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무라 히토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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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Hitoshi Imamura.jpg|thumb|이마무라 히토시]]
'''이마무라 히토시''' ({{llang|ja|今村 均}}, [[1886년]] [[6월 28일]] ~ [[1968년]] [[10월 4일]]) 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의 육군 대장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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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 초기, 제16군 사령관으로 [[자바 섬]] 공략을 지휘해 9일만에 10만의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을 항복시켰다. 공략 당시에 네덜란드 군에 의해 유배당했던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의 지도자 [[수카르노]]와 핫타를 정치범에서 해방시키고, 자금과 물자를 원조, 현지민의 관리등용 등을 지원하는 한편 이마무라는 군 지휘자로서의 능력을 발휘, 적이 파괴한 석유 정제 시설을 복구해 석유 가격을 네덜란드 통치 시대의 절반으로 보급하고 약탈을 금지시켜 치안을 유지시켰는데, 이런 조치는 현지인들의 호감을 얻었다. <ref>《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86쪽</ref>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에서는 피복이 부족해 배급이 이뤄지자 일본 정부는 자바에서 생산되는 목면의 대량 수입을 고려했지만 이마무라는 이 요구를 거절한다. 이것은 목면을 징발하면 현지인들의 장례 생활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죽은 자에게 목면옷을 입히는 종교 전통을 손상시키고, 목면이 주수입인 기본 생활을 파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군부에선 그를 비난했지만, 이 사정을 알게 된 정부 관계자의 배려로 그에게 계속 [[자바 섬]]을 통치하게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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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미군의 공습에 대비해 지하 요새를 건설했는데 [[더글러스 맥아더]]의 미군 사령부도 이를 공략하지 못하자 이를 우회해 보급로를 차단, 일본군을 아사지경으로 몰아넣으려 했지만, 이마무라가 경작한 전답으로 보급이 없어도 물자가 충분했기에 전쟁이 중단될 때까지 라바울은 [[일본제국 육군|일본군]]의 소유로 남아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이마무라는 지휘관로서 군법 회의에 소환되었다. 제8군단 사령관으로서의 책임으로 호주군이 실시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현지 주민들의 간청으로 금고 10년형으로 확정되었다.
 
그 후, 제16군단제16군 당시 책임 문제는 네덜란드군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무죄를 선고받았다. <ref>《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241쪽</ref> [[1949년]], 이마무라는 [[스가모 구치소]]로 이송될 예정이었지만, 현지 계류중인 부하들을 두고 자신만 [[도쿄]]에 돌아갈 수 없다해 일본군 병사들이 수용된 마누스 섬 수용소에 입소하는 것을 희망하였고, 처를 통해 맥아더에게 알리게 했다.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나는 이마무라 장군이 옛 부하 전범들과 함께 마누스 수용소를 희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무사도를 알게되었다. 그에게 곧 허가를 명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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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일본국립도서관 헌정자료과실에 그의 육성이 담긴 정치 담화 녹음이 남겨져 있으며, 이마무라는 [[1968년]]에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주석==
{{주석}}
 
[[분류:1886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