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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초명(初名): '''진형'''(進刑)
|출생지= [[고려]] [[황해도]] [[신천군|신천]] <br /> (지금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신천군]])
|사망지= [[요나라]] [[랴오양 시|동경 요양부]] <br />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둥베이|둥베이 지방]] [[랴오닝 성랴오닝성]] [[랴오양 시]])
|부모= 아버지: 강태주(康泰周)
|본관 = [[신천 강씨|신천]](信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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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본문|강조의 정변|고려-거란 전쟁}}
한편 목종은 대량원군 순을 후계자로 삼고, 궁궐 수비를 위해 중추사 우상시 겸 [[평안도|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개경]]의 궁궐을 수비케 하였다.
 
이때 세간(世間)에서는 목종이 위독한 틈에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풍문이 돌았다. 이윽고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강조는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오던 도중,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도]] [[평산]])에서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한때 주저했으나 부하 장수들과 회의한 뒤 [[개경]]으로 가 목종을 퇴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태후와 그 무리들을 귀양보냈으며, 양국공(讓國公)으로 폐했던 목종을 죽였다. 이어 왕실의 부패를 척결하고 새로이 관제개혁을 실시하여 국왕의 측근 보좌기구인 은대(銀臺)와 중추(中樞) 남북원(南北院)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했다. 이때 중대사(中臺使)에 올랐으며, [[1009년]]에는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어 당시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