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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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徐)씨는 [[중국의 성씨|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서(徐)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751,704명으로 조사되어,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13위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단군조선]] 예국군장(濊國君長) [[여수기]](余守己)가 서(徐) 성을 하사받은 것이 기원이다.
== 이천 서씨 ==
{{본문|이천 서씨}}
'''[[이천 서씨]]'''(利川 徐氏) 시조 '''[[서신일]]'''(徐神逸)이 [[통일신라]] 말기 교외에 살 때 사슴이 뛰어 들어오자 화살을 뽑아주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와서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감사해하면서 “사슴은 내 아들인데 공에게 힘입어 죽지 않았으니 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다.”라고 말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80세에 [[서필]](徐弼)을 낳았는데, [[서필]], [[서희]](徐熙), [[서눌]](徐訥) 3대가 고려의 재상(宰相)이 되어 [[내의령]](內議令)·[[내사령]](內史令)·[[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으며, 배향공신이 되었다.<ref>[http://db.history.go.kr/id/kr_094r_0010_0010_0090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ref> 이천(利川)이란 지명은 935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살던 [[서목]](徐穆)이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준 데서 비롯됐다. [[서희]]의 아들 [[서유걸]](徐維傑)이 [[좌복야]](左僕射), 손자인 [[서정 (고려)|서정]](徐靖)이 [[판삼사사]](判三司事), 증손자인 [[서균 (고려)|서균]](徐鈞)이
* [[장성 서씨]](長城徐氏) 시조 '''[[서릉]]'''(徐稜)은
* [[연산 서씨]](連山徐氏)의 시조는 '''서준영'''(徐俊英)이나 이후의 문헌이 전하지 않아 서의민(徐義敏)을 1세조로 한다. 2015년 인구는 7,510명이다.
* [[남평 서씨]](南平徐氏) 시조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대광내의령(大匡內議)이다. 서호(徐顥)의 손자 '''[[서지 (1468년)|서지]]'''(徐祉, 1468년 ∼ 1537년)가 1498년(연산군 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대사간,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985년 인구는 5,298명이다.
* [[평당 서씨]](平當 徐氏) 시조 서준방(徐俊邦)이 고려조에서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내고 외적(外敵)을 격퇴시키는데 공(功)을 세워 봉성군(峯城君)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서약진(徐若珍)과 손자 서숭조(徐崇祖)에 이르기까지 3대가 봉성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 [[봉성 서씨]](峯城 徐氏) 시조는 서극(徐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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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 서씨 ==
{{본문|달성 서씨}}
'''[[달성 서씨]]'''(達城徐氏)
== 대구 서씨 ==
{{본문|대구 서씨}}
'''[[대구 서씨]]'''(大丘 徐氏)의 시조 '''서한'''(徐閈)은 [[고려]]조에
== 부여 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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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강 서씨 ==
'''[[절강 서씨]]'''(浙江 徐氏)의 시조(始祖)는 중국 절강성 출신 서해룡(徐海龍)이다. 그의 증손 서학(徐鶴)이 1597년([[조선 선조]] 30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총관(都摠管)으로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건너와 여러 전투에서 공(功)을 세우고 경상북도 [[성주군]] 대동방(大同坊)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서해룡을 시조로 받들고 선조의 고향인 절강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고 한다. 2015년 인구는 758명이다.
== 같이 보기 ==
* [[서 (중국 성씨)]]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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