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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_Zetian: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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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궁 시절 ===
[[636년]], [[이세민|당 태종 이세민]]이 [[장손황후|황후 장손씨]]를 잃자, 그 이듬해에 무조의무조(武照)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14세의 무조를 입궁시켜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렀다.<ref>장숙연, p.15</ref> 무사확이 죽은 뒤로 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보내던 무조는 입궁하게 된 것을 반갑게 여겼다.<ref name="장26"/> 그러나 무조는 가문이 빈한하여 황제의 후궁 중 비교적 낮은 지위의 재인(才人: 정5품)에 봉해졌고, 다른 후궁들의 업신여김을 받으며 어려운 궁중 생활을 보냈다.<ref name="장18">장숙연, p.18</ref> 어느 날 태종 이세민이 대신들에게 성질이 사나운 말 한 마리를 다룰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조가 나서서 "신첩에게는 철편, 철추, 비수 단 세 가지 물건만이 필요합니다. 우선 철편으로 말을 때리고, 듣지 않으면 철추로 머리를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머리를 잘라버리겠습니다." 고 답하였다.<ref name="장18"/> 이세민은 무조의 기개를 칭찬하며 그녀에게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조는 애교를 부릴 줄 몰라 이세민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무조는 이세민이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승은도 받지 못했다한다. 그렇게649년 649년에7월에 이세민이 사망하고, 무조의 간청으로 9남인 이치가이치(李治)가 이태를동복형 몰아내고이태(李泰)를 황제에제치고 올라황제 고종이고종에 되었다. 이치는 태자일 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고, 무조 또한 이치에 반하였다고 한다올랐다.
 
그리고 무조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하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천조'''(穿照)라는 [[법명]]으로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갔다. 이치는 태자일 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고, 무조 또한 이치에 반하였다고 한다. 이치는 650년 여름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무조를 본 순간 또다시 옛정이 떠올랐고 무조 또한 이치에게 몰래 〈여의낭〉(如意娘)이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보였다.<ref>장숙연, p.20</ref> 무조는 그길로 고종을 따라 입궁했다.
 
=== 재입궁과 암투 ===
무조가 황궁으로 돌아갈 수무조(武照)의 있었던650년 이유로는입궁에는 이치의 황후인 [[왕황후 (당나라)|왕씨]]의 도움이 컸다. 왕씨는 당시 이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숙비 소씨|소숙비]](蕭淑妃)를 질시했는데, 이치가이치와 무조와무조의 밀회한 사실을감정을 알고 이치의 마음을이치를 소숙비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무조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했다.<ref>장숙연, p.21</ref> 왕씨는 무조에게 다시 머리를 기르게 하고 이치에게 무조를 후궁으로 삼으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이것은 여우를 잡기 위해 범을 불러들인 격이 되었다. 무조는 황후 왕씨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 앞에서는 지극히 공손하고 겸손하게 행동하였고공손했고, 왕씨는 무조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복종한다고 여겨 이치 앞에서 여러번 그녀를무조를 칭찬하였다칭찬했다.<ref>쑨젠쥔, 《여중호걸 무측천》 민경삼 역, 세종서적, 2009, p.74, {{ISBN|978-89-8407-283-1}}</ref> 이치가 무조를 소의에왕황후와 봉하는소숙비 것이다음가는 어떻겠냐고지위인 묻자소의(昭儀)에 봉하려 하자 왕씨는 흔쾌히 승낙하였고 무조는 황후 왕씨와 소숙비 다음가는 지위인 소의가승낙했다 되었다한다.<ref>장숙연, p.22</ref>
 
무조는 이치와의 사이에서 모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652년 이치의 사랑을장남 차지하기이홍(李弘)을 시작했으며출산했으며, 결국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폐출시켰다. 이리하여이렇게 무조는 비(妃)가 되었다.되었지만 하지만궁내에서 야심만만했던왕씨와 무조는 황궁 안에서 왕씨나 그 일족이일족의 오만한 태도로태도에 평판이대한 좋지나쁜 않은 것을평판을 기회 삼아 그들을 반대하는 궁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모았고모았고 왕씨의 일거수 일투족을행동을 파악하였다.<ref>쑨젠쥔, p.75</ref>
 
그러던 어느날 무조가 654년 안정공주(장녀이자첫딸 태평공주의 언니)를안정공주를 낳자, 아이를 좋아하는 황후 왕씨는 기뻐하며 무조의 처소를 찾아와찾아 딸을영아를 보고 갔다.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목졸라 죽이고교살하고 딸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두었다.<ref>장숙연, p.23</ref> 무조는 때,왕황후의 고종소행이라 이치가주장했는데 들어와실제로 딸을왕씨의 보러소행이었다는 왔다가 죽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무조는 이 모든 것이 황후의 소행이라설도 모함하였다있다. 이에 이치는 황후 왕씨를 폐서인시키고폐서인하고, 소의 무조를 황후로 삼으니, 이 때가 영휘 6년([[655년]]) [[10월 13일]]이었다. 무조는 황후가 되고 나서도무조는 왕씨와 소숙비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그녀들에게소숙비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어가게죽였다고 하였다한다. 또한 왕황후와 소숙비의 성을 각각 망(蟒, [[이무기]]), 효(梟, [[올빼미]])로 바꾸어 불렀다 한다.
 
=== 비정한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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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 부: [[무사확]](武士彠, 559년576년~635년)
* 모: 무사확의 후처 영국부인 양씨(榮國夫人 楊氏) ([[수나라]] 재상양제의 4촌아우이자 재상인 [[양달]](陽地) 楊達의 딸. 579년 ~ 670년)
* 언니: 한국부인 무씨(韓國夫人 武氏). 본명 武順. 623년 ~ 665년. 동생 (측천무후에 의해 독살됨독살?)
* 형부: 하란씨한국부인 武順의 남편 하란(賀蘭安石)
** 조카: 위국부인하란민지 하란씨(魏國夫人 賀蘭敏之 642년 ~ 671년)
** 조카: 위국부인 하란씨(魏國夫人 賀蘭氏.본명 미상 ?년 ~666년 이모 측천무후에게 피살?)
* 남편: [[당 고종|고종]]
* 여동생: 무씨 武氏
** 장남: [[이홍 (당)|의종]]
* 제랑: 여동생 武氏의 남편 곽효신 (郭孝慎. 요절)
** 차남: [[이현 (당)|장회태자]]
* 남편: [[당 태종|태종]] 이세민(李世民 599년 ~ 626년 즉위 ~ 649년)
** 삼남: [[당 중종|중종]]
* 남편: 이세민의 9남 [[당 고종|고종]] 이치(李治 628년 ~ 649년 즉위 ~ 683년)
*** 손녀: [[안락공주]]
** 장남: 이홍(李弘.시호[[이홍 (당)|의종]] 義宗 . 652년 ~ 675년. 친모 측천무후에게 독살?)
** 사남: [[당 예종|예종]]
** 장녀: [[안정공주]] 安定公主 (654년 ~ 654년 영아 사망. 王皇后가 또는 친모 측천무후가 교살? 산후 부주의로 돌연병사?)
*** 손자: [[당 현종|현종]]
** 차남: [[이현 (당)|장회태자]] 章懷太子 이현(李賢, 655년 ~ 684년. 의문사)
** 장녀: [[안정공주]] (측천무후에게 살해당함)
** 삼남: [[당 중종|중종]] (中宗 이현 李顯 656년 ~ 684 즉위 50 여일 만에 어머니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 연금 ~ 705년 재즉위. 710년 황후 위씨韋氏 와 7녀 안락공주에게 독살당함)
** 차녀: [[태평공주]]
*** 손녀: 중종의 7년 [[안락공주]] (본명 이과아 李裹児. 684년 ~ 710년. 아버지 중종을 독살한 즉시 친모 위씨韋氏와 함께 처단됨)
** 사남: [[당 예종|예종]] (睿宗 이단 李旦 662년 ~ 684년 중종의 폐위와 함께 즉위 ~ 690년 어머니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 ~ 710년 복위 ~ 712년 양위 ~ 716년 사망)
*** 손자: 예종의 3남 [[당 현종|현종]] 이융기(玄宗 李隆基, 685년 ~ 712년 즉위 ~ 756년 양위 ~ 762년 사망)
** 차녀: [[태평공주]] (665년 ~ 710년 거사~ 713년 현종의 강요로 자살)
 
== 측천무후가 등장한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