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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정조 24년)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ref>[[조선 순조#.EC.A0.95.EC.A1.B0.EC.8B.A4.EB.A1.9D .281805.29|정조실록 (1800)]]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406028_011 54권, 정조 24년 6월 28일 기묘 11번째기사]</ref>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즉위와 함께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고<ref>[[#순조실록 (1838)|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007004_001 1권, 순조 즉위년 7월 4일 갑신 1번째기사]</ref> [[1803년]] 음력 12월까지 계속되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의 폐위를 주장했던 친오라버니 [[김귀주]]를 비롯한 [[벽파]](僻派)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고, 수렴청정 기간 동안 벽파가 정권을 장악했으므로, 이들은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 숙청에 주력했다.
 
이들 벽파는 [[사학]](邪學)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온 터였다.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사교금압(邪敎禁壓))에 관해 하교를 내렸다.([[1801년]] [[음력 1월 10일]]) 그 내용은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을 믿는 자들이니, 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것이다. 또한, [[오가작통법]]을 시행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ref>[[#순조실록 (1838)|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01010_001 2권, 순조 1년 1월 10일 정해 1번째기사]</ref> 이러한 하교에 따라 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다.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 (1756년)|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 [[채제공]]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u>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u>(틀림. 서얼허통은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nbsp;서얼의 허통을 명하였다)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 친정기: 세도 정치와 봉건왕조의 모순 심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