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 (오호 십육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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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지명)|업]](鄴)의 사마영(司馬穎)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유연은 사마영의 몰락이 가시화되자 사마영을 속이고 업에서 빠져나와 흉노의 거주지인 병주(并州)로 향했다. 병주의 이석(離石)에서 거병한 유연은 [[304년]] 10월에 한(漢)을 건국하였다. 유연은 아들 [[유총]](劉聰)과 친족인 [[유요 (전조)|유요]](劉曜), 갈족(羯族)의 석륵 등을 거느리고 병주 중남부를 점령하고 서진의 수도 [[낙양]](洛陽)을 압박하였다. [[308년]]에 유연은 황제에 즉위하고 다음해에 수도를 평양(平陽 : 산시 성 임분)으로 옮겼다.
 
[[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 (전조)|유화]](劉和)가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인망이 없어 동생 초왕(楚王) 유총이 모반을 일으켰다. 유화를 살해하고 제위를 계승한 유총은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을 함락시켜 [[서진 회제|회제]](懷帝)를 사로잡았다.('''영가(永嘉)의 난''') [[장안]](長安)에서 [[서진 민제|민제]](愍帝)가 즉위하여 저항하였으나 유총은 [[316년]], 장안을 함락하여 민제도 사로잡았다. 이로써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이때부터를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부른다. 유총의 치세에 한은 화북 일대를 공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유요는 장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옹주(雍州 : [[산시 성 (섬서성)|산시 성]](陝西省) 중남부)·진주(秦州 : [[간쑤 성간쑤성]](甘肅省) 동부)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석륵은 하북(河北)과 병주 북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유총의 치세에 유요와 석륵이 점령한 지방은 사실상 독립적인 군벌화되었다.
 
[[318년]] 유총이 죽고 아들인 [[유찬 (전조)|유찬]](劉粲)이 뒤를 계승했으나 부하가 반란을 일으켜 유찬을 죽이고 유씨 일족을 몰살시켰다. 장안의 유요와 하북의 석륵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진하였으며, 유요는 죽은 유찬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을 조공(趙公)에 봉하였다. 12월에 석륵이 평양을 점령하여 반란을 제압하였으나 [[319년]]에 유요가 석륵을 공격함으로써 유요와 석륵의 두 군벌은 공식적으로 결별하였다. 유요는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모돈 선우]]의 후계자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으며, 석륵은 11월에 양국(襄国;현재의 하북성 형대邢台)에서 조왕으로 즉위하였다.('''후조''') 유요는 저·강족, [[구지]](仇池), [[전량]](前凉) 등을 공격하여 복속시켰으며, 325년에 낙양 근방에서 후조와 대결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전량이 독립하고 구지의 저항이 계속되어 전조의 국력은 계속 약화되었으며, 328년 겨울, 낙양에서 후조와 전투를 치른 끝에 유요가 석륵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아들 [[유희 (전조)|유희]](劉煕)가 상규(上邽 : 간쑤 성 천수)에서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329년]] [[석호 (후조)|석호]](石虎)가 유희를 사로잡고 전조를 멸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