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천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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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안대군 (1348년)|의안군 이화]]의 삼남(三男, 셋째아들)으로 출생한 그는 [[고려 우왕]] 치세 시기이며 [[고려|고려 시대 말기]]이던 [[1387년]] [[음서]]로 산원(散員)에 발탁되어 이후 [[1390년]]부터 [[1392년]]까지 2년간 낭장(郎將)을 역임하였으며 이처럼 [[고려 우왕|우왕]]·[[고려 창왕|창왕]]과 [[고려 공양왕|공양왕]]을 섬기다가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같은 해 [[1392년]]에 큰아버지 [[조선 태조|조선 태조 이성계]]로부터 '''학천군'''(鶴川君)에 책봉되어 조선 왕족 종실 겸 무관 관료로 입각하였고 4년 후 [[1396년]] [[1월]]에 문과 급제하였다. 이후 정헌대부와 공조판서를 거쳐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2년(태종 12) 5월에는 우군총제 직위를 제수받았으며 2년 후 1414년 9월 하절사로 [[명나라]] [[난징 시|징스남경]]에 다녀왔다. 3년 후 1417년 7월 동지돈녕부사에 발탁되었고 이듬해 1418년 4월 좌군도총제에 보임되었다. 1년 후 1419년(세종 1) 7월에는 표전사신(表箋使臣)이라는 지위를 받아 [[명나라]] [[난징 시|징스]]에 가서 [[영락제|명 영락제]]를 알현하고 같은 해 1419년 10월에 귀국하였다.
 
1423년(세종 5) 5월 지돈녕부사를 거쳐 같은 해 1423년 12월에는 경상도 좌도병마절제사에 임명되었고 1425년(세종 7) 중군도총제로 보임되었으며 이듬해 1426년(세종 8) 3월에는 절일사(節日使)로 [[명나라]] [[베이징 시|옌징]]에 다녀왔으며 같은 해 [[1426년]] [[6월]]에는 유후사선위사(留後司宣慰使)의 지위를 받아 다시 명나라 옌징에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