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쿠데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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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전두환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취임하고 신군부로 권력이 완전히 넘어가게 되자, 미국은 대화를 꺼리던 이전과 달리 실권자가 된 전두환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 내에서 신군부를 배제하고 북한과 대화를 해서라도 신군부를 강경하게 다뤄야 한다는 [[지미 카터|카터]]·[[에드먼드 머스키|머스키]] 등 강경파와 전두환을 현실로 인정하자는 홀브룩·글라이스틴 등 신중파의 대립이 있었지만, 결국 미국은 전두환을 현실로 인정하는 대신 타협을 통해 최대한 한국의 정치발전을 이끌어낸다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했다.<ref name= '미국4'>[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9/22/200409220500087/200409220500087_1.html 전두환의 집권과 미국의 '거리' 두기] 신동아 2004년 9월 22일</ref> 계엄령 아래서 보안사에 의해 통제되던 한국언론은 한국의 사태 전개에 대한 미국관리들의 말을 번번이 무시하고 왜곡하기도 했다. 미국관리가 한미 안보관계를 지지하는 말을 하면 그 말은 반드시 대서특필됐으나, 민주화와 인권존중을 촉구하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거나 아예 보도되지도 않았다.<ref name= '미국1'/> 당시 지미 카터 미 행정부는 [[이란 인질 사건]]과 대통령 선거를 맞아 어려움을 겪고 있어 한국 상황에 신경 쓸 여유를 갖지 못 했고, 전두환은 철저하게 친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미국의 이러한 상황을 활용함으로써 집권을 굳혔다.<ref name= '미국4'/>
 
한국은 레이건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과 정상회담 교섭을 위한 교섭을 시작했다. 미국 측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어떻게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손에서 피가 흐르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며 정상회담을 거부했지만, 한국 측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명 문제를 언급하여 성사될 수 있었다.<ref>[httphttps://medianews.v.daum.net/politics/othersv/newsview?newsid=20130305044550227 “김대중 살려주면 전두환 美 국빈방문 허용 ‘韓·美 정상회담’ 거래 있었다”] 서울신문 2013년 3월 5일</ref> 81년 2월 2일 방미한 전두환은 정치적으로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미국에 요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133255 지난 1981년, 美 전두환 '지지요청' 거절] MBC 2010년 2월 11일</ref> 전두환의 미국 방문은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군당국의 유혈진압을 계기로 불안정했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미국의 공식지지로 해석돼 비판을 받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667653 <레이건 사망> 한반도정책(종합)]연합뉴스 2004년 6월 6일자 기사</ref>
 
== 관련 판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