암살의 범인들이라고 발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2_26_0030|제목=딘, 장덕수사건진상 등 제문제 문답|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파일:김구 재판정 출두 장면.jpg|섬네일|left|160px|김구의 군정청 법정 출두 장면 (1948. 03. 12)]]
==== 이승만과의 결별 ====
김구는 장덕수 암살 사건 관련자로 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받은 모욕감때문에 이승만과 결정적으로 결별<ref>[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1/09/14/2001091455380.html (책마을) “같은 편끼리 대립이 한반도 분단 초래”] 조선일보 2001.09.14</ref> 하였다. 김구는 한살 위인 이승만을 깎듯이 형님이라고 부르고 이승만이 나가던 교회에까지 따라 나갈 정도로 형님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ref name="강준만 258">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58쪽.</ref> [[강준만]]에 의하면 '어찌됐건, 피를 나눈 형제 못지 않게 정을 주고받았던 의형제 사이의 애증관계가 아니라면, 김구의 행동은 달리 이해하기가 어렵다.<ref name="강준만 258"/>"고 했다.
 
[[파일:김구 재판 장면.jpg|섬네일|right|180px|미군 군사법정에서 증인 자격으로 심문중인 김구]]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고,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뒷짐 지고 방관하면서 따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ref name="강준만 67"/> 이승만은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였다.<ref>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 김구 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161</ref>
[[1948년]] [[3월 4일|3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 제1회 공개재판에서 [[미군]] 검찰은 권총·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02_0110|제목=장덕수 암살사건 1회 공개재판 개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ref name="강준만 67"/>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ref name="강준만 68">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8쪽.</ref>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한민당은 김구와 임정계를 일제 시대 악명 높은 사교 집단인 백백교에 비유하면서 "살인마의 조직과 명령 계통을 근절하라"고 촉구하였다.<ref name="강준만 68"/>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ref name="강준만 68"/> 사학자 신복룡은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와 이승만이 이끌던 한국민족대표자대회의 통합이 무산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승만에 대한 김구의 배신감이 배가되었다."라고 했다.<ref name="강준만 68"/>
[[1948년]] [[3월 8일]]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는 북미합중국대통령 [[해리 S. 트루먼|트루만]]의 명의로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에 출정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08_0120|제목=장덕수 살해사건 제5회 공판 개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같은 날인 [[3월 8일]]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김주석 부하에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범죄로 김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ref name=":30">{{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08_0060|제목=이승만, 김구의 장덕수살해사건 관련설 일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7년]] [[백야 김좌진]]의 추모회에 참석한 김구는 김좌진의 추도사를 했다.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ref>[[도진순]] 《백범어록》 돌베개 2007년 11월 12일 {{ISBN|978-89-7199-294-4}}</ref>
[[1948년]] [[3월 12일]] 미군 군사법정에 증인심문을 받았다. 김구를 심문한 [[미군정]]청 [[군법무관]]들은 [[대위]], [[소령]], [[중령]]급이었다. "(問) 선생의 제자격인 피고인들이 진술한 것마다 왜 한결같이 선생과 관련한 내용으로 부합 일치될까요? (答) 알 수 없지요. 그러니까 모략이라 생각됩니다." "(問) 누구의 모략이란 말이요? (答) 그것을 이루 다 말하자면 모단체나 개인에 관한 것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리가 없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12_0050|제목=김구, 장덕수암살사건 8회 재판의 증인심문에서 관련성 부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송하였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1948년]] [[3월 15일]] 오전 공판에서 김구의 증인 신문 때 법무장교와 김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자 암살범인 [[박광옥]]은 피고석에서 김구 선생을 모욕한다고 고함을 지르며 혁대를 풀어들고 횡포를 벌여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미군정 라만 검사의 "애국자로서의 선생은 장덕수씨를 애국자로 생각했오?"라는 질문에 김구는 마지 못해 "張 개인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적은 없지만 환국이래 나와 같이 일한 사람이면 모두 애국자로 보니까 장씨도 애국자로 봤겠지요"라고 답했다. 김구에 대한 증인 심문이 끝나고 오후 공판에서 [[배희범]]은 "정권을 잡기 위하여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한 것",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분자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 때문에 장덕수를 암살했다고 증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15_0140|제목=장덕수 살해사건 9회 군률재판 개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재판정 출두 ====
[[1948년]] [[3월 17일]] 제11회 공판 내용에 따르면 [[박광옥]], [[배희범]] 등 용의자들은 장덕수 등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1947년 8월 한양의원에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다. 최중하의 진술에 따르면 원래 [[안재홍]]·[[배은희 (1888년)|배은희]]·[[장덕수]]를 암살하려 했으나 "안재홍씨는 찬탁을 부르짖은 죄는 크나 그후 남북통일을 제창하게 되었으므로 용서하였고 배은희는 그 정치적 실력이 크지 못하므로 제거하지 않아도 좋을 것으로 결정되어 오직 장덕수 1인을 죽이기로 된 것"이었다고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17_0080|제목=장덕수살해사건 11회 군률재판 개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파일:김구 재판정 출두 장면.jpg|섬네일|left|160px|김구의 군정청 법정 출두 장면 (1948. 03. 13)]]
 
[[1948년]] [[2월]] 초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해리 트루먼]] 명의로 군정청 재판정 소환 출두서와 여비가 [[경교장]]에 도착되었다.
[[1948년]] [[4월 1일]] 제21회(최종) 공판에서 [[김석황]], 趙尙恒, 辛日俊, 孫禎洙, 金重穆, 崔重夏, [[박광옥]], [[배희범]] 등 8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됐고, 趙燁, 朴鼎悳 등 2명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01_0210|제목=장덕수살해사건 피의자 8명에게 사형 언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s: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김규식 (1881년)|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1875년)|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ref name="sss">[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7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7쪽].</ref> [[1948년]] [[3월]]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95쪽</ref> [[3월 13일]] 미군 군사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출두하였다.
[[1948년]] [[4월 22일]] [[존 하지]]는 군사위원회의 판결을 검토 후 중앙청공보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최후적 조치를 발표하였다. "1) [[박광옥]] 및 [[배희범]]의 사형은 승인하나 그 집행은 추후 재심할 시까지 보류함. 2) [[김석황]]·申一俊·金重穆·崔重夏의 사형은 종신형으로 감형함. 3) 趙尙恒 및 孫禎秀의 사형은 10년형으로 감형함. 4) 趙燁 및 朴鼎悳의 10년형은 5년형으로 감형함."<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22_0110|제목=장덕수살해사건 군률재판에 대한 하지의 특별조치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김구는 증인 자격으로 재판정에 섰지만 [[미군정]]청 [[군법무관]]들로부터 추궁당했다. 김구를 심문한 [[미군정]]청 [[군법무관]]들은 [[대위]], [[소령]], [[중령]]급이었다.
==== 남북협상 (1948) ====
 
{{인용문|내가 지시했다고 하는 것은 나를 모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놈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설산이 죽은 것만도 분한데 왜 나한테 자꾸 이러느냐?<ref name="heo144">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44페이지</ref>}}
===== 남북협상 선언 =====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 총선거는 "국토를 양분하는 비극"이라고 발표했다가,<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1_24_0060|제목=한독당 김구, 단독선거의 분단성 경고|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1월 30일]] 오전 10시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한 뒤 1시간 정도 요담한 결과 "독립정부수립 견해에 완전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하였다. 의견 일치를 입증하듯 오후 1시경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1_30_0080|제목=이승만과 김구, 독립정부수립에 의견 일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2월 1일]]에는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01_0090|제목=한독당 김구, 정부수립과 민족단결 문제에 관해 담화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2월 4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와 [[한국민족대표자회의|민대]]와의 완전합작은 민족단결 공작에 기초를 주는 것이며 심히 경하할 일이다. 나와 이승만 박사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즉시 실현하자는 목적에 완전한 합의를 보았다"고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04_0080|제목=한독당 김구, 국내정세에 대해 담화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암살범인 [[박광옥]]은 김구의 증인 신문 때 [[법무장교]]와 김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자 피고석에서 김구 선생을 모욕한다고 고함을 지르며 혁대를 풀어들고 횡포를 벌여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ref name="heo144"/>
[[1947년]] [[12월 12일]] 수도경찰청 [[장택상]]은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 측 간부 몇 사람이 [[장덕수 피살 사건]]에 관계된 사실이 있다'며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회의|한국민족대표자회의]](민대) 합동회의에 대한 집회금지조치를 내렸다.<ref name=":4">{{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12_0030|제목=국민의회와 한국민족대표자대회 합동회의에 대한 집회금지조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에 12월 14일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하여 [[장덕수 피살 사건]] 때문에 [[한국독립당|한독당]]원들이 구속된 문제에 관해 요담을 나눴다.<ref name=":6">{{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15_0150|제목=한독당중앙집행위원회, 전국총선거참가 결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2월 20일]] [[유엔 한국 위원회|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맞이할 [[한국민족대표단]]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공동고문으로 추대되었다.<ref name=":7">{{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20_0070|제목=우익진영 정당단체,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래조에 대비 한국민족대표단구성|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2월 21일]] 집회금지조치로 인하여 [[한국민족대표단]] 선정이 보류된 상황에서 [[이승만]]의 [[한국민족대표자회의|민대]]가 일방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결정 발표하자 김구의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측이 반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21_0060|제목=한국민족대표단 구성에 대해 물의 분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하지만 [[12월 26일]] 이승만과 김구가 이에 대해 원만히 합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26_0140|제목=이승만과 김구간에 우익진영 통일 노력 모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28_0010|제목=국민의회와 한국민족대표자대회, 명년 1월 8일에 합동대회 결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3월 8일]] [[이승만]]은 언론에 [[장덕수]]의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부하 몇사람 행동이 김구에게 누가 끼친 것은 유감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1947년]] [[12월 20일]]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조소앙]]은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 [[한국민족대표자회의|민대]]의 단결에 실패된데 상심한다"면서 "무력과 테러로써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벌써 고대의 악습"이라면서 돌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20_0090|제목=조소앙, 정계사퇴 성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는 [[1948년]] [[1월 11일]]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와 [[한국민족대표자회의|민대]] 합동문제가 해결되고 소위원회 의장에 [[조소앙]], 부의장에 [[명제세]]가 추가 선출되면서 일단락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1_11_0030|제목=國議와 民代 합동 일단락으로 의장 조소앙, 부의장 명제세 增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인용문|"고 [[장덕수]]씨 사건에 김구가 관련되었다는 말은 얼마 전에 들었으나 근일 항간에 허무한 풍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는 별로 신뢰치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로는 사실을 모르고 좌우간 단언할 수 없으나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주석 부하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ref>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331페이지</ref>}}
[[1948년]] [[1월 12일]] [[유엔 한국 위원회|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이승만은 위의 인용문에 나와 있듯이 처음에는 김구가 장덕수 암살에 관여하였을 것이라는 설을 믿지 않았으나 항설로 여기던 것이 신문에 보도가 되는 상황에 이르자 단언할 수 없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경교장]] 측에서 지원, 구명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절한다.
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위원회|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 [[소련]]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1_22_0070|제목=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 조선위원단의 북한 입경 정식 거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그러자 1월 28일 김구는 [[유엔 한국 위원회|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게 '미소양군이 철수하여 군정의 간섭없이 유엔 치안 하에 자유스러운 선거를 치러야 하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1_28_0030|제목=김구, 유엔조선임위에 보내는 의견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2월 9일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 한국 위원회|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크리슈나 메논]]에게 남북한 동시 총선거 성립을 위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을 재차 제안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2_09_0010|제목=김구와 김규식, 메논의장에게 남북지도자회담에 관한 서신 전달|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는 남한 단독 총선거를 통해 국제적으로 공인된 정부를 수립한 뒤 압도적인 득표율을 근거로 소련을 쫓아내고 통일을 이루려던 [[이승만]]의 계획에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승만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단체와 언론이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에 회의적이었다.[[파일:Kim Kyu-sik.JPG|섬네일|left|180픽셀|[[김규식]]]]
[[파일:백범 김구.JPG|섬네일|오른쪽|[[38선]]에서 모습]][[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할 뜻을 굳히자 [[신익희]], [[조소앙]]이 찾아와서 그를 만류하였고 [[이철승]] 역시 그를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당시 김구의 현실적인 처지는 더욱 어려웠다. 김구는 한편 으로 선거 참여를 권유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덕수 암살 사건에 관한 군율 재판으로 곤욕을 치러야 할 형편이었다.<ref name="leesi">도진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서울대학교출판부, 1997)</ref>
 
[[3월 4일]] [[미군]] 검찰은 권총·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 하였다. 피고인들은 진술서가 고문과 강압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 에서는 트루만 미국 대통령 명의로 [[3월 12일]]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 하였다.<ref name="leesi">도진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서울대학교출판부, 1997)</ref> [[장덕수 암살 사건]]에 대한 재판은 [[3월]] 한달 동안 21회에 걸쳐 계속 되었다.<ref name="leesi"/>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노선을 바꾸자 측근의 한사람이던 [[김학규 (1900년)|김학규]]도 반대하였다.<ref name="안동의성1">[http://www.donga.com/fbin/output?exclusive=news&f=nes&n=200408170205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동아일보 2004-08-17일자</ref> 그리고 [[김학규 (1900년)|김학규]]는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하고<ref name="안동의성1" />, 그를 [[한국독립당]]에 입당시켰다.
 
==== 남북 협상으로 선회 (1948) ====
1948년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 총선거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자기위안을 받으려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은망념(邪恩忘念)은 해인해기(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2_10_0020|제목=김구,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파일:백범 김구.JPG|섬네일|오른쪽|[[38선]]에서 모습]]
[[파일:Kim Kyu-sik.JPG|섬네일|left|180픽셀|[[김규식]]]]
{{참고|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할 뜻을 굳히자 [[신익희]], [[조소앙]]이 찾아와서 그를 만류하였고 [[이철승]] 역시 그를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당시 김구의 현실적인 처지는 더욱 어려웠다. 김구는 한편 으로 선거 참여를 권유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덕수 암살 사건에 관한 군율 재판으로 곤욕을 치러야 할 형편이었다.<ref name="leesi"/>
이어 [[김규식 (1881년)|김규식]]과 공동으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1875년)|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ref name="sss">[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7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7쪽].</ref>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노선을 바꾸자 측근의 한사람이던 [[김학규 (1900년)|김학규]]도 반대하였다.<ref name="안동의성1">[http://www.donga.com/fbin/output?exclusive=news&f=nes&n=200408170205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동아일보 2004-08-17일자</ref> 그리고 [[김학규 (1900년)|김학규]]는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하고<ref name="안동의성1"/>, 그를 [[한국독립당]]에 입당시켰다.
[[1948년]] [[2월 26일]] [[유엔]]은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결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2_26_0080|제목=유엔소총회, 조선에서의 전국선거 추진안 가결|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3월 1일]] [[김구]]는 '''<nowiki/>'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추대하나 남한 단독 총선거에는 불참한다''''고 선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01_0030|제목=김구, 3·1기념식에서 남한선거에 불응할 것 천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1881년)|김규식]], [[김성수 (언론인1891년)|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ref name="kk11111">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비평사, 2006) 172페이지</ref> 한편 [[한국민주당|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렘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ref name="kk11111" />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 에서 김규식은 한 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ref name="kk11111" /> 는 공격을 당했다.
 
남북협상 참여 당시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북행 직전 [[장건상]]은 김구를 찾아 방북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김구는 방북할 의향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ref>혁명가들의 항일 회상(김학준 지음| 민음사 펴냄 | 2007-10-08) p288</ref>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김구가 방북할 뜻을 표현하자 수백 명의 청년들이 [[경교장]] 앞에 와서 못가십니다 를 외치며 가로막았다. 김구는 학생들에게 호통을 쳤지만 학생들이 물러나려 하지 않자, 아들 [[김신]], 비서 [[선우진]]에게 북행길을 포기한다 하고 발표하고는 담을 넘어서 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김구의 출발 소식이 알려지자 북행길을 주저하던 [[김규식]] 역시 출발한다.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kimkoo.or.kr/03data/sub.asp?pagecode=m03s06t04d&pagecode1=23|제목=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 임하여 남하한 이북 동포에게 기(奇)함|저자=김구|날짜=1948-03-21|출판사=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쪽=|확인날짜=}}</ref>
 
[[4월]] 김구 북행을 결행하려 하자 [[이철승]]을 비롯한 전국학련 일행들은 '이승만 박사와 노선이 분열되면 안 된다'며 [[경교장]]에 드러누워 김구의 북행을 저지했다<ref name="bantack02">[http://www.kbs.co.kr/1tv/sisa/biography/vod/1719701_37004.html 한국 현대사증언 TV자서전:이철승 2부 - 건국과 6.25]</ref>
1948년 4월 1일 이승만은 남북협상 찬성은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01_0180|제목=이승만, 남북협상찬성은 소련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담화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인용문|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열린 YMCA임시회의에 연사로 참석한 [[윤치영]]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ref name="ReferenceA2">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376</ref>
 
그러나 김구는 자신이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는 도와주지 않고 이제와서 북행길은 반대하느냐며 학생들을 향해 실랑이를 벌였다. 그 뒤 경교장에서 사람이 나와 김구는 북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 설명하자 [[이철승]] 등 청년들은 해산했다. 그러나 김구 일행은 이들을 피해 담벼락을 넘어 경교장을 나갔다. 청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구 일행은 [[남북협상]]에 참여하러 북한으로 갔다.
1948년 4월 15일 오후 5시경 김구는 경교장 출입기자단을 초청해서 '남북협상은 성공되리라고 그다지 큰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통사정하려는데 지나지 못한다는 것'과 또 "내가 이번 북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김구는 통일독립을 위해서 끝까지 투쟁하였다고 3천만 동포에게 전하여 주기 바란다"는 비장하고 중대한 발언을 하여 남북협상을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동시 정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15_0040|제목=김구, 남북협상에 임하는 결의 표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남북연석회의남북협상 참가참여 =====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나타나자 [[장건상]]은 놀랐다고 회고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5>혁명가들의 항일 회상(김학준 지음| 민음사 펴냄 | 2007-10-08) p289</ref> 이어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ref name="sss" />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니콜라이 레베데프|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였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030077 (동아광장/윤평중)민족은 主義를 초월하는가] 동아일보 2007년 10월 03일자</ref>
김구는 북행에 앞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의 목표는 오직 통일임을 천명하였다. "금차 회담에 방안이 무엇이냐고 묻는 친구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미리부터 특별한 방안을 작성하지 않고 피차에 백지로 임하기로 약속되었다. (중략) 남쪽에서 단선군정을 목숨 걸고(誓死) 반대하던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후에 그와 유사한 어떤 형태를 표현시키지나 아니할까 하고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있는 한 완전한 기우가 되리라는 것도 단언하여 둔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19_0040|제목=김구,북행에 앞서 남북요인 협상의 목표는 오직 통일임을 천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파일:Two Kim's.jpg|섬네일|오른쪽|140픽셀|[[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br />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1887년)|원세훈]] 순]]
[[1948년]] [[4월 19일]] 오전 5시반경부터 [[대동청년단]], 이북학련(以北學聯), 대한학생총연맹(大韓學生總聯盟)에 속하는 대학중학생 140여 명이 밀려와 마당에 늘어 앉은 한편 뒷문까지 가로막고 김구의 북행을 만류하였다. 이 때문에 김구는 오전 8시경 차를 타고 임시외출하려다가 마당에 내려 다시 실내에 들어갔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19_0030|제목=김구, 청년 학생들의 북행만류에 비장한 결의 표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그리고 오후 3시경 비밀리에 [[김신 (1922년)|김신]], [[선우진]]을 대동하고 자동차로 서울을 떠나 오후 6시 20분경 38선 경계선인 여현(礪峴)에 도착해 기념촬영을 한 후 평양으로 향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19_0020|제목=김구 38선을 넘어 북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ref>{{뉴스 인용
1948년 4월 19일 밤 평양에 도착하여 21일 평양신문기자단 회견에서 38선 제거에 남북 공동노력을 역설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21_0020|제목=김구, 평양신문기자단회견에서 38선 제거에 공동노력 역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제목 =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 임하여 남하한 이북 동포에게 기(奇)함
|url = http://www.kimkoo.or.kr/03data/sub.asp?pagecode=m03s06t04d&pagecode1=23
|출판사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저자 = 김구
|쪽 =
|날짜 = 1948-03-21
|확인날짜 = }}</ref>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열린 YMCA임시회의에 연사로 참석한 [[윤치영]]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ref name="ReferenceA">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376</ref>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한편 신병이 심하여 병원치료를 받던 [[김규식]]도 평양으로 출발하였다. 북행 직전 [[장건상]]은 김구를 찾아 방북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김구는 방북할 의향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ref>혁명가들의 항일 회상(김학준 지음| 민음사 펴냄 | 2007-10-08) p288</ref>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나타나자 [[장건상]]은 놀랐다고 회고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5">혁명가들의 항일 회상(김학준 지음| 민음사 펴냄 | 2007-10-08) p289</ref>
 
{{인용문|조국분단의 위기를 만구하기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한 것은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며 ...(이하 중략)...}}
1948년 4월 21일 0시부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려는 개인 및 대표자들의 38선 이북 월경이 금지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21_0010|제목=21일 정오부터 남북협상참가자 38선 월경금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5월 다시 돌아왔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112페이지</ref>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고, 그러면 누군가 술을 따라주고 밴드가 울린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전혀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안했다.'고 증언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5 />
1948년 4월 21일 김구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서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독립을 진취할 대계를 상토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생략)"<ref name="sss" />
 
===== 남북협상의 실패 =====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니콜라이 레베데프|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이를 눈치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였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030077 (동아광장/윤평중)민족은 主義를 초월하는가] 동아일보 2007년 10월 03일자</ref>
김구의 [[남북협상]] 참가 배경에 대해,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고 한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되었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북한|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고 확신했다는 것이다.<ref>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69페이지</ref>
 
[[1948년]] [[4월 26일]] 김구는 [[송태산장]]을 찾아 도산 안창호의 형인 안치호, 여동생 [[안신호]]를 만나고 내려왔다. [[5월 10일]] 3.8선을 넘어 귀환하였다.
1948년 4월 23일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전조선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결정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23_0060|제목=남북연석회의에서 통과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격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그리고 4월 25일 [[평양방송]]이 이 결정서와 격문을 방송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내 정계에 일대 파문이 일어났다. 즉 이 결의서와 격문이 발표되자 김구·김규식 산하 진영에서는 이때까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을 추진해 온 근본이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26일 [[민주독립당]] 등에서는 연락원을 급파하였으나 [[소련]]측의 입국거부로 인하여 드디어 빈손으로 귀경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25_0050|제목=남북협상의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격문에 대한 반응|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같은날 4월 25일 [[이승만]]은 선출되지 않은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대표의 자격이 없으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은 소련에게 이용당한 결과"라고 혹평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25_0080|제목=이승만, 남북협상의 전도에 대해 논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4월 27일 민족진영 각계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27_0020|제목=남북협상에 대한 민족진영 각계 반향보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남북협상에 다녀와서 나 없는 동안에 총선거니 뭐니 해서 거기 입후보한 사람은 다 탈당해라<ref name="탈당1">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48페이지</ref> 고 했다. 그러자 [[김선]](1910~) 등 총선거에 출마한 당원들은 '할 수 없이 탈당<ref name="탈당1"/>'하였다. [[김선]] 등은 '그래도 다 같이 애국운동 하던 사람인데(이승만) 이젠 나라 세운다니까 여기서 일하자.' '말이 당수지 나가랄때 나가자 우리가 아쉬울 것이 있냐<ref name="탈당1"/>' 하며 [[한독당]]을 탈당했다.
[[1948년]] [[4월 26일]] 김구는 [[송태산장]]을 찾아 [[안창호]]의 형인 안치호, 여동생 [[안신호]]를 만나고 내려왔다.
 
김구와 [[이승만]]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의 회고에 의하면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ref name="탈당1"/>'는 것이었다.
[[파일:Two Kim's.jpg|섬네일|오른쪽|140픽셀|[[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br />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1887년)|원세훈]] 순]]
 
{{인용문|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ref name="탈당1"/>}}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ref name="탈당1"/>'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 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ref name="탈당1"/>'라며 조롱하였다.
1948년 5월 2일 북한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을 근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였다.<ref name=":2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7_1948_05_02_0030|제목=북조선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채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이 북한에게 '합법 정부'를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침울하게 보냈다. 김일성이 2차 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ref>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67페이지</ref> [[1948년]] [[7월 21일]] [[김규식 (1881년)|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자 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통일독립자촉진회 주석에 추대되었다.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ref name="반공1">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6) 23페이지</ref> [[김규식 (1881년)|김규식]] 또한 [[반공주의자|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ref name="반공1"/>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112페이지</ref>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고, 그러면 누군가 술을 따라주고 밴드가 울린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전혀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안했다.'고 증언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52">혁명가들의 항일 회상(김학준 지음| 민음사 펴냄 | 2007-10-08) p289</ref>
 
==== 여순 사건 관련 공방전 ====
1948년 5월 5일 오후 8시경 김구·[[김규식]] 등은 일행 60여명과 같이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ref name=":9">{{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7_1948_05_06_0010|제목=김구·김규식, 남북회담의 성과에 대해 공동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중순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로 지목했다. [[이범석 (1900년)|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다.<ref name="여순1">[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볼록거울> 국가보안법 제정 60돌]{{깨진 링크|url=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 연합뉴스 2008년 8월 29일자</ref>
 
{{인용문|이번 국군이 일으킨 반란의 주요 원인과 폭동 성질은 수식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ref name="여순2">[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7042&PAGE_CD= 김구, 여순반란 '수괴' 될 뻔했다 - 오마이뉴스] 2001년 10월 26일자</ref><br /><br />-서울신문 1948. 10. 22일자 기사}}
1948년 5월 6일 김구는 "경교장에서 내가 떠날 때 만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다녀왔는데 이번 우리 일행의 큰 소득은 말할 수 없으나 장차로 남북의 우리 동포는 통일적으로 영구히 손잡고 살아가겠다는 기초를 튼튼히 닦아 놓았다. 첫술에 배부르는 법은 없는 것이니 다만 한 두 번 또다시 만난다면 우리의 목적 달성을 확신하는 바이다"라고 소감을 밝힌 후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의 성과에 대한 김구·[[김규식]]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ref name=":9" />
 
{{인용문|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ref name="여순2"/><br /><br />-자유신문 1948. 10. 22일자 기사}}
김구의 [[남북협상]] 참가 배경에 대해,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고 한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되었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북한|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고 확신했다는 것이다.<ref>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69페이지</ref>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ref name="여순2"/>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는 책동<ref name="soul481022">서울신문 1948년 10월 22일자</ref>"이며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ref name="soul481022"/>"라고 밝혔다.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에 다녀와서 나 없는 동안에 총선거니 뭐니 해서 거기 입후보한 사람은 다 탈당해라고 했다.<ref name="탈당1">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48페이지</ref> 그러자 [[김선]](1910~) 등 총선거에 출마한 당원들은 '그래도 다 같이 애국운동 하던 사람인데(이승만) 이젠 나라 세운다니까 여기서 일하자.' '말이 당수지 나가랄때 나가자 우리가 아쉬울 것이 있냐' 하며 [[한독당]]을 탈당했다.<ref name="탈당1" />
 
이범석은 또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ref name="soul481022"/>"했다고 발표했다.
김구는 김일성이 1948년 6월 29일에 열리는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ref>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67페이지</ref>
 
다음 날 이범석은 포고문을 발표한다. 이범석 총리는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고 언급하며, 이 반란사건에서 '극우정객'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은근히 부각시켰다.<ref name="여순2"/> 이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장단을 맞추었다. 10월 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범석, 김태선 등이 자신을 극우파로 지적하자 김구는 분개하였다.
김구와 [[이승만]]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의 회고에 의하면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ref name="탈당1" />'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 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라며 조롱하였다.<ref name="탈당1" />
 
그러자 김구는 극우정객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근거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이후 김구는 [[10월 27일]]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ref name="여순1"/><ref name="han1028"/> 김구의 반박 보도문은 [[조선일보]]와 [[한성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 남북협상 직후 =====
[[1948년]] [[7월 21일]] [[김규식 (1881년)|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통일독립촉진회 주석에 추대되었다.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ref name="반공1">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6) 23페이지</ref> [[김규식 (1881년)|김규식]] 또한 [[반공주의자|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ref name="반공1" />
 
{{인용문|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f name="han1028"/>}}
[[1948년]] [[8월]]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정릉에 안장했다.<ref name="기념사7">[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7 기념사업회 연보7]</ref><ref name="사진연보">[http://www.kimkoo.or.kr/03data/sub.asp?pagecode=m03s05&pagecode1=50 사진연보]</ref> 이어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와 [[쓰촨성]]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다.<ref name="기념사7" /><ref name="사진연보" />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다.<ref name="경마">[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9060270385 <nowiki>[경마 이야기] 김구-이승만 이후 정치인 발길 끊겨</nowiki>] 조선일보 1999.06.02</ref> 경마 경주를 좋아하였으나 이때 운구를 호송해 준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이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기도 했다.<ref name="경마" /> [[이승만]]도 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이때부터 경마대회 시상 중 이승만상, 김구상이 즉석에서 생겨났다고 한다.<ref name="경마" />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인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ref>국회속기록 제1회 90호 (대한민국 국회, 1948) 678~679</ref> 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 이에 김구는 그 극우가 대체 누구냐며 [[윤치영]]에게 따졌고, 윤치영은 누군지는 알수 없지만 극우 인사인 것은 분명하다며 응대하였다.
====[[여수·순천 사건]] 당시 ====
[[1948년]]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 칩거 생활 ====
1948년 10월 19일 [[이범석 (1900년)|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여수·순천 사건]]의 경위와 성격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하고 반국가적 반란군을 책동하여 일으킬 책동을 하였다. 불행히도 군정이양전이 되어서 그 가운데 그 중 [[오동기]]란 자가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소령으로 승진하여 여수연대장에 취임하였다. 이 자는 여수에 가서 소위 하사관 훈련의 기회를 포착하여 단순한 하사관들을 선동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극우진영인 해외와 국내의 정객들과 직접 간접으로 연락하여 가지고 러시아 10월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전국적인 기습 반란을 책동하였다." "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私利)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19_0070|제목=李範奭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여순사건 경위와 성격을 설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극우진영, 즉 [[한국민주당]]을 지목하였지만 이를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구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1948년 10월 27일 [[여수·순천 사건]] 진압 직후 김구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였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금번 반란을 우려하고 있다.''' (중략) '''현재까지의 당국 발표에 의하면 반란무리의 목적은 북한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후략)"<ref name=":12">{{웹 인용|url=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781219481028m1017&set_date=19481028&page_no=1|제목=극우관여운(極右關與云)은이해난(理解難)|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조선일보|확인날짜=}}</ref> 같은 날 [[한국민주당]]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금번 반란의 주요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신신훈련(神神訓練)의 결핍에 있다고 논하였다.<ref name=":12" /> 김구는 본인이 극우가 아니라 해명했고 [[한국민주당|민주당]]은 그저 정부를 탓했다.
 
1948년 10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전남지구 반란사건 배후관계에 관하여 전번 李국무총리는 극우진영과 좌익계열의 합작이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사실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번 반란사건에 있어서 국무총리로부터 일부 극우분자와 좌익계열의 합작이라고 말한 데 대해서는 좌익계열이라고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 극우분자라고 한 데 대해서는 국무총리로부터 이에 대한 해명이 있을 줄로 믿는다"라고 답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29_0070|제목=李承晩 대통령, 민병 5만 명 조직계획 및 공무원 최저생활보장 문제 등에 대해 기자와 문답|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10월 30일 김구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30_0020|제목=金九, 여순사건에 대하여 담화를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한국민주당]] [[정광호 (1897년)|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발표 때문에 인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ref>국회속기록 제1회 90호 (대한민국 국회, 1948) 678~679</ref>
 
==== 민족진영 재결합의 노력 ====
[[파일:Kimkupp.jpg|섬네일|140px|left|김구 (1949년)]]
한편 김구는 분명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조국을 영원히 분단시킬 것이며, 결국은 군사대결로 치닫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ref name="riro275">
한편 1948년 초 남한 단독 총선거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 문제로 인해 틀어졌던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의 관계는 우여곡절을 거쳐 점차 회복되었다. 1948년 5월 29일까지만 해도 김구는 "당분간 이승만과의 합작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7_1948_05_29_0060|제목=김구, 당분간 이승만과의 합작은 불가능하다고 언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어 8월 14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하루 앞두고 김구는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라며 "강력한 통일독립운동을 추진하자"고 하였다. 반면 [[김규식]]은 점진적 통일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7_1948_08_14_0030|제목=대한민국수립과 해방3주년을 맞이하여 각계 담화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8) 275페이지</ref> 비록 정치도덕가는 아닌 김구였지만 그러한 조선 민족의 희생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으므로, 그는 김규식과 함께 타협하여 민족통일을 이룩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리처드 로빈슨]]에 의하면 '두 김씨의 입장은 이승만에 대한 두려움, 개인적 혐오감, 애국심이 복합된 것이었다.<ref name="riro275"/>' 한다.
 
[[1948년]] [[8월]]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정릉에 안장했다.<ref name="기념사7">[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7 기념사업회 연보7]</ref><ref name="사진연보">[http://www.kimkoo.or.kr/03data/sub.asp?pagecode=m03s05&pagecode1=50 사진연보]</ref> 이어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와 [[쓰촨성]]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다.<ref name="기념사7"/><ref name="사진연보"/>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다.<ref name="경마">[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9060270385 <nowiki>[</nowiki>경마 이야기<nowiki>]</nowiki> 김구-이승만 이후 정치인 발길 끊겨] 조선일보 1999.06.02</ref> 경마 경주를 좋아하였으나 이때 운구를 호송해 준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이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기도 했다.<ref name="경마"/> [[이승만]]도 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이때부터 경마대회 시상 중 이승만상, 김구상이 즉석에서 생겨났다고 한다.<ref name="경마"/>
1948년 9월 6일 [[장제스]]는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의 합작을 희망한다고 밝혔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9_06_0050|제목=蔣介石 총통, 李承晩 대통령과 金九·金奎植 간의 합작을 희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반민특위 재개와 부활 ===
[[1948년]]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ref name="sss" />
김구는 민족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민족의 반역자인 친일파들은 반드시 처단해야한다며 반민특위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그일로 악랄한 친일파였던 [[장경근]], [[김창룡]], [[김종원 (1922년)|김종원]], [[안두희]], 등의 모든 친일파들의 입장에선 김구는 신경이 거슬렸던 존재였다. 이일로 인해 암살할 명분이 생기기도 했다.
 
=== 암살 ===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1948년 12월 15일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3영수 합작운동 태동이 보도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9_1948_12_15_0070|제목=李承晩·金九·金奎植 3영수 합작운동 태동|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9년 1월 1일 [[김규식]]이 신년인사차 [[청와대|경무대]]의 [[이승만]]을 방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0_1949_01_01_0040|제목=金奎植, 신년인사차 李承晩 대통령을 방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ref name="sss" /> [[1949년]] 1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남북협상]]에 대해서 일부 인사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피력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맹약 파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ref>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1996) 60페이지</ref>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ref name="sss" /> 한편 김구는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파일:경교장 김구.JPG|썸네일|160px|right|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1949년]] 1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남북협상]]에 대해서 일부 인사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피력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맹약 파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ref>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1996) 60페이지</ref>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는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ref name="dd514">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514페이지</ref> '''[[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받았다.<ref name="dd514"/>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ref name="dd514"/>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ref name="dd515">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515페이지</ref>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ref name="dd515"/>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ref name="dd515"/>
1949년 1월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ref name="sss" />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1949년 5월 말에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재결합이 가시화되었다. 5월 20일 김구는 "일반국민들이 3영수의 재합작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현 시국에 비추어 있음직한 일이나 본래부터 대통령과 김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므로... (중략) '''과거 우리들의 노력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중략) '''대통령과 金박사와는 앞으로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하였다.<ref name=":25">{{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2_1949_05_19_0190|제목=李承晩 대통령과 金九, 덕수궁에서 회동|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 name=":26">{{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2_1949_05_20_0030|제목=金九, 李承晩·金奎植과의 3영수합작으로 민족단결이 시급하다고 발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암살의 배후 ====
한편 김구는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파일:Tomb of Baekbeom Kim Gu.jpg|섬네일|200px|김구의 묘]]
김구의 암살 배후는 미궁이다. 한때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0418002 "안두희는 美 방첩대요원...白衣社 단장이 암살 지시"] [[한국경제]] 2001년 9월 5일 작성</ref>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의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ref>[[이제는 말할 수 있다]]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vod/index.html?kind=text&progCode=1000459100046100000&pagesize=15&pagenum=4&cornerFlag=0&ContentTypeID=1 비밀결사 백의사] [[문화방송]] 2002년 1월 20일 작성</ref><ref name="yum11">[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1/11/200501110500023/200501110500023_1.html “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 신동아] 2001년 10월 01일 (통권 505 호)</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086224 "염동진 백범암살 사주한 근거 없다"도진순 교수 반박문 기고] [[동아일보]] 2001년 9월 20일 작성</ref>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 서거 ===
 
한편 안두희는 초기 진술에서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ref name="riro275"/> 고 진술하였다. 한편 안두희가 자신의 군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 했다'는 정보를 접한 것은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 피살 (1949) ====
[[파일:경교장 김구.JPG|썸네일|160px|right|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는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격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ref name="dd514">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514페이지</ref>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ref name="dd514" />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ref name="dd515">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515페이지</ref>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ref name="dd515" />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ref name="dd515" />
 
김구가 피살된 1949년 6월 26일, 이승만은 저녁 9시가 넘어서 [[한국방송공사|서울중앙방송국]] 방송을 통하여 애도방송을 하였다. "...나와 백범 선생 사이의 사분(私分)으로 말하면 호형호제하고 의리는 실로 사생을 같이하자는 결심이 있던 터이며, 임시정부 주석으로 내가 절대 지지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가 귀국했을 때에 나는 무조건하고 지지하여 온 것입니다. 중간에 와서 정치상 관찰의 약간 차이로 말미암아 정계에 다소 의아하는 점이 없지 아니해서 우리 두 사람이 양편으로 시비를 듣고 있었으나 내가 믿고 바라기는 백범 선생이 조만간에 나의 주장하는 것이 아무 사심이 아니요 민국 대계에 유일한 방침으로 각오될 날이 있을 것을 믿고 있었으며, 근자에 와서는 이런 희망이 점점 표면에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마음에 기뻐하는 중인데 졸지에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어공어사에 원통한 눈물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후략)"<ref name=":24">{{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2_1949_06_26_0100|제목=李承晩 대통령, 金九 서거에 대해 애도 방송|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승만은 남북통일에 앞서서 민족진영을 재결합하는 데에 실패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이득을 본 것은 오직 공산당과 친일파와 [[한국민주당|민주당]]이었다.
 
경찰은 암살자가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찰은 암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외부에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ref name="riro275">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8) 275페이지</ref> [[6월 27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는 김구의 죽음이 그의 한국독립당 내에서의 의견 분열 때문이었다고 비판했다.<ref name="riro275" /> 그러나 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발설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고 보도했다.<ref name="riro275" />
 
==== 장례추도사 ====
{{위키문헌|김구 전 임시정부 주석 국민장 이승만 추도사|대통령 이승만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김구 전 임시정부 주석 국민장 이범석 추도사|국무총리 이범석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김구 전 임시정부 주석 국민장 김규식 추도사|전 임정 부주석 김규식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김구 전 임시정부 주석 국민장 엄항섭 추도사|한국독립당 대표 엄항섭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김구 전 임시정부 주석 국민장 엄항섭 추도사|한국독립당 대표 엄항섭 추도사 전문}}1949년 6월 27일 김구의 장례는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이날 오후 5시부터 김규식·최동오·조소앙·안재홍·명제세 등이 회합하여 '고백범김구선생국민장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는 [[오세창]], 부위원장에는 [[김규식]]·[[조완구]]·[[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묘지는 김구의 유언대로 [[효창공원]] 3열사묘 서록에 안치하기로 되었으며, 장일은 7월 5일로 결정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2_1949_06_27_0020|제목=故白凡金九先生國民葬儀委員會, 葬地를 孝昌公園으로 결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승만 부부는 7월 4일 오전 9시 40분경 조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3_1949_07_04_0100|제목=李承晩 대통령 조문 등 金九 국민장에 대한 각계의 반응|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김구의 국민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국민장]]이었다. 조가(弔歌)는 시인 [[이은상]]이 지었다. 행진곡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다단조로 연주하였다.
 
==== 암살 직후 ====
1949년 7월 5일 새벽 1시경 [[경교장]]에서 결관식(結棺式)을 가진 뒤, 오전 10시 30분 운구가 경교장을 출발, 오후 12시 [[동대문운동장|­서울운동장]]에 도착하여 영결식을 갖고, 오후 3시 발인을 하였다. 오후 4시 50분 장지인 [[효창공원]]에 도착하여 오후 5시 하관하고 오후 6시 폐식하였다. 1949년 7월 5일 오후 6시 30분경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3_1949_07_05_0050|제목=白凡 金九 국민장 거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경찰은 암살자가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찰은 암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외부에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ref name="riro275"/> [[6월 27일]] [[이승만]]은 김구의 죽음이 그의 한국독립당 내에서의 의견 분열 때문이었다고 비판했다.<ref name="riro275"/> 그러나 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발설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고 보도했다.<ref name="riro275"/>
 
김구의 장례는 [[국장 (장례)|국장]]이 결정되었으나 [[한국독립당|한독당]] 측에서는 민족장을 고집했다. 정부에서 [[이범석]]과 [[신성모]], [[허정]] 등을 [[경교장]]에 파견하자 [[조완구]], [[조소앙]] 등은 너희가 죽여놓고 너희가 국장을 하느냐며 흥분했고 실랑이와 몸싸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측이 보낸 사절단과 [[한독당]] 인사 간에 마찰이 빚어졌고, [[김규식]]의 중재로 국가와 민족을 합한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김구의 [[국민장]]은 10일간 거행되었다.<ref>[http://news.mt.co.kr/mtview.php?no=2009052414590955771&type=& 국민장, 어떻게 치러지나] 머니투데이 2009년 5월 24일자</ref>
==== 암살의 배후 ====
김구의 암살 배후는 미궁이다. [[안두희]]가 [[6.25 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국회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한국민주당|민주당]] [[김준연]],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 소위 [[88구락부]]가 암살을 주도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김구의 국민장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이었고, 조가(弔歌)는 시인 [[이은상]]이 지었다. 행진곡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다단조로 연주하였다. 같은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한때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0418002 "안두희는 美 방첩대요원...白衣社 단장이 암살 지시"] [[한국경제]] 2001년 9월 5일 작성</ref>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의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ref>[[이제는 말할 수 있다]]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vod/index.html?kind=text&progCode=1000459100046100000&pagesize=15&pagenum=4&cornerFlag=0&ContentTypeID=1 비밀결사 백의사] [[문화방송]] 2002년 1월 20일 작성</ref><ref name="yum11">[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1/11/200501110500023/200501110500023_1.html “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 신동아] 2001년 10월 01일 (통권 505 호)</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086224 "염동진 백범암살 사주한 근거 없다"도진순 교수 반박문 기고] [[동아일보]] 2001년 9월 20일 작성</ref>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 사후 ====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백범어록》 등이 있다.
[[파일:Tomb of Baekbeom Kim Gu.jpg|섬네일|200px|김구의 묘]]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 《도왜실기》, 《백범어록》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도 둘째 아들 [[김신]]은 계속 [[대한민국]] [[공군]]으로 복무하였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공군]] [[중장]]으로 퇴역한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맏며느리 [[안미생]]은 [[미국]]인과 재혼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행방은 미상이다. [[안미생]]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한 손녀딸 김효자 역시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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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60년]] [[고정훈 (정치인)|고정훈]] 등에 의해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에 의한 암살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 (서울)|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ref>북한,조국통일상에 임양ㆍ운동권 학생도, 한국일보 1990-08-17자, 02면</ref> [[1998년]]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10만[[대한민국 원|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이승만이 또 다른 후보로 등록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10만원권10만[[대한민국 원|원]]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ref>[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800307 1등신문 대전일보 59년 정통언론<!-- 봇이 붙인 제목 -->]</ref><ref>[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09012302011557729010 한은 10만원권 발행 백지화] 디지털타임스 2009-01-22자</ref>
 
== 기타 약력<!--위에 언급되지 않은 내용만--> ==
[[2009년]] [[6월 26일]] 소지품인 회중 시계, 유묵 작품 3점, 인장(印章) 3점 및 피살 당시 착용한 혈의(血衣)가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등록문화재]] 439~442호로 등록되었다.
=== 1910년대 이전 ===
* [[1880년]] 백부 김백영 사망
* [[1888년]] 조부 김만묵 사망
* [[1892년]] 임진년 경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보고 서당 공부를 그만두었다.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 그외 서적들을 두루 탐독하고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였다.<ref>[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붙인 제목 -->]</ref>
* [[1901년]] 부친 김순영 사망
* [[1902년]] 여옥과 약혼
* [[1903년]] 약혼녀 여옥 사망<ref>[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2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봇이 붙인 제목 -->]</ref>
* [[1904년]] 12월 최준례(崔遵禮)와 결혼, 장련 읍내로 이사.
* [[1905년]] [[11월]]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code=seoul&id=20050829014001 한화(2)-동생 김호연 빙그레회장家 ] 서울신문 2005-08-29 14면</ref>
* [[1907년]] [[2월]]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 사퇴
* [[1907년]] 신민회에 참가
* [[1911년]] 안악사건에 연루돼 15년 형을 받고 수감
* [[1915년]] 가석방
*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
* [[1919년]] 8월 12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부]] 경무국장 취임
* [[1924년]] 대한통의부, 참의부 [[김명봉]],[[박희광]]등과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암살계획 협력
 
=== 평가임시정부 활동 ===
* [[1926년]] 12월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됨.
=== 긍정적 평가 ===
* [[1929년]] 5월 [[백범일지]] 상권 탈고, 8월 [[상해 교민단]] 단장에 선출.<ref name="fff" />
* [[1930년]] [[8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 [[1931년]] 10월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 [[1932년]] [[1월]] 일본 [[쇼와 천황]] 살해를 노린 [[사쿠라다몬]]({{lang|ja|桜田門}}) 폭탄투척 사건
* [[1932년]] [[2월]] 상하이에 정박중인 이즈모 호 폭파에 [[윤봉길]]을 파견했으나 미수.
*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 쇼와 천황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지휘.
* [[1932년]] [[5월]] 한인애국단원 이덕주·유진식, 조선총독 암살을 위해 국내에파견했으나 체포됨.<ref name="ches1">신용하, 《백범 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312페이지</ref>
* [[1932년]] [[5월]]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최흥식 등을 관동군 사령관 본장결을 암살하기 위하여 만주로 파견하였으나 체포됨.<ref name="ches1"/>
* [[1935년]] [[한국국민당]] 조직.
* [[1939년]] [[5월 30일]] 측근이었다가 결별한 [[안공근]]이 암살되었다. 김구의 최측근 인사인 모 독립지사의 수하들이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을 받았다.<ref name="ah1"/>
* [[194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
*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重慶)으로 이전.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갖고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
*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광복군 침투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
 
==== 독립운동가광복 이후 ====
*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내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ref name="kang60">[[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60쪽.</ref> 그러나 뒤에 김구는 취임을 거절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성사시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것을 높이 평가된다. 김구는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다.<ref>[http://www.naeil.com/News/economy/ViewNews.asp?nnum=369663&sid=E&tid=8 선진문화를 이끄는 힘 ‘장비의 발전]{{깨진 링크|url=http://www.naeil.com/News/economy/ViewNews.asp?nnum=369663&sid=E&tid=8}}.</ref> 그러나 이는 반탁투쟁과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한 뒤에, 뒤늦은 행동이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 [[1945년]] [[11월]] 김구는 임시정부를 정부의 자격으로 귀국을 시도한다. 그러나 [[미군정]]의 반대로 정부 자격으로 귀국 좌절.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각각 임시정부 송별연을 베풀어 줌.<ref>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2002 개정판) 446</ref>
* [[1945년]] [[11월 2일]], [[존 하지]] 중장, 주한미군 사령부 참모회의 석상에서 "김구는 스튜(고깃국)에 필요한 소금이 될 것이고, 그의 출현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ref name="kang60"/>"라고 말함.
* 8.15광복 후 1945년 11월 3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임정요인 환국 제1진으로 귀국.
* [[1945년]] [[11월 24일]] [[존 하지]] [[중장]], 김구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
*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삼상회의 결정서]]를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
* [[1945년]] [[12월 24일]] [[한국소년군]] 총본부 총재에 추대되기도 하였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21</ref>
* [[1945년]] [[12월 27일]] 김구는 삼천만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주제의 방송담화([[엄항섭]] 대독)에서 강력한 국방군의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ref>백범어록 도진순 63페이지</ref>
* [[1946년]]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연명(반탁학련) 데모대가 김구에게 반탁학생대회의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가 있는 서대문 서교장으로 향했다. 신문로에 이르렀을 때 [[좌익]]성격의 학병동맹원들과 충돌하였다. 같은 날 [[천도교]] 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행사를 축소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줄 것을 당부하였다.<ref name="강준만 2.13"/><ref>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146~147쪽.</ref>
*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된 데 이어,<ref name="강준만206">[[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06쪽.</ref> 1946년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부의장이 되었다.<ref name="강준만206"/>
* [[1946년]] [[3월 1일]] [[이승만]]과 함께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하였다.
* [[1946년]] [[6월]] [[일본]]에 사람을 파견하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 유골을 찾아,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였다.<ref name="sss" /> 한편 [[방응모]]등의 재정적 후원을 얻었다.{{출처|날짜=2009-04-14}}
*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수립을 발표하다. 그러나 이때 김구는 탈장증세로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54~255쪽.</ref>
*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결성식에 참석,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에 추대되었다.
*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ref name="역문1"/>
* [[1947년]]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ref name="sss" />
* [[1947년]] 1월 전국반탁학련 반탁 궐기대회 1주년을 기념하여 46년과 같은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대대적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만류와 [[존 하지]]의 경고로 보류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3쪽.</ref>
* [[1947년]]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인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에서 참석하여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ref>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146~147쪽.</ref>
* [[1947년]] [[1월 24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위원장 맡음.
*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김구는 '트루먼이 전 세계 자유애호 인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하자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다. 이때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0~61쪽</ref>
* [[1947년]] 12월 국사원에서 백범일지 출간.<ref name="sss" />
* [[1948년]]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 발표
*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 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여, 1948년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 [[1948년]] [[3월]] [[장덕수]] 암살사건의 증인 자격으로 [[미군정]]청 재판정에 출두하였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ref>
*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1881년)|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4김 회동'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1948년]] [[8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 장남 김인의 유골을 봉환하고, [[9월]] 이동녕·차이석 선생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 천장식을 하고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하다.<ref name="sss" />
* [[1949년]] [[1월]] [[서울특별시]]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움.
* [[1949년]] [[3월]]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원 세움.<ref name="sss" />
*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함.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됨. 향년 74세.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2009년]] [[6월 26일]] 소지품인 회중 시계, 유묵 작품 3점, 인장(印章) 3점 및 피살 당시 착용한 혈의(血衣)가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등록문화재]] 439호~442호로 등록
 
== 의혹과 논란 ==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ref>[http://www.hani.co.kr/h21/data/L990315/1p6k3f0b.html 김구, 안창호, 신채호…김일성!] 전국의 인문·사회계열 교수가 뽑은 ‘20세기 한국의 정신사에 영향을 낀친 인물 10인’, 한겨레21 1999년 03월 25일 제250호</ref>
=== 반(反) 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 ===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그가 쿠데타를 계획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김구는 [[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킬 쿠데타를 기도하였다는 의혹이 여러 번 제기되었다.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그가 극좌파와 손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여순1"/> 그리고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여순 사건]] 당시 극우 정객이 극좌파와 손을 잡고 정부 전복을 기도한다고 하여 그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ref name="여순2"/> 그러자 김구는 [[조선일보]]에 사설을 발표, 여순 사건에 극우 관련운은 이해난(이해하기 어렵다.)이다고 맞받아쳤다.<ref name="여순2"/> 그러나 이후에도 김구의 쿠데타 준비설은 계속 나타났다.
 
국군 내에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김구를 추대하려는 세력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 CIC는 김구가 정부 전복 쿠데타를 기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미국]]의 첩보기관 CIC의 보고에 의하면 [[1949년]] 그는 [[염동진]]과 손잡고 이승만 정부를 전복할 쿠데타를 기도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단국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지도자가 있었고 군대 편성 계획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현시킨 이는 김구 뿐"<ref name="동평1">[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09230051 백범 김구 탄생130주년… “나라가 혼란할때 필요한 지도자”] 동아일보 2006년 9월 23일자</ref> 이라며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ref name="동평1" /> [[중국]] 푸단(復旦)대 교수 쑨커즈(孫科志)는 "혼란스러웠던 중국에서 정치적 난민에 가까웠던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임시정부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갖춘 것은 김구의 면모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보았다.<ref name="동평1" />
 
그에 의하면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개입한 증거<ref name="dsa1">[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3898/1 김구 암살 관련 美 정보문건 전문] {{웨이백|url=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3898/1 |date=20131213065324 }} 동아일보 2001년 09월 04일자</ref>' 가 미군 방첩대에 입수되었다. 한편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염동진이 김구를 추종하는 우익 장교들의 내부 동향을 CIC 요원에게 제공하였다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ref name="yum11"/>
[[2006년]] [[9월 2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ref name="동평1" />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학자 12명은 김구에 대해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ref name="동평1" />
 
한편 [[대한민국]] 국군 창군 주역 중 제4연대 소속 장교들은 정부에 불만을 품고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세울 계획을 짜기도 한다. '제4연대 장교들의 참모회의 과정에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보다 군사적 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여러 차례 토로되었으며,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ref name="dsa1"/> 이에 따르면 이 정부는 김구의 파시스트형 정부에 합류할 북한군 내부의모든 친소장교들에 대하여 즉각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장교들과 경찰관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요원은 이승만 배후에 [[미국]]의 세력, 권력과 위신 때문에 비록 현재는 이승만 정부가 요구되지만, 이러한 유형의 정부는 결코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하거나, 한국이 재건하고 군사적 기반을 통하여 국가들 중의 국가가 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ref name="dsa1"/>'는 것이다.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한 지도자”라며 “청년시절부터 동학, 불교, 기독교에 차례대로 귀의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ref name="동평1" />”이라고 봤다. [[대학]][[교수]] [[리영희]]는 김구의 장례식때 울려 퍼진 추도곡을 반세기 넘게 기억하며 추모하기도 했다.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 형성 단계에 김구와 [[염동진]]이 같이 관여<ref name="yum11"/> 하였다. [[염동진]]과의 쿠데타 기도는 곧 미군 방첩대와 당시 [[대한민국]] [[국무총리|총리]]인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귀에도 들어가게 됐고, 염동진과 김구의 쿠데타 시도 관련 문건이 미국 방첩대에 전달되면서 그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기도 했다.
[[박용만 (1924년)|박용만]](1924)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ref>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년 중판) 35페이지</ref>
==== 외교력 ====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신용하]]는 “당시 장제스(蔣介石)를 설득해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한 것은 백범 외교의 진가”라고 평가하였다.<ref name="동평1" />
 
[[염동진]]은 김구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었다. 염동진은 [[대한민국 국군|한국군]] 내부에 존재하는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역할을 해왔다.<ref name="dsa1"/> 그런데 염동진이 국군내 자료를 김구에게 전달하고, 군내 불만세력과 김구의 사이를 연결 목적으로 작성한 서신이 미군정 방첩대로 빼돌려지기도 했다. 이 군대내 파벌은 고급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 내 CIC 사령부에 제출되는 보고서들은 비밀로 분류되었다. 한번은 제출되는 정보들을 보호하기위한 보안장치들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인 요원들을 매개로 해서 내 자신이 점검을 해본 일이 있었다.<ref name="dsa1"/> 한 건의 비밀보고서가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국군|한국경비대]](국군) 정보참모부(G-2)에 뿌려졌고 김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ref name="dsa1"/> 이후 이 문서는 미군정 방첩대 수중에 들어간다.
[[이승만]]을 통해 [[미국]]과도 외교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평가도 있다. [[단국대]] 교수 [[한시준]]도 “백범이 광복군의 연합군 OSS부대 참가를 주도한 것은 승전 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려 한 것”이라며 “이는 백범이 외교에서 상당한 전략을 구사했음을 보여 준다”고 평가하였다.<ref name="동평1" />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자 그는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을 [[미국]]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 후에 문서화된 보고서들이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구두 보고들이 한국주재 [[CIC]] 사령부 정탐과 책임장교와 전라남도 지구 CIC 사무소 광주 책임장교에게 이루어졌다.<ref name="dsa1"/> 그러나 한편으로 염동진이나 백의사는 광복 이후 백범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며<ref name="yum11"/>, “[[염동진]]이 김구씨에 대해서는 때때로 격렬한 비난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염동진은 때때로 김구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염동진의 김구에 대한 비판은 중국에서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정부 인사들에 대한 증오에 미치지는 않는다”는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당시 염동진은 적어도 [[이승만]] 정부측보다는 김구측을 더 선호하였던 것은 분명하다.<ref name="yum11"/>
==== 당대의 여론 ====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의 득표로 33%의 여운형, 21%의 이승만에 이어 3위에 기록되었다.<ref name="이정식226">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ref>
 
[[염동진]]은 김구-[[우익]]의 A급 정보를 미군 CIC에 전달하는 주요 정보원으로 등장한다. 그의 의도는 [[우익]]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미군]]은 그것을 반대로 활용하였다.<ref name="yum12">[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1/11/200501110500023/200501110500023_2.html “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 신동아] 2001년 10월 01일 (통권 505 호)</ref>
1945년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ref name="이정식226" />
 
한편 김구가 암살된 직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김구의 암살 배경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어느 고위층이 외국 언론에 김구의 쿠데타 미수 계획을 발설하였다.<ref name="riro275"/> 이 익명의 고위인사는 외신 기자들에게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밝혔고, 바로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ref name="riro275"/> 라고 보도한다.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ref name="이정식226" />
 
=== 안준생 암살 사주 ===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ref name="이정식226" />
[[1945년]] [[8월]] 귀국 직전 그는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을 암살하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중국 관헌에게 부탁하였으나 관원들이 실행치 않았다.<ref name="rlarflq408">{{서적 인용
|저자=김구
|제목=백범일지
|날짜=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경기도 파주
|id={{ISBN|89-7199-148-8}}
|쪽=408쪽}}</ref>'는 것이다.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ref name="rlarflq408"/> 고 부탁했고, 부탁의 사유로는 '안준생은 왜놈을 따라 본국에 돌아와 왜적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부친 의사의 죄를 사하고, 미나미 지로 총독을 애비라 칭하였다.<ref name="rlarflq408"/>'고 했다. [[안중근]] 사후 생계의 곤란을 겪던 [[안준생]]은 [[조선총독부]]에 사과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미나미를 아버지라 했다는 근거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그의 [[안준생]] 암살 부탁은 중국 관원으로부터 거절당했다.
 
=== 부정적안공근 평가암살 의혹 ===
{{참고|안공근 피살 사건}}
==== 백색 테러 ====
[[1939년]]에 실종, 암살된 [[안공근]]의 살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실제로 해방 뒤에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중에는 김구의 측근이었던 모 독립운동가가 안공근을 납치,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는 의혹이 널리 언급되었다.
[[2008년]] [[5월]] 출간된 비한국사 전공자로 구성된 [[뉴라이트]]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에서 그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여 물의를 빚었다. [[한양대학교|한양대]] 석좌교수 [[신용하]]는 김구 테러리즘 논란에 대해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를 주도한 한인애국단을 ‘테러리스트’로 평가하는 국내 일부 학자의 시각에 대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반박했다<ref name="동평1" /> [[신용하]]에 의하면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1930년대는 ‘완바오산 사건’으로 중국 내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됐고,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중국 각지를 점령하면서 중국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 신 교수는 “임시정부는 열세적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운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ref name="동평1" /> 7개월에 불과한 한인애국단 활동 기간 중 백범이 중국 국민당에서 독립군 장교 양성 지원 약속을 받아낸 것도 백범의 치밀한 지략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임시정부의 지시가 있었으므로 테러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특공작전’으로 봐야 한다<ref name="동평1" /> 고 평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민간인을 상대로 하여 사망 혹은 중상을 입히거나 인질로 잡는 등의 위해를 가하여 대중 혹은 어떤 집단의 사람 혹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어떤 사람, 대중, 정부, 국제 조직 등으로 하여금 특정 행위를 강요하거나 혹은 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침략기관, 일본의 침략행위에 참여한 군인이나 관료등을 상대로 진행된 항일운동을 테러로 보지 않는다. [[윤봉길]]과 [[이봉창]]등은 일본 천황, 일본 고위 군인등을 상대로 한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1932년]] 이후 김구는 그의 최측근 중 한사람이었던 [[안공근]]과 여러 번 마찰을 빚었는데, 그 뒤 [[안공근]]은 [[1939년]] [[5월 30일]] 상하이에서 실종, 피살되었다. [[안공근]]은 한때 김구의 측근이었으나 일본군이 점령한 난징에서 형수(안중근의 처)를 모셔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구로부터 심히 질책받았고, 임정의 자금 중 일부를 개인적으로 쓴 일과, 도박으로 자금을 탕진한 일이 있었다. [[안공근]]은 김구의 심한 질책을 받고 임정 이동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그밖에 [[안공근]]은 임정의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기도했다. 김구는 [[안공근]]에게 부여된 [[임시정부]] 및 [[한인애국단]]의 대외 연락업무를 [[박찬익 (1884년)|박찬익]]에게 맡겼다. 이후 안공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중 상하이의 한 부두에서 사라졌었다.
그러나 김구가 해방 이후 한국인 정치가들에 대해 대해 암살을 시도한 [[백색 테러]]를 저질렀다는 의혹 또한 존재한다. 김구는 소군정기 북한의 지도자 및 관료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며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 별다른 직위 없이 남한에서 정치 운동을 이끌던 사람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백의사가 북한의 관료였던 [[강량욱]]을 암살하고자 할 때 죄없는 아들, 딸, 친구 목사까지 죽게 만들었다.<ref>[http://news.joins.com/article/2693907 강양욱목사집 폭탄투척사건(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6)]</ref> 강량욱은 고위관료여서 민간인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희생당한 강량욱의 가족, 친구는 민간인이므로 강량욱의 집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은 백색테러라 볼 수 있다.
 
안공근은 의문의 실종을 당했고, 이후 김구의 최측근 인사인 모 독립지사의 후하들이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의혹<ref name="ah1">오영섭, 《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경인문화사, 2007) 302페이지</ref> 이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이에서 널리 언급되고 있다.<ref name="ah1"/>
==== 권위주의 ====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 김립 암살, 무고 의혹 ===
[[남조선로동당|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s268" /><ref>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계명사, 1998) 148쪽</ref> 당시 박갑동은 [[해방일보]] 기자 자격으로 [[경교장]], [[한국독립당]], [[한민당]], 수도경찰청 등에 출입하고 있었다.
{{본문|김립 암살 사건}}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 (1880년)|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 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ref name="han21515">[http://h21.hani.co.kr/section-021109000/2007/04/021109000200704120655080.html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 21 2007년04월12일 제655호</ref>
 
그는 [[백범일지]]에서 김립이 [[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로,'[[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ref name="rlarflq311">{{서적 인용
1948년 4월 방북시에도 숙소에서 여자 접대원들에게 "야!"라고 불렀더니 그들이 못들은 체 한 것이다. 김구가 화가 나서 "왜 부르는데 대답을 안하나?"라고 묻자 접대원들은 "저희는 그렇게 습관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답했다.<ref name="s268" /><ref name="nae1">한국정신문화연구원,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268페이지</ref>
|저자=김구
|제목=백범일지
|날짜=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경기도 파주
|id={{ISBN|89-7199-148-8}}
|쪽=311쪽}}</ref> 이른바 [[공산주의|공산주의자]]라는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ref name="rlarflq311"/> 그러고서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ref name="rlarflq311"/>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레닌이 준 자금을 김립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ref name="han21515"/> 는 반론도 있으며, 그가 중국 여자를 첩으로 삼고 향락을 즐겼는가 여부는 뜬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이 [[한형권]], [[김립 (1880년)|김립]] 등에게 준 자금은 [[한인사회당]] 내지는 [[사회주의]] 정당 건설의 공작금으로 지급된 자금이었다. 이들은 자금을 실제 활동비와 한국인 [[사회주의|사회주의자]]들에게만 분배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측에는 내놓지 않았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라는 위계서열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물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정연하게 배열돼야 했고 이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순종과 직분을 통해 조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추구했으며 그에게 좌파의 평등주의는 이 조화를 해치고자 하는 일시적 풍파일 뿐이었다.<ref name=":23">{{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8&aid=0000058600&sid1=001|제목=좌우구도 굳힌 반탁운동에 반공·반소로 일관한 김구|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겨레}}</ref>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한국학]] 교수 [[박노자]]에 의하면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 (1880년)|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다 한다.<ref name="han21515"/> 그러나 [[박노자]]는 [[한국외대]] [[반병률]]의 주장을 인용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 정치적 실패 ====
제1대 [[내무부 장관]]과 13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동산 [[윤치영]]은 그는 김구 단정 수립 반대를 호되게 비판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백범의 명분은 옳았지만 이것은 우리 가슴에 칼을 내지르는 소리요. 결과적으로는 백범 망신에 그치고 만 것이 다행이지, 만약 그때 남북합작(南北合作)을 한다고 덤볐다가는 나라가 망했을 것입니다."<ref name="kyu19720408">경향신문, 1972년 04월 08일자 4면, 사회면</ref>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ref name="kyu19720408" />
 
[[한국외국어대학교|한국외대]] [[반병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 (1880년)|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 (1880년)|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ref name="han21515"/> [[박노자]]는 이를 두고 '동족 테러'라고 비판했다.<ref name="han21515"/> 그에 의하면 자금 문제를 놓고 그 뒤에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족 테러' 가 빈번히 이용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장 독립운동의 비극적인 이면<ref name="han21515"/> 이라는 것이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김립 (1880년)|김립]]이 사치, 향락을 하고 광동인 첩을 사서 즐겼다고 하였으나, [[김립 (1880년)|김립]]이 축첩을 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윤치영]]은 또 김구 생전에 그가 임정의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YMCA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윤치영]]은 연단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평양 일방 남북회담을 적극추진하고 있는 김구를 지적, 중국으로부터 귀국 시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으니 그는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다 라며 성토하였다.<ref name="ReferenceA">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376</ref>
 
=== 동시대장덕수 인물들에암살 의한 평가의혹 ===
[[1947년]] [[12월]]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한독당]]을 용의자로 의심되었고, 그는 용의선상에 오르게 된다. [[허정]]은 장덕수 암살이 임정 짓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차마 김구 주석에게는 가서 따지지 못하고 소년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조소앙을 찾아가서 따졌다.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서 "왜 설산을 죽였소"라며 따졌다.<ref name="heos145"/> 구미위원부에 10년간 근무했던 허정은 한인애국단과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준비하는데 조소앙이 기여한 점을 근거로 조소앙을 찾아갔던 것이다. 허정은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 허정은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ref name="heos145">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샘터사, 1979) 145페이지</ref>"라고 외치고는 뛰쳐나왔다.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자신의 회고록 《우둥불》에서 우남과 백범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우남 이승만 박사는 반조각 이나마 자유민주국가를 만들어 놓은 공이 있다. 이에대해 끝까지 대의명분론을 주장하면서 민족통일을 관철하고자 오직 소신대로 나간 분은 백범 김구 선생이다. 그런 까닭에 이 박사는 마침내 현실의 정치가로 일어섰고, 백범 선생은 이상의 정치가로 주저앉게 됐다."<ref>{{웹 인용|url=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00511.22002214749|제목=[어제와 오늘]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 별세(1972. 5. 11)|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국제신문|확인날짜=}}</ref>
 
[[장덕수]]가 암살되자 [[장택상]](당시 수도경찰청장 겸 경기도경찰청장)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ref name="changback"/>'고 했다.
[[미국]]에서는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미국]]은 그를 [[파시스트]]<ref>[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3898/1 김구 암살 관련 美 정보문건 전문] {{웨이백|url=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3898/1|date=20131213065324}} 동아일보</ref> 로 보고 있었다. [[미군정]]은 무자비하고(ruthless), 파렴치한(unscrupulous<ref name="비평11">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1948~1950 민주주의·민족주의 그리고 반공주의》 (역사비평사,1996) 249페이지</ref>)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미국]]은 그를 기회주의자(opportunist)로도 묘사하였다.<ref name="비평11" />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 장택상에 의하면 '그리고 이 사건을 군정 재판에 넘기고 말아서 우리(군정청 경찰)는 끝내 손을 못 대고 말았다. 평소 모든 사건을 매서웁게 처리하는 나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하지 중장은 혹 김구 씨에게 무슨 화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이와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ref name="changback"/>'라고 했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정치학자)|이인수]]는 [[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앙했으며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column/2008/01/21/2701010000AKR20080118092500917.HTML <연합초대석> 이승만 초대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 {{웨이백|url=http://www.yonhapnews.co.kr/column/2008/01/21/2701010000AKR20080118092500917.HTML#|date=20080329125348}}.</ref>
 
결국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임정과 [[한독당]], [[민주의원]]에 모두 간부로 몸담던 [[김석황]], [[조상항]]이 체포되면서 김구까지 법정에 서게 되었다.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ref>[http://weekly.hankooki.com/lpage/column/200801/wk2008012604115737660.htm 주간한국 : 팔순 맞은 YS는 좌파의 숙주인가<!-- 봇이 따온 제목 -->]</ref>
 
=== 논란과만주 폭격 계획 의혹 ===
해방 직후 그는 [[만주]] 폭격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는 김구와 [[염동진]]은 [[만주]] 지역의 폭격을 계획한 '''만주계획'''을 세웠다 한다.<ref name="min1">{{웹 인용 |url=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824#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1-01-27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402111826/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824# |보존날짜=2015-04-02 |url-status=dead }}</ref> 만주 폭격 계획은 [[1947년]] 말 ~ [[1948년]] 초에 여러 차례 김구가 강조한 만주에서의 군사계획이었다. 이때 김구, [[이청천]], [[이범석]]<ref name="min1"/> 등은 북한을 폭격할 계획을 세운다.
 
김구 등은 '중국 국민당 지역에서 활동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북을 무력공격할 뿐만 아니라 중국 내전에서 [[장졔스]]의 중국 군대와 동맹해 한·중의 공산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상은 종국적으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격멸한다.<ref name="min1"/>'는 것이었다. 즉 남·북·만주가 포함된 이 계획은 한국·중국·미국의 동아시아 삼각 반공 군사 동맹 체제의 수립<ref name="min1"/>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면서 조직원들이 떨어져나가면서 타격을 받았고, 인력과 장비의 부족 등의 다양한 원인으로 이후 김구의 암살로 만주 폭격 계획은 실패, 백지화된다.
=== 치하포 사건, 민간인 살해 여부 논란 ===
[[1896년]] [[3월 9일]] 김구는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했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ref name="baik01" />, 계속 민간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당시 [[일본]]의 기록이나 조선의 기록에서도 쓰치다 조스케가 군인이라는 내용은 없다. [[199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 이었다고 주장했다.<ref name="kyunghang01">경향신문 1997년 8월 13일자, 19면</ref>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부분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ref name=":3">{{웹 인용|url=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nNewsNumb=20151018651&nidx=18652|제목=원로 언론인 손세일, 필생의 작업 《이승만과 김구》(全 7권) 완간|날짜=2015-10-30|언어=ko|확인날짜=2020-09-07}}</ref>
 
=== 김성수 암살 기도 의혹 ===
[[2003년]] [[11월]] 말 [[김완섭]]은 [[서울특별시|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서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 하였다. 또한 그는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내용의 인쇄물도 배부하였다. 문건을 받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즉석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는 이를 근거로 [[검찰]]에 들고가 그를 고소했다.<ref name="kimk1">[http://news.donga.com/3/all/20040727/8088232/1 ‘김구선생 명예훼손’ 작가 김완섭씨 기소] 동아일보 2004년 7월 27일자</ref>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 의혹 외에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ref name="ReferenceB">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6) 532</ref>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 (1891년)|김성수]]의 암살을 기도<ref name="seo535">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535</ref>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1891년)|김성수]] 암살 기도<ref name="seo535"/>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2004년]] [[7월]]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남도|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밝혔다.<ref name="kimk1" /> 이어 그는 서울고검으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서울고검 정현태(鄭現太) 검사는 [[7월 27일]] 그를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소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작가 김완섭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언론에 밝혔다.<ref name="kimk1" /> 또한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서울고검의 [[검사]] 정현태는 김완섭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밝혔다.<ref name="무고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EVEC 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주석 - 오마이뉴스]</ref>
 
[[김성수 (1891년)|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
=== 김립 암살, 무고 의혹 ===
{{본문|김립 암살 사건}}
[[1922년]] [[2월 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김립 (1880년)|김립]]을 암살했다.<ref name=":1" />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김립 (1880년)|김립]]이 [[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로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 이른바 [[공산주의|공산주의자]]라는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 그러고서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rlarflq311">{{서적 인용|제목=백범일지|저자=김구|이름=|날짜=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판=|출판사=돌베개|쪽=311|장=|출판위치=경기도 파주|ISBN=89-7199-148-8}}</ref>
 
=== 이승만 암살 기도 의혹 ===
[[박노자]]는 이 사건에 대해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반병률]]은 [[김립 (1880년)|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김립 (1880년)|김립]]이 축첩을 했다는 김구의 주장에도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ref name=":1" />
[[장덕수]] 사건 이후 사이가 틀어진 김구는 [[이승만]]의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안두희]] 공판기에 의하면 [[김학규]]는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며 [[김학규 (1900년)|김학규]]와 만나기 전부터 홍종만을 통하여 한독당에 입당할 것을 이야기하여 3, 4월경에 입당 절차를 밟았으며, 비서를 통하여 당원증을 내주게 했다고 하며 안두희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일은 없다고 한다. 김학규는 안두희와 만났을 적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평을 말하였으며, 때때로는 듣기에도 위험한 이야기까지 하고, 또 김구 자신의 증명서까지 얻어달라고 말하여 왔다며 김학규는 그 후로 홍종만을 통해 찾아주지 말기를 요구하며 김구의 암살 약 1달 전부터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김학규]]는 [[한국독립당]]에서 비밀당원증이란 것이 없다고 했다.<ref>[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4t04 안두희 공판기]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ref>
 
그런데 진술과는 달리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되던 날 [[김학규 (1900년)|김학규]]는 [[경교장]]에 모인 한 측근에게 혈서를 하나 보여주었다.
=== 민주당 3당수 암살 또는 암살미수 배후 의혹 ===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암살 당시 [[미군정]]은 김구를 암살의 배후로 봤다.<ref name="songam1" /> 그러나 [[1946년]] [[4월 9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을 체포하였는데, 이날 경찰은 [[한현우]]가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돕고 있던 자인데 그의 지휘하에 유근배, 김의현이 권총을 발사하여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암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ref name=":13" /><ref name=":14" />
 
사건 직후 [[경교장]]에서 보좌진을 부른 [[김학규 (1900년)|김학규]]는 자신이 소지하던 손수건 두 장 크기의 하얀 천을 한장 보였다. 천에는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혈서가 쓰여 있었다.<ref name="ahnui">동아일보 1992.04.15, 6면 정치면</ref> 보좌진들이 누가 쓴 것이냐 라고 붇자 [[김학규 (1900년)|김학규]]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 앞에서 쓴 것"이라며 믿었던 [[안두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분해하며 부르르 떨었다.<ref name="ahnui"/>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암살 당하자 [[미군정]]은 김구를 암살의 배후로 봤다. 수도경찰청장 겸 경기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 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고 했다.<ref name="changback">장택상,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창랑장택상 기념사업회, 1993) 73페이지</ref>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 장택상에 의하면 '그리고 이 사건을 군정 재판에 넘기고 말아서 우리(군정청 경찰)는 끝내 손을 못 대고 말았다. 평소 모든 사건을 매서웁게 처리하는 나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하지 중장은 혹 김구 씨에게 무슨 화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이와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라고 했다.<ref name="changback" /> [[허정]]은 장덕수 암살이 임정의 소행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차마 김구 주석에게는 가서 따지지 못하고 소년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조소앙을 찾아가서 따졌다.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서 "왜 설산을 죽였소"라며 따졌다. 구미위원부에 10년간 근무했던 허정은 한인애국단과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준비하는데 조소앙이 기여한 점을 근거로 조소앙을 찾아갔던 것이다. 허정은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 허정은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라고 외치고는 뛰쳐나왔다.<ref name="heos145">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샘터사, 1979) 145페이지</ref>
 
이 사건 직후 [[김학규 (1900년)|김학규]]는 [[안두희]]의 혈서를 그대로 불에 태웠다.<ref name="ahnui"/> 그러나 [[김학규 (1900년)|김학규]]가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정보는 이미 유출된 뒤였다.
[[1947년]] [[11월 28일]] 호남선 열차에서 친일파 출신 국회의원 [[김성수 (언론인)|김성수]]가 암살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ref name=":19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23_0020|제목=경무부장 조병옥, 우익요인 암살미수사건의 진상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은 김구를 암살미수의 배후로 봤다.<ref name="ReferenceB">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6) 532</ref><ref name="seo535">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535</ref> 그러나 [[1947년]] [[12월 23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조선해양청년단(朝鮮海洋靑年團) 소속의 백영기(白英基), 문균석(文均錫) 등이 [[여운형 피살 사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와 [[조병옥]]을 노렸던 거라고 밝혔다.<ref name=":192" /> [[김성수 (언론인)|김성수]]가 [[한국민주당|한민당]]과 [[한국독립당|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는데도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민주당|한민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국민주당|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ref name="ReferenceB" /><ref name="seo535" />
 
=== 흑함운동민간인 배후살해 의혹논란 ===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ref name="baik01"/>, 계속 민간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당시 [[일본]]의 기록이나 조선의 기록에서도 쓰치다 조스케가 군인이라는 내용은 없다.
[[1946년]] [[11월 3일]]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과 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ref name="sunbb">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한국민족운동과 민족문제》(국학자료원, 1999) 466페이지</ref>
 
[[2003년]] [[11월]] 말 [[김완섭]]은 [[서울특별시|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서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ref name="kimk1">[http://news.donga.com/3/all/20040727/8088232/1 ‘김구선생 명예훼손’ 작가 김완섭씨 기소] 동아일보 2004년 7월 27일자</ref> 하였다. 또한 그는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ref name="무고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EVEC 뉴라이트와 현 정부에 조롱당하는 김구 주석 - 오마이뉴스]</ref> 는 내용의 인쇄물도 배부하였다. 문건을 받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즉석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는 이를 근거로 [[검찰]]에 들고가 그를 고소했다.
=== 남북협상 참여 논란 ===
김구의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 참여가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한 행동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이 북한에게 '합법 정부'를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실제로 북한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을 근거로 1948년 5월 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였다.<ref name=":22" />
 
[[2004년]] [[7월]]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남도|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밝혔다.<ref name="kimk1"/> 이어 그는 서울고검으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서울고검 정현태(鄭現太) 검사는 [[7월 27일]] 그를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소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작가 김완섭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언론에 밝혔다.<ref name="kimk1"/> 또한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서울고검의 [[검사]] 정현태는 김완섭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ref name="무고1"/> 고 밝혔다.
또한 김구의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 참여가 순수하지 않은 정치적 전술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 시점에서 새로운 정국 반전을 노린 것이라는 것이다.<ref name=":23" />
 
그러나 [[199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ref name="kyunghang01"/> 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부분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ref name="sonseil01"/>
== 사상과 신념 ==
=== 민족주의 ===
김구는 민족의 적을 북한인민이 아닌 북한군, 노동당, 북한정권이라고 봤다. 그래서 북한수뇌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백의사]] 등을 통해 [[김일성]]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김일성]]과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을 갖기도 했다.
 
=== 반공산주의이승만과의 결별 과정 ===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1주일 후인 [[11월 30일]]에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날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해 한 시간 정도 요담한 후,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ref name="sa86"/>
그는 [[공산주의]]를 일종의 독재체제로 이해하였다. 김구는 《백범일지》 상·하편 뒤에 붙은 〈나의 소원(1947)〉 제2장 '정치 이념' 에서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하며 자신의 반공주의 사상을 강조하였다.<ref name=":10">{{웹 인용|url=https://news.joins.com/article/22619151|제목=[문소영의 컬처 스토리] 김구 ‘나의 소원’에는 ‘자유’가 33번 나온다|성=|이름=|날짜=2018-05-14|웹사이트=|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20-09-06}}</ref>
 
그러나 [[12월 2일]]에 일어난 [[장덕수 암살 사건]]은 두 사람의 협력관계를 끝장내는 동시에 파국으로 끌고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구는 자신이 배후로 의심받자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승만]]은 “김 주석(김구)가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는 등 딴전을 피웠다.<ref name="sa86"/> 이승만은 자신을 재판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는 김구의 도움 요청을 회피하고 수수방관하였다.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중략)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평소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 했을 만큼<ref name="강준만 67" /> 그와 친밀하였다. 그러나 [[장덕수 사건]]을 계기로 양자의 관계는 악화되고 파국에 이른다. 이승만은 김구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였다. 분노한 김구는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했다.<ref name="sa86"/> 김구가 단정론의 철회와 남북협상론을 들고 나온 것도 바로 그런 인간관계의 파탄 직후였다.<ref name="sa86"/> 이승만과 김구의 결별 과정에는 어느정도 인간적인 감정도 작용하였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 도덕성 논란 ===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통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로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ref name=":23" />
김구의 정치적 도덕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리처드 로빈슨]]은 김구가 정치적 도덕가는 아니라고 평하였다.<ref name="riro275"/> 미군정 외에도 브루스 커밍스는 김구가 송진우의 암살범이라고 지목했다. 한편 김성수의 암살을 공작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었다.
 
=== 자유주의주애보와의 관계 ===
김구는 [[이봉창]] 의거와 홍구공원 사건을 계기로 피신해 있었다. 이 피신기간 중 중국 국민당 관계자가 소개시킨 미혼의 뱃사공 주아이바오(주애보)와 부부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주아이바오와의 사이에서 자녀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1947)〉 제2장 '정치 이념' 에서 김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ref name=":10" />
 
== 평가와 비판 ==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 당대의 여론 ===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의 득표로 33%의 여운형, 21%의 이승만에 이어 3위에 기록되었다.<ref name="이정식226">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ref> 그 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ref name="이정식226"/>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ref name="이정식226"/>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 한다.<ref name="이정식226"/>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ref name="이정식226"/>
 
=== 애국가에미국의 대한 관점시각 ===
[[미국]]에서는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미국]]은 그를 [[파시스트]]<ref>[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3898/1 김구 암살 관련 美 정보문건 전문] {{웨이백|url=http://news.donga.com/3/all/20010904/7733898/1 |date=20131213065324 }} 동아일보</ref> 로 보고 있었다.
애국가가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는 소문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미군정]]은 무자비하고(ruthless), 파렴치한(unscrupulous<ref name="비평11">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1948~1950 민주주의·민족주의 그리고 반공주의》 (역사비평사,1996) 249페이지</ref>)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미국]]은 그를 '''기회주의자'''(opportunist)로도 묘사하였다.<ref name="비평11"/>
이에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ref name="aegukga">[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6&key=200604071715441914&q=%C0%B1%C4%A1%C8%A3 "애국가 수정·교체 주장은 부당"]{{깨진 링크|url=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6&key=200604071715441914&q=%C0%B1%C4%A1%C8%A3}} YTN 2006년 04월 7일자</ref>'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ref name="aegukga" />'고 반박하였다.
 
[[미군정]]은 [[1945년]]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암살 당시 그를 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고<ref name="songam1"/>, 미군정 외에도 미국에서는 그를 송진우의 암살 용의자로 봤다.<ref name="커밍스1"/> [[1947년]] [[12월 8일]] [[장덕수]]가 암살당했을 때 현장에서 검거된 박광옥과 배희범은 각각 현직 군정청 경찰관과 현직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한국독립당|한독당]]의 당원이기도 했다.
== 기타 일화 ==
[[1947년]] [[백야 김좌진]]의 추모회에 참석한 김구는 김좌진의 추도사를 했다.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ref name=":0">[[도진순]] 《백범어록》 돌베개 2007년 11월 12일 {{ISBN|978-89-7199-294-4}}</ref>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의 보고서는 [[염동진]]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다.<ref name="dsa1"/>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했다.<ref name="dsa1"/>
=== 김구의 '구(九)'와 호 '백범(白凡)'의 유례 ===
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 평가 ===
[[1912년]]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ref name="위클리조선" />
[[일제 강점기]] 당시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성사시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것을 높이 평가된다. 김구는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다.<ref>[http://www.naeil.com/News/economy/ViewNews.asp?nnum=369663&sid=E&tid=8 선진문화를 이끄는 힘 ‘장비의 발전]{{깨진 링크|url=http://www.naeil.com/News/economy/ViewNews.asp?nnum=369663&sid=E&tid=8 }}.</ref> 그러나 이는 반탁투쟁과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한 뒤에, 뒤늦은 행동이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ref>[http://www.hani.co.kr/h21/data/L990315/1p6k3f0b.html 김구, 안창호, 신채호…김일성!] 전국의 인문·사회계열 교수가 뽑은 ‘20세기 한국의 정신사에 영향을 낀친 인물 10인’, 한겨레21 1999년 03월 25일 제250호</ref>
[[1946년]] 초 [[김일성]]을 살해하려 할 만큼 극단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57쪽</ref><ref>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II:기원과 원인》(나남, 1996) 149쪽</ref> 지나치게 고평가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단국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지도자가 있었고 군대 편성 계획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현시킨 이는 김구 뿐"<ref name="동평1">[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09230051 백범 김구 탄생130주년… “나라가 혼란할때 필요한 지도자”] 동아일보 2006년 9월 23일자</ref> 이라며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ref name="동평1"/> [[중국]] 푸단(復旦)대 교수 쑨커즈(孫科志)는 "혼란스러웠던 중국에서 정치적 난민에 가까웠던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임시정부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갖춘 것은 김구의 면모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보았다.<ref name="동평1"/>
=== 이승만과 김구 ===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다.
 
[[2006년]] [[9월 2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ref name="동평1"/>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학자 12명은 김구에 대해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ref name="동평1"/>
[[이승만]]과 김구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던 중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김구는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 28세 때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한 지도자”라며 “청년시절부터 동학, 불교, 기독교에 차례대로 귀의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ref name="동평1"/>”이라고 봤다. [[대학]][[교수]] [[리영희]]는 김구의 장례식때 울려 퍼진 추도곡을 반세기 넘게 기억하며 추모하기도 했다.
[[이승만]]과 김구 모두 [[우익|우파]]였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화민국]](대만) 노선으로 갔다.<ref name="autogenerated12">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71쪽</ref>
 
[[박용만 (1924년)|박용만]]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ref>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년 중판) 35페이지</ref>
[[이승만]]과 김구는 [[1920년]] 12월경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임시 대통령과 경무국장의 관계로 첫 대면을 하였으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서른여섯 살 때인 1912년부터 투옥 시절 '감옥 선배' 이승만을 흠모했다고 고백하였다. "서대문 감옥에는 역대의 진귀한 보물이 있다. 지난날 이승만 박사가 자기 동지들과 투옥되었을 때에 서양인 친구들과 연락하여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진귀한 서적을 구입하여 5~6년 동안 (중략) 강연했다. 그 가운데 이 박사의 수택(手澤·손때)과 누흔(淚痕·눈물 자국)이 얼룩진 책자를 볼 때 배알치 못한 이 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無限)의 느낌이 있었다."<ref name=":02">{{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3&aid=0003436849&sid1=001|제목=1920년 12월, 상하이로 건너간 이승만… 김구를 처음 만나다|언어=ko|확인날짜=2020-09-10}}</ref>
 
=== 비판 ===
[[이승만]]과 김구는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 한편 김구도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하며,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ref>{{웹 인용|url=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9/06/02/1999060270385.html|제목=[경마 이야기] 김구-이승만 이후 정치인 발길 끊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조선일보|확인날짜=}}</ref>
[[전북대학교|전북대]] 교수 [[강준만]]과 [[창원대학교|창원대]] 교수 [[도진순]]은 각각 김구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약하였으며, 유학·동학·불교·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하긴 했지만 전통적 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ref name="s268">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68쪽</ref><ref>도진순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도진순, 당대, 2001) 262~263쪽</ref> 또, [[강준만]]은 그가 무분별한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1945년]]의 4개월 동안 해방 국면에서의 [[반공주의]]는 [[한국]]의 대중들에게 아직 깊이 침투되지 못하였다. 동아일보의 오보에서 비롯된<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6&aid=0000095346
|제목=한반도 역사를 바꾼 동아일보의 가짜뉴스
|출판사 =중앙일보
|날짜=2019.02.05}}</ref>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결과적으로 해방공간에서 사회 흐름을 바꾸게 만들었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은 모든 반대세력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라는 예기치 않은 정당성을 얹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35쪽</ref>
 
[[최상천]]은 김구가 점령국가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대책없이 반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허송세월을 했다고 비판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8쪽</ref>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지은 [[이영훈 (경제학자)|이영훈]]은 “김구는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겼지만 ‘민족’만 주창했을 뿐 건국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고 하면서 그가 건국에 반대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3260084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책임편집 이영훈 교수 인터뷰].</ref>
[[이승만]]과 김구는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김구의 말년에 발생한 [[장덕수 피살 사건]] 때문에 이승만과 김구가 결별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948년]] [[3월 8일]] 김구가 [[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정에 출석하자,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ref name=":30" />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정치학자)|이인수]]는 [[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앙했으며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column/2008/01/21/2701010000AKR20080118092500917.HTML <연합초대석> 이승만 초대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 {{웨이백|url=http://www.yonhapnews.co.kr/column/2008/01/21/2701010000AKR20080118092500917.HTML# |date=20080329125348 }}.</ref>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ref>[http://weekly.hankooki.com/lpage/column/200801/wk2008012604115737660.htm 주간한국 : 팔순 맞은 YS는 좌파의 숙주인가<!-- 봇이 따온 제목 -->]</ref> 한편 [[5·10 선거]]를 반대하던 [[4·3 항쟁]]에 침묵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출처|날짜=2010-06-09}}
[[윤경빈]]에 의하면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이승만과 김구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ref name=":29">KBS 1TV <<한국사 傳>> -이승만(2부)편-, 김구의 비서를 지냈던 윤경빈의 증언</ref> 이 갈등조차 [[1949년]] [[5월 19일]] 이승만과 김구의 회동을 거치며 봉합되고 있었다.<ref name=":25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2_1949_05_19_0190|제목=李承晩 대통령과 金九, 덕수궁에서 회동|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9년]] [[5월 20일]]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국민들이 3영수의 재합작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현 시국에 비추어 있음직한 일이나 본래부터 대통령과 김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므로... (중략) 과거 우리들의 노력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중략) 대통령과 金박사와는 앞으로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ref name=":26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2_1949_05_20_0030|제목=金九, 李承晩·金奎植과의 3영수합작으로 민족단결이 시급하다고 발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그러나 한 달 후인 [[1946년]] [[6월 26일]] 김구의 피살로 인해 화해의 결실을 맺진 못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이른바 ‘반탁 쿠데타’까지 나아갔다. 반탁투쟁은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ref name="bankong1">[http://www.hani.co.kr/section-001065000/2004/05/001065000200405101843248.html 좌우구도 굳힌 반탁운동에 반공·반소로 일관한 김구] 한겨레 2004.05.10</ref> 는 비판도 있다.
=== 옥관빈 피살 사건 ===
[[파일:옥관빈.JPG|썸네일|왼쪽|120px|[[옥관빈]]]][[1933년]] [[8월 1일]] [[옥관빈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윤봉길 의거]] 이후 [[친일파]]로 변절한 자들에 대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김구파와 무정부주의파의 숙청 작업 중 하나였다. 그러나 김구파와 무정부주의파가 친일파 숙청 작업을 핑계로 서북파에 대한 테러를 병행했고 옥관빈이 그 희생자라는 의견도 있다. 2020년 현재까지 [[옥관빈]]이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한편 김구가 [[옥관빈]]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도 없다.
 
[[강준만]]은 '김구가 50대까지 어머니로부터 '사랑의 매'를 맞았다는 건 미담(美談)일 수도 있지만, 그걸 뒤집으면 그만큼 고전적인 인물이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ref name="kang268">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268페이지</ref>'고 보았다.
[[1911년]] [[10월 18일]]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 (1864년)|이승훈]]·[[임치정]]·[[유동열]] 등과 함께 [[105인 사건]] 관련자에 포함되어 재판을 받았고 이날 [[옥관빈]]은 7년형을 선고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1_1911_10_18_0290|제목=新民會 事件으로 기소된 122인에 대한 재판에서 塚原재판장은 105인에 대하여 保安法과總督謀殺未遂罪를 적용 다음과 같이 언도하였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17년]] [[11월 24일]] 옥관빈은 최종 석방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3_1917_11_24_0250|제목=新民會事件으로 복역 중이던 尹致昊梁起鐸安泰國李昇薰林蚩正玉觀彬이 4년 7개월 15일로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테러리즘 논란 ====
이후 옥관빈은 [[상해 임시 정부]]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관여했지만 깊이 발 담그지는 않았고, [[안창호]] 계열과 결을 같이 했지만 [[흥사단]]에 깊이 발 담그지는 않았다. 옥관빈은 [[상해대한교민단]]을 위주로 활동을 하였다.
[[2008년]] [[5월]] 출간된 비한국사 전공자로 구성된 [[뉴라이트]]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에서 그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여 물의를 빚었다.
 
[[한양대학교|한양대]] 석좌교수 [[신용하]]는 김구 테러리즘 논란에 대해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를 주도한 한인애국단을 ‘테러리스트’로 평가하는 국내 일부 학자의 시각에 대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반박했다<ref name="동평1"/> [[신용하]]에 의하면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1930년대는 ‘완바오산 사건’으로 중국 내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됐고,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중국 각지를 점령하면서 중국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 신 교수는 “임시정부는 열세적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운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ref name="동평1"/> 7개월에 불과한 한인애국단 활동 기간 중 백범이 중국 국민당에서 독립군 장교 양성 지원 약속을 받아낸 것도 백범의 치밀한 지략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임시정부의 지시가 있었으므로 테러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특공작전’으로 봐야 한다<ref name="동평1"/> 고 평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민간인을 상대로 하여 사망 혹은 중상을 입히거나 인질로 잡는 등의 위해를 가하여 대중 혹은 어떤 집단의 사람 혹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어떤 사람, 대중, 정부, 국제 조직 등으로 하여금 특정 행위를 강요하거나 혹은 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침략기관, 일본의 침략행위에 참여한 군인이나 관료등을 상대로 진행된 항일운동을 테러로 보지 않는다. [[윤봉길]]과 [[이봉창]]등은 일본 천황, 일본 고위 군인등을 상대로 한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1922년]] [[6월 19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내 창조파, 개조파, 임정유지파 간의 계파 갈등이 극심할 때, [[대한청년대회]]에게 '잠시 혁명단체가 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위기를 구할 것'을 요구하면서 구체적으로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 의원을 전부 사직시킬 것', '각지에 통고하여 의원과 명사를 (새로) 선출하여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을 완전 충실케 할 것', '헌법제도를 수정하여 시의에 맞게 할 것', '대통령의 임기를 정하고 개선할 것'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개조를 건의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su_006_1922_06_19_0610|제목=上海에서 玉觀彬이 大韓靑年大會에 大略 다음과 같은 內容의 建議書를 提出하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러한 [[옥관빈]]의 임정개조파적 입장은 임정유지파인 김구파와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해방 이후 한국인 정치가들에 대해 대해 암살을 시도한 [[백색 테러]]를 저질렀다는 의혹 또한 존재한다. 김구는 소군정기 북한의 지도자 및 관료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며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 별다른 직위 없이 남한에서 정치 운동을 이끌던 사람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백의사가 북한의 관료였던 [[강량욱]]을 암살하고자 할 때 죄없는 아들, 딸, 친구 목사까지 죽게 만들었다.<ref>[http://news.joins.com/article/2693907 강양욱목사집 폭탄투척사건(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6)]</ref> 강량욱은 고위관료여서 민간인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희생당한 강량욱의 가족, 친구는 민간인이므로 강량욱의 집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은 백색테러라 볼 수 있다.
[[1929년]] [[4월 20일]] [[옥관빈]]은 조상섭(趙尙燮)·전용덕(田龍德)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던 30여명과 함께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 근처에서 모여 한국상인의 친목도모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자금조달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하여 상해고려상업회의소(上海高麗商業會議所)를 조직하였다.<ref>{{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393|제목=상해고려상업회의소(上海高麗商業會議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그러자 [[1929년]] [[7월 25일]]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재중국한인청년동맹(在中國韓人靑年同盟)은 '상해고려상업회의소는 조선 경제를 착취하는 일본인의 어용적인 기관이자 일본인-조선인 융화기관으로 조직된 것'이라며 [[옥관빈]] 측에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또한 [[상해대한교민단]]이 [[6·10 만세운동]] 기념식 거행을 부결시킨 일도 비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92_0010_00150|제목=대한민국 11년(1929) 주요사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렇게 당시 [[옥관빈]]은 무정부주의파 내지는 공산주의파와 대립하였다.
 
그 외에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는 그를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암살배후로 봤다.<ref name="커밍스1"/> 또한 커밍스는 김구는 테러리스트와 암살문제에 정통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ref>브루스커밍스,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上』 (靑史, 1986) 161쪽</ref> 고 평하기도 했다. 38선 이북 조선에서는 [[1946년]] [[3·1절]] 기념식 때의 폭탄투척 사건 이후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상해대한교민단]]은 1920년대 후반에 들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와 마찬가지로 약화되었다. 그러다가 [[1929년]] [[8월 29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재무부장 김구가 교민단장이 되면서 세력이 일시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러나 김구는 [[이봉창 의거]] 등을 위해 [[1932년]] [[1월 11일]] 교민단을 독립운동기관으로서 개편, 민단장직을 내려 놓고 의경대장직을 맡았다. 김구가 교민단을 자치단체가 아닌 독립운동기관으로 활용하자 비난하는 교민들이 있었다.<ref name=":02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1_0010_00730|제목=73) 大韓僑民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만약에 [[옥관빈]]이 친일파로 변절했다면 그 시기는 이 때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군정의 보고서<ref name="ReferenceB"/>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 (1891년)|김성수]]의 암살을 기도<ref name="seo535"/> 해왔다 한다.
[[1933년]] [[8월 1일]] [[옥관빈]]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내리는 즉시 양여주(楊汝舟, 본명 [[오면직]] 吳冕植), 엄순봉(嚴舜奉, 일명 엄형순)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산하 [[흑색공포단]] 소속이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pda_1933_08_03_w0002_0390|제목=上海 法界에서 玉觀彬被殺, 친척의 집을 방문하려든 중 數名靑年이 突然狙擊[肖]|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 name=":33">{{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1000|제목=100. 최근 불령선인의 흉폭 행위 개요|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권위주의적인 행동 ====
[[1933년]] [[8월 9일]] 사건의 진상이 오리무중인 가운데 '○○除奸團(제간단)'이라는 이름으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단체는 [[옥관빈]]에게 6개조의 죄목이 있다면서 '[[옥관빈]]이 [[중국 국민당]]과 상해시민연합회의 요직을 맡으면서 중국의 군사정치정참을 하였다'고 주장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pda_1933_08_15_x0002_0820|제목=玉觀彬暗殺은 思想團所爲? 「○○除奸團 罪狀宣布로」 中國側에 一大衝動(上海)//玉觀彬氏屍體 平壤에 安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남조선로동당|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kang268"/><ref>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계명사, 1998) 148쪽</ref> 당시 박갑동은 [[해방일보]] 기자 자격으로 [[경교장]], [[한국독립당]], [[한민당]], 수도경찰청 등에 출입하고 있었다.
피살 당시 [[옥관빈]]은 독일화학약품(獨逸化學藥品)의 동양전매특허를 맡아 삼덕양행(三德洋行)을 경영하여 100여 만원의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종종 [[옥관빈]]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였는데, [[옥관빈]]은 "너희만 일하겠느냐, 나도 돈 버는 목적이 있다"하고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 언론은 [[옥관빈]]의 이러한 태도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원한을 사서 암살을 당한 것으로 보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ma_016_0370_0170|제목=玉觀彬氏의 豪語|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33년]] [[10월 2일]] [[조선총독부]] 상해 주재 사무관 나카노 가즈치(中野勝次)는 이 사건을 '반일파 대 친일파'가 아닌 '김구파 대 비김구파'로 보았다.<ref name=":03">{{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0900|제목=90. 金九 일파의 愛國團 대 獨立黨의 알력 상황에 관한 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반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은 [[옥관빈]]을 [[친일파]]로 보았고, 석현구를 일본측 밀정으로 보았다.<ref name=":33" />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ad_196_0380|제목=玉觀彬의 暗殺犯人에 관한 件 1|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4월 방북시에도<ref name="kang268"/><ref name="nae1">한국정신문화연구원,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268페이지</ref> 숙소에서 여자 접대원들에게 "야!"라고 불렀더니 그들이 못들은 체 한 것이다. 김구가 화가 나서 "왜 부르는데 대답을 안하나?"라고 묻자 접대원들은 "저희는 그렇게 습관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답했다.<ref name="kang268"/><ref name="nae1"/>
[[옥관빈 피살 사건]]을 김구가 직접 지시했는지는 불확실하다. [[1933년]] [[9월 20일]] [[김규식]]은 이용직, 한길수에게 다음 내용이 포함된 서신을 보냈다. "상해에서는 [[옥관빈]]과 유주발([[유인발]]) 등 악한들을 모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인 김구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비록 김구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이 일을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43_0030_01640|제목=164. 김규식 외무장이 리한에게 보낸 서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36년]] [[3월 23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 피살 사건]]이 [[오면직]]과 엄순봉이 [[안공근]], [[안경근]] 등과 협력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경성지부법원 검사정에 보고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ad_196_0420|제목=玉觀彬의 暗殺犯人에 관한 件 2|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라는 위계서열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ref name="bankong1"/> 그에게 사물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정연하게 배열돼야 했고 이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순종과 직분을 통해 조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추구했으며 그에게 좌파의 평등주의는 이 조화를 해치고자 하는 일시적 풍파일 뿐이었다.<ref name="bankong1"/>
=== 안공근과의 결별 ===
[[1939년]] [[5월 30일]]경에 발생한 [[안공근 피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는 첫번째는 [[일본 제국|일제]] 밀정이다. 당시 상해에서 일제의 간첩 공작이 매우 활발했고,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원으로서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여 일제의 주요 목표물이었다. 두번째는 중국계 마적인 [[나검북]](羅劍北)에 의한 암살설이다. 세번째는 [[오영섭]]이 제기한 김구계에 의한 암살설이다.<ref name="ah1">오영섭, 《한국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경인문화사, 2007) 302페이지</ref> [[도진순]]도 김구계에 의한 암살 가능성을 크게 보았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69&aid=0000159572|제목=김구와 김일성 1940년대 손잡을 기회 있었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일보|확인날짜=}}</ref> 단 김구계가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며, 김구가 안공근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 정치적 실패에 대한 비판 ====
[[1934년]] 1월 2일 [[김해산]]은 "나는 몇 년전에 위혜림과 한국인 安恭根이 대공원(The Great World Amusement Resort) 근처에 도박장을 설립하자는 한 광동인의 술수에 수천달러를 사기당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고 진술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d_020_0020_0130|제목=13. 金海山 등 심문기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광복군 참모장이자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그가 '끝까지 대의명분론을 주장하면서 민족통일을 관철하고자 하여 국제정세를 외면하다시피 오직 소신대로 나간 분이 백범 선생이다. 그런 까닭에 이박사는 마침내 현실의 정치가로 일어섰고, 백범 선생은 이상의 정치가로 주저앉게 됐다.'고 비판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199511290300{{깨진 링크|url=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199511290300 }} donga.com[뉴스&#93;-철기 이범석/김학준(해방공간의 주역들:16)<!--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199511290300 }}</ref>
 
제1대 [[내무부 장관]]과 13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동산 [[윤치영]]은 그는 김구 단정 수립 반대를 호되게 비판했다.<ref name="kyu19720408">경향신문, 1972년 04월 08일자 4면, 사회면</ref>
[[1935년]] 11월 하순 김구파는 임시 정부의 당권을 장악한 김원봉파에 대항해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을 창립했는데,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은 김구를 중심으로 결속이 견고한 편이었지만 내분이 있었다. 그 원인은 대체로 김구의 비서격인 [[안공근]]의 인색함과 그의 전횡 때문이었다. 한때 김구의 팔다리로서 무장투쟁을 전담했던 김동우(金東宇) 즉 노종균(盧鐘均), 주효춘(朱曉春) 또는 양여주(楊汝舟) 즉 오면식(吳冕植), 한도원(韓道源) 등의 유력분자는 이에 극도의 불만을 품고 [[1936년]] 1월 초순 잇달아 [[난징시|난징]](남경)을 탈출하여 상해에 잠입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35_0010_00180|제목=18) 한국국민당(김구파)|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인용문2|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백범의 명분은 옳았지만 이것은 우리 가슴에 칼을 내지르는 소리요. 결과적으로는 백범 망신에 그치고 만 것이 다행이지, 만약 그때 남북합작(南北合作)을 한다고 덤볐다가는 나라가 망했을 것입니다.<ref name="kyu19720408"/>}}
[[1937년]] 10월경 김구는 일본군이 점령한 [[난징시|난징]]에서 형수(안중근의 처)를 모셔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안공근]]을 심히 질책하였다. 《[[백범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 이로써 [[안공근]]은 김구와 결별하고 단독활동을 시작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5_0040_00010|제목=1. 『한국의 광복을 위한 중국정부의 지원에 대한 회상』|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ref name="kyu19720408"/>'이라고 분석했다.
[[1938년]] 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를 따라 [[후난성 (중화민국)|후난성]](호남성) [[창사시|창사]](장사)로 이동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는 [[안공근]]·안경근을 홍콩에 파견해 안정근·안우생·김인과 동지 규합과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
 
[[윤치영]]은 또 김구 생전에 그가 임정의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YMCA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윤치영]]은 연단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평양 일방 남북회담을 적극추진하고 있는 김구를 지적, 중국으로부터 귀국 시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으니 그는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다 라며 성토하였다.<ref name="ReferenceA"/>
[[1939년]] 5월 [[안공근]]은 [[중국 국민당]]을 통해 가족들을 데리고 [[충칭시|충칭]](중경)에 거처를 잡고 [[유진동]](劉振東) 내외와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며칠 뒤 [[충칭시|충칭]](중경)에서 실종됐다. 훗날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은 "당시 한인 청년들이 충칭에서 개업중인 한인 의사 [[유진동]](劉振東) 선생의 병원으로 [[안공근]] 선생의 시신을 들고 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037240|제목=[길을찾아서] 안 의사 동생의 실종과 ‘60년간의 비밀’ / 김자동|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겨레|확인날짜=}}</ref>
 
16대 [[대통령]] [[노무현]]은 그를 '실패한 정치인'이라 비판하였다. [[2003년]] [[6월]] [[일본]] 순방 중, [[6월 8일]] [[도쿄]]에서 가진 공개 인터뷰에서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 이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ref name="omai0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7583 노무현 대통령, 김구 평가 발언 논란 - 오마이뉴스] 2003년 06월 11일자</ref> 그는 도쿄방송(TBS)이 일본 전역에 방영한 '한국 노무현 대통령 솔직하게 직접 대화'라는 주제의 90분짜리 토론에 참석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일본 여성 방청객의 질문에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고 밝혔다.<ref name="omai03"/>
[[1939년]] [[10월 3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 제31회 정기회의에서 [[안공근]]은 의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의원 안공근은 그의 종적이 묘연하야 도원(到院)할 가능이 없다고 인정됨으로 그의 의원자격이 상실되는 것으로 인정하기로 결의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02_0010_00310_0010|제목=1) 臨時議政院 第三十一回 定期會議 紀事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 ==
[[1940년]] [[2월 1일]] [[안공근]]은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임시 의정원]]에서 제적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01_0020_00550|제목=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第65號|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화민국]] 노선으로 갔다.<ref name="kang11">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71쪽</ref> 훗날 [[중국 국민당|국민당]]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에서 패퇴하여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ref name="kang11"/> [[강준만]]은 [[미국]]의 패권장악과 [[중화민국]]의 몰락을 이승만의 승리와 김구의 패배 요인으로 보았다.<ref name="kang11"/> [[이승만]]에 비교해서 웅변력이 떨어졌던 김구는 대중 선동에 있어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89쪽</ref> 이점 역시 김구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김구는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그 이유가 [[1946년]] 모친 [[곽낙원]] 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 뒤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한다.<ref name="경마" /> [[이승만]]도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ref name="경마"/> 한편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ref name="경마"/>
=== 경교장 생활 ===
김구 비서 [[선우진]]의 증언으로는 경교장 생활은 전혀 풍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우진은 정기적으로 얼마씩 수입이 들어오는 형편이 아니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돈과 관련된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에 자연 김구를 모시는 이들의 생활도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1946년에 상공회의소 부회장 강익하가 300만 원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그 돈을 받지 않고, 이승만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승만에게는 이미 500만 원을 보냈고, 상공회의소 공의(公議)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라고 했다.<ref name="s268">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68쪽</ref><ref name="sum1">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푸른역사, 2008) 74쪽.</ref><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102017002 백범 수행비서의 절절한 추모와 회한] 서울신문 2009년 01월 02일자, 17면.</ref>
 
김구는 [[이승만]]과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ref name="강준만 67" /> 그러나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김구가 지목되었을 때 이승만이 도움을 거절한 일로 [[이승만]]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에 증인 자격으로 서게 된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ref name="강준만 67" />
한미호텔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요인들의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굶는 일이 많게 되자, 주위에서 김구에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승만]]에게 돈을 부탁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김구가 마지못해 돈을 부탁하러 [[돈암장]]을 찾았는데, 이 박사가 난색을 표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조완구]] 선생과 [[엄항섭]]이 다시 김구에게 어려운 형편을 말하자 김구는 이 박사를 다시 찾아가 30만원을 얻어 한미호텔에 있던 요인들의 경비로 사용했다. [[선우진]]에 의하면 김구를 수행하여 [[돈암장]]을 방문했는데, 이승만은 “남들은 모두 내게 돈을 주는데, 백범은 내게서 돈을 가져가는구먼”하며 입을 실룩거렸다고 하며, 김구는 아무 표정 없이 돈암장을 나섰다고 한다.<ref name="s268" /><ref name="sum1" />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는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 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ref name="강준만 67"/>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 김구는 [[이승만]]과 결별을 결심했다.<ref name="강준만 67"/> [[윤경빈]]에 의하면 훗날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ref>KBS 1TV <<한국사 傳>> -이승만(2부)편-, 김구의 비서를 지냈던 윤경빈의 증언</ref>
한편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상해 시절에 대한 증언으로 [[안공근]]과 감정이 있었던 [[백찬기]]는 “김구파의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 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라며 비판하였다.<ref name="sum1" /><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9~300쪽.</ref>
 
== 일화 ==
김구 비서 [[선우진]]의 증언으로는 경교장 생활은 전혀 풍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우진은 정기적으로 얼마씩 수입이 들어오는 형편이 아니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돈과 관련된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에 자연 김구를 모시는 이들의 생활도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1946년에 상공회의소 부회장 강익하가 300만 원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그 돈을 받지 않고, 이승만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승만에게는 이미 500만 원을 보냈고, 상공회의소 공의(公議)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라고 했다.<ref name="s268"/><ref name="sum1">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푸른역사, 2008) 74쪽.</ref><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102017002 백범 수행비서의 절절한 추모와 회한] 서울신문 2009년 01월 02일자, 17면.</ref>
 
한미호텔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요인들의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굶는 일이 많게 되자, 주위에서 김구에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승만]]에게 돈을 부탁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김구가 마지못해 돈을 부탁하러 [[돈암장]]을 찾았는데, 이 박사가 난색을 표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조완구]] 선생과 [[엄항섭]]이 다시 김구에게 어려운 형편을 말하자 김구는 이 박사를 다시 찾아가 30만원을 얻어 한미호텔에 있던 요인들의 경비로 사용했다. [[선우진]]에 의하면 김구를 수행하여 [[돈암장]]을 방문했는데, 이승만은 “남들은 모두 내게 돈을 주는데, 백범은 내게서 돈을 가져가는구먼”하며 입을 실룩거렸다고 하며, 김구는 아무 표정 없이 돈암장을 나섰다고 한다.<ref name="s268"/><ref name="sum1"/>
 
한편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상해 시절에 대한 증언으로 [[안공근]]과 감정이 있었던 [[백찬기]]는 “김구파의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 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라며 비판하였다.<ref name="sum1"/><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9~300쪽.</ref>
 
=== 백범일지 윤문 ===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의 교열과 윤문은 [[이광수 (1892년)|이광수]]가 하였다. 《[[백범일지]]》‘백범일지’ 판본은 크게 4가지다. 김구가 1929년과 1942년에 탈고한 친필본과 그것을 옮겨적은 필사본 2종, 1947년에 공식적으로 출간된 국사원본까지다.<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1968179
|제목=[주목 이 책]김구의 가슴뭉클한 생애…세세한 고증·해설 주해본
|출판사 =경향신문
|날짜=2008.07.25}}</ref> 여기서 말하는 이광수의 윤문은 해방 이후 나온 1947년 책을 말한다. 《[[백범일지]]》는백범일지는 명문장가인 이광수의 윤문이라는 꽃단장을 통해 재탄생했다. ‘국사원본 백범일지’는 처음부터 유려한 문장,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발했다. ‘친필본 백범일지’와는 차이가 너무 많은 작품이다.<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6020609
|제목=[신동립 잡기노트]“백범 김구, 박정희 덕분에 영웅됐다”
줄 966 ⟶ 1,076:
|날짜=2014.08.24}}</ref> 1994년 백범의 아들 김신이 친필 원본을 공개함으로써 이광수의 윤문과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45년]] [[11월]] 김구가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출간할 때 [[이광수 (1892년)|이광수]]가 윤문을 자청했다<ref name="han2">[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9780.html 통큰 인물 '벽초와 백범'] 한겨레 2005년 08월 25일자.</ref> 한다. 백범일지의 윤문을 허락한 사람이 백범 자신인지, 아니면 백범 비서 등 주변 사람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ref name="kukki1">[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920981005&cp=nv (책과 길) 출간 60년된 백범일지 감춰진 얼굴]{{깨진 링크|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920981005&cp=nv }}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8년 07월 25일자.</ref> 문제는 춘원이 윤문 과정에서 친필본에 없는 문장을 임의로 첨삭해 원전의 텍스트적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ref name="kukki1" /> 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이광수 (1892년)|이광수]]가 [[백범일지]] 편찬에 참여한 것을 김구가 알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따르면 “(친일파 이광수가) 속죄하는 심정으로 맡겠다고 하니 시켜보라고 주위에서 백범께 말했다. 김구는 그의 행실(일제 후반에 변절한 것) 때문에 망설였다”<ref name="han2" /> 고 한다. 그러나 곧 [[이광수 (1892년)|이광수]]에게 《[[백범일지]]》 윤문을 맡긴다.
 
둘째 아들 [[김신]]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건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는 의문입니다.”(김신 씨의 대담, <신동아>, 1986년 8월, 347쪽.<ref name="han2" />)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 저서 ==
=== 《백범일지》(1947, 국사원) ===
 
* 《백범일지》(1947, 국사원):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가 윤문한윤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문헌본문|백범일지}}
==== 〈나의 소원〉 ====
** 〈나의 소원〉: 《[[백범일지|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나의 소원〉은 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인용문|'''민족 국가'''<br />
{{인용문|{{위키문헌|백범일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br />
'''민족 국가'''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br />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br />
(중략)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br />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br />
<br />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br />
<br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br />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強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하략)}}
<br />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br />
…(중략)…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強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하략)...백범<ref>
{{뉴스 인용
|제목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url = http://www.kimkoo.or.kr/02diary/sub.asp?pagecode=m02s02t01}}</ref>}}
 
=== 그 외 ===
* 《도왜실기》(1932, 엄항섭 정리)
* 《백범어록》(2008, 도진순 주해)
 
== 가계사상과 신념 ==
=== 남북협상 참여 목적 ===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자점]]의 후손인 아버지 김순영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 중경 거주시,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때 [[권총]]을 구입하여 줄 만큼 열심히 아들을 지원했다.
[[1970년]]대 이후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는 통일과 조국애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 과정이 정치적 전술이라는 시각도 있다.<ref name="bankong1"/>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ref name="bankong1"/> 시점에서 새로운 정국 반전을 노린 것이라는 것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투쟁을 선도해 이른바 ‘반탁 쿠데타’까지 나아갔다. 반탁투쟁은 해방공간 좌우대립구도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남북 분단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김구는 ‘백의사’ 등을 통해 대북 타격정책을 일관되게 수행했다.<ref name="bankong1"/> 백의사 단원들이 소지한 무임승차권이 북한측에 입수되면서 그는 엄청난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3.1절 경축식 폭탄 투척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혔<ref name="비난231"/> 고, 북한은 이후 그의 이름으로 풍자삼아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ref name="kuu0531"/> 해방공간 내내 반공, 반소로 일관한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참가는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 조건에서 취해진 정치전술일 가능성이 농후했다.<ref name="bankong1"/>
 
=== 외교 문제 ===
외교 문제에 소홀했다는 평가도 있다. 전 [[서울교육대]] [[총장]] [[이택휘]]는 “중국 공산당과의 협력 부재나 당시 강대국인 소련에 대해 배타 정책을 쓴 것은 외교적 투박함”이라고 지적했다.<ref name="동평1"/>
 
김구의 외교력 미숙에 대해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신용하]]는 “중국 국민당과 군사 협력 관계에 있었던 상황에서 백범이 공산당과 공식 관계를 모색하기는 어려웠다”며 “당시 장제스(蔣介石)를 설득해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한 것은 백범 외교의 진가”라고 반박하였고<ref name="동평1"/> [[단국대]] 교수 [[한시준]]도 “백범이 광복군의 연합군 OSS부대 참가를 주도한 것은 승전 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려 한 것”이라며 “이는 백범이 외교에서 상당한 전략을 구사했음을 보여 준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ref name="동평1"/>
 
그러나 [[이승만]]을 통해 [[미국]]과도 외교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반론도 있다.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자 그는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을 [[미국]]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 애국가에 대한 관점 ===
애국가가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는 소문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이에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ref name="aegukga">[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6&key=200604071715441914&q=%C0%B1%C4%A1%C8%A3 "애국가 수정·교체 주장은 부당"]{{깨진 링크|url=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6&key=200604071715441914&q=%C0%B1%C4%A1%C8%A3 }} YTN 2006년 04월 7일자</ref>'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ref name="aegukga"/>'고 반박하였다.
 
===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
그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일종의 독재체제로 이해하였다. [[19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김구는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ref name="bankong1"/> ...(이하 중략)...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며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ref name="bankong1"/>
 
또한“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위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좌파와의 연대는 극히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ref name="bankong1"/>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존재를 좌파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역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아나키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됐다. [[1938년]] 이후 [[장졔스]]가 국공합작 분위기에 편승하기 위해 김구와 [[김규식]], [[김원봉]]을 소환하여 합작, 협력하라고 하자 좌파의 임정입각을 수용하게 된다.
 
1922년 초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지원받았으나 임시정부에는 상납하지 않은 [[김립]]을 사살한 것도 그였다. 그는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을 보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ref name="han21515"/>
 
또한 김립은 레닌으로부터 매각하면 현금으로 바꿀수 있는 귀금속인 금괴를 일부 전달받았는데 이것 역시 임시정부에게 내놓지 않았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김립이 [[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를 사적으로 유용했다며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ref name="rlarflq311"/> 으며,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ref name="rlarflq311"/> 이라며 비판을 하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외세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도 생각했다. [[1919년]] 임시정부 경무국장 당시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혁명에 동참해달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는 [[소련]] 등 외국 세력에 기대는 것이라며 참여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 여순 사건에 대한 관점 ===
김구는 여순 사건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다. [[10월 28일]]의 공개 담화에서 김구는 '순진한 청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며<ref name="han1028">한성일보 1948년 10월 28일자</ref>', '반도(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는 것<ref name="han1028"/>'으로 보인다고 규정했다.
 
{{인용문|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듣고도 그러하니 현지에서 목격하는 자는 비참 격앙함이 그 극에 달할 것이다. 남과 남의 부모처자를 살해하면, 남도 나의 부모처자를 살해하기 쉬우니 그 결과는 첫째, 우리 동족이 수없이 죽을 것이오 둘째, 외군에게 계속 주둔하는 구실을 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좀먹는 행동이니 이로써 우리는 망국노의 치욕을 면하는 날이 없을 것이니, 반란을 일으킨 군인과 군중은 이 때에 있어서 마땅히 勵動된 감정을 억제하고 재삼숙고하여 용감히 悔悟하고 正軌로 돌아갈 것이어니와 현명한 동포들도 마땅히 객관적 입장에서 그 반란을 냉정히 비판하면서 이것의 만연을 공동방지 할지언정 허무한 유언에 유혹되거나 혹은 이에 부화뇌동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ref name="sol481031">서울신문 1948년 10월 30일</ref>
 
여러분의 기대와 託付와 애국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는 나로서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께 왈가왈부를 말하랴마는 금번 반란이 너무도 중대하므로 인하여 국가 민족에 미치는 손해가 또한 중대한 까닭에 그대로 함구만 할 수 없어서 피눈물로써 이와 같이 하소연하는 바이다.
 
동지 동포는 우리의 고충을 깊이 양해하고 동족상잔에서 동족상애의 길로 공동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ref name="sol481031"/>}}
 
[[10월 30일]] 여순 사건 관련 담화에서 김구는 '여수, 순천 등지의 반란을 '집단 테러 활동<ref name="sol481031">서울신문 1948년 10월 30일</ref>'으로 규정하고 "부녀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처지지 않을수 없다<ref name="sol481031"/>"고 발표하였다.
 
== 가족 관계 ==
김구의 자서전《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자점]]의 후손인 아버지 김순영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 중경 거주시,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때 [[권총]]을 구입하여 줄 만큼 열심히 아들을 지원했다.
또한 군인 출신 정치인 [[이후락]]과도 사돈관계이기도 하다.
* 증조부 : 김영원(金榮元<ref>백범일지에 의하면 가짜 어사노릇을 하다가 체포되었으나, 한성의 지인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한다.</re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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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후]] - [[1981년]] 《[[제1공화국 (드라마)|제1공화국]]》 [[MBC]]
* [[이영후]] - [[1982년]] 《[[거부실록 시리즈]] - [[백산 안희제 (드라마)|백산 안희제]]》 [[MBC]]
* [[이치우]] - [[1982년]] 《[[그 여름의 이틀]]》 [[KBS1]]
* [[이영후]] - [[1982년]] 《[[한 (드라마)|한]]》 [[MBC]]
* [[안대용]] - [[1984년]] 《[[독립문 (1984년 드라마)|독립문]]》 [[KBS1]]
* [[이영후]] - [[1984년]] 《[[조선총독부 (드라마)|조선총독부]]》 [[MBC]]
* [[이치우]] - [[1985년]] 《[[새벽 (드라마)|새벽]]》 [[KB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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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진웅]] - [[2017년]] 《[[대장 김창수]]》, 영화
 
== 같이역대 보기선거 결과 ==
{| class="wikitable"
{{col-begin}}
|-
{{col-4}}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 [[한국독립당]]
|-
* [[한국노병회]]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제1대 대선]]||[[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1대||[[한국독립당]]||{{막대|자|0|6|6|3}} 6.63%||13표||2위||낙선
* [[백범일지]]
|-
* [[백범기념관]]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제1대 부통령 선거]]||[[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1대||[[한국독립당]]||{{막대|자|3|1|4|7}} 31.47%||62표||2위||낙선
* [[동학농민운동]]
|}
* [[대한민국임시정부]]
 
*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
== 각주 ==
* [[신탁통치반대운동]]
{{각주|2}}
* [[송진우 피살 사건]]
*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 [[김규식 (1881년)|김규식]]
* [[박찬익 (1884년)|박찬익]]
* [[이승만]]
* [[장제스]]
* [[안창호]]
* [[안공근]]
* [[105인 사건]]
* [[이봉창]]
* [[윤봉길]]
* [[유상근]]
* [[이동녕]]
* [[이시영 (1868년)|이시영]]
* [[윤치영]]
* [[김좌진]]
* [[김두한]]
{{col-4}}
* [[한국 광복군|광복군]]
* [[미군정]]
* [[안공근 피살 사건]]
* [[민주의원]]
* [[고능선]]
* [[김창숙]]
* [[민필호]]
* [[송병조]]
* [[안미생]]
* [[안재홍]]
* [[안정근]]
* [[안중근]]
* [[양기탁]]
* [[윤치호]]
* [[장제스]]
* [[중화민국]]
* [[조성환]]
* [[한국국민당]]
* [[한인애국단]]
* [[허정]]
* [[홍진]]
* [[존 하지|하지]]
* [[미 군정]]
*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 [[경교장]]
{{col-4}}
* [[삼청장]]
* [[반공주의]]
* [[장덕수 피살 사건]]
* [[김홍일 (1898년)|김홍일]]
* [[안공근]]
* [[장덕수]]
* [[김석황]]
* [[안두희]]
* [[엄항섭]]
* [[이유필]]
* [[조소앙]]
* [[김학규 (1900년)|김학규]]
* [[안창호]]
* [[여운형]]
* [[여운홍]]
* [[조만식]]
* [[조완구]]
* [[차이석]]
* [[김신]]
* [[임정 각료]]
* [[선우진]]
* [[신익희]]
* [[이청천]]
* [[독립촉성중앙회]]
* [[한국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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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의사]]
* [[염동진]]
*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 [[김인]]
* [[김준엽]]
* [[김일성]]
* [[김철 (1886년)|김철]]
* [[박헌영]]
* [[신규식]]
* [[이범석 (1900년)|이범석]]
* [[이철승]]
* [[장면]]
* [[장건상]]
* [[장택상]]
* [[장준하]]
* [[조봉암]]
*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 [[김구선생 암각문]]
{{col-end}}
 
== 관련참고 서적자료 ==
{{참고 자료 시작|2}}
* 김구, 《백범일지》(국사원, 1947)
줄 1,211 ⟶ 1,286:
* 김삼웅, 《김구 평전》 (시대의 창, 2004)
{{참고 자료 끝}}
 
== 참고 자료 ==
{{위키자료집|글쓴이:김구|김구}}
{{위키인용집}}
* {{독립유공자|648|김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8101041511&code=920301 새 지폐 인물선호도 김구·신사임당·유관순·정약용 順] 경향신문을 중요시해 주세여
2007.08.10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41001155137&Section=01 백범의 "죽여도 되는" 반민족 '칠가살(七可殺)'] 프레시안 꼭 봐야겠네염
2004.10.01
* [http://www.hani.co.kr/section-001065000/2004/05/001065000200405101843248.html 좌우구도 굳힌 반탁운동에 반공·반소로 일관한 김구] 한겨레신문 2004.05.10
 
== 외부 링크 ==
* [http://www.kimkoomuseum.org/ 백범 김구 기념관]
* [http://kimkoo.or.kr/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 [https://web.archive.org/web/20071007174619/http://baikbumkimkooacademy.org/ 백범학술원]
== 역대 선거 결과 ==
{| class="wikitable"
|-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제1대 대선]]||[[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1대||[[한국독립당]]||{{막대|자|0|6|6|3}} 6.63%||13표||2위||낙선
|-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제1대 부통령 선거]]||[[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1대||[[한국독립당]]||{{막대|자|3|1|4|7}} 31.47%||62표||2위||낙선
|}
 
{{전임후임
== 각주 ==
{{각주|2}}{{전임후임
|전임자 = [[노백린]]
|후임자 = [[이동녕]]
줄 1,329 ⟶ 1,404:
[[분류:범죄 피해자]]
[[분류:테러 피해자]]
[[분류:한국의 범죄인]]<!--치하포 사건-->
[[분류:한국의 통일운동가]]
[[분류:환속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